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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설교(요5:1-18) 엘리사벳

작성자
peace
작성일
2016-05-30 16:11
조회
1689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5장 (1~ 18절)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말씀사경회때 요한복음 3, 4장을 보았고, 지난달 제가 6장을 하였는데 5장도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5장을 나누고, 이후에도 가능하면 요한복음을 많이 볼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을 계속해서 보면서, 특히 우리가 이미 다뤘던 3, 4, 6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 지식, 기대 등에 대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시며 진리를 선포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포하심은 항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포 앞에 자유함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심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오늘도 같은 사건 앞에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증거되는 이러한 대조적인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생소한 예수님의 말 앞에 나의 반응은 어떠한가… 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1) 38년된 병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본문은 제가 참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이 38년된 병자가 꼭 저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병자에게 임한 은혜가 제게도, 그리고 우리 공동체 모든 분들께도 임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이 병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병자는 병이 38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상당기간을 병자로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길 바랬던 그는 어느날 이러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더라”
아픈 몸을 이끌고 베데스다 못 옆에 행각에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물은 좀처럼 동하지도 않고, 언젠가 “동했다”는 소문을 들을 때는 그보다 좀 더 성한 사람이 먼저 못에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좌절입니다.
한해, 두해, 좌절의 시간은 흐르지만.. 치유의 유일한 소망인 이 곳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나옵니다. 언젠가는 그 물에 내가 먼저 들어가리라… 동하지도 않는 그 물가를 주시하며.. 시간은 흐릅니다.
어느날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6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절)
참 이상한 대답입니다. 병이 낫고 싶어서 그 어려운 움직임으로 베데스다 못 옆에서 대기하는 사람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질문에 동문서답 합니다. 이 사람의 소망은 흐려지고,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무기력의 상태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께서 선포 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절)
이 말씀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9절)
이 병자의 소망없음,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은혜,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병자, 그리고 치유와 회복.. 이 모든 이야기가 제게 소망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라는 말씀에.. 믿음 없는 저는 늘 갈등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본인의 소망도 믿음도 희미한 사람에게 강권적으로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회복의 은혜… 이 은혜를 참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병자의 순종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38년된 병자라면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 보다는 누워있는게 편한 법입니다. 이미 나을것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가라니! 이렇게 이 병자가 스스로의 편안함이나, 유대 전통에 갇혀 있었다면 순종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아무런 기대할 것이 없는 무능력함이 오히려 이 병자에게는 은혜가 된 것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이 병자를 주님이 만나주셨고, 주님의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에 몸을 일으키니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 “스스로 가졌다 (잃을 것이 많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를수도 없고, 더 나아가 주님을 반대하게 된다는 것들 배우게 됩니다.
2) 유대인들의 반응
하필이면 예수님은 이 기적을 안식일에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안식일이었을까요? 왜 그냥 “나아라” 로 끝나지 않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논쟁의 여지를 준 것일까요?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마태복음 12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6장과 13장에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안식일에 대해서는 십계명에 나옵니다. 신명기 5장을 인용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절)”
(15절)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가안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전승(미쉬나)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금기 39가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서 더 깊게 들어가자면 너무 방대해지고 제가 다 알지도 못하기에 오늘은 깊이 다룰 수는 없습니다만..) 예수님께서 굳이 논쟁을 만드시면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고 또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강조한 그 안식일 전통들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그들이 정한 금기를 잘못 적용하는 것을 지적하시며 안식일의 참 의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안식일 병고침 사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정황이 나오는데, 18년동안 고통받던 한 여자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치시니 회당장이 분을 내어 말하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안식일 계명이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과 연관을 짓고 있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얽매고 있는 것을 봅니다.
38년된 병자가 본인의 낫고자 하는 소망마저 망각한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이 일생의 목표가 된 것… 즉 주객이 전도되고 목적과 방법이 뒤틀린 상황은 이렇듯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존의 관성(관념)을 내려놓았다면
유대인들은 안식일로 대표되는 그들의 율법적 관습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 금기 39가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안식일 외에 다른 규정은 또 어떻습니까? 절제에 절제를 거듭해야 지킬 수 있는 규정들입니다. 많이 노력한 만큼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기의”와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으며, 사람이 “자기 의”를 고수하는 한 예수님을 바로 볼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듭니다. 아니,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아니, 그 옛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아벨의 제사만 열납이 되자 가인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벨을 죽여버렸습니다. 자기 의가 왜 “죄”인지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진리의 그림자를 좇다가도, 진리가 밝히 드러나면 그 진리를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무지함으로 진리를 모르더라도 어느순간 우리 앞에 진리가 나타났을 때는 가던길을 멈추고 돌아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은 그 그림자와 혼돈 가운데 나타나신 진리의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 빛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 9~12)
이 말씀이 실제 사례가 요한복음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발견하며 새삼 놀라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일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취해야 할지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우리 각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지 알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병자처럼.. 그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이 38년된 병자를 찾아오신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내게,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보고 우리의 상태를 진단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도 아닌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이런 저런 관습에 이미 얽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순간, 바리새인들의 심정을 변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한 관습 – 십일조, 주일성수… 등-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데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내려놓고, 말씀속에서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찾아볼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는 방법이란 없습니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을 보면서, 여전히 바리새인과 같은 관습에 젖어 진리를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지요. 무엇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을 혼돈하게 하는지요. 오랜시간 하나님을 믿어왔다고 하나 여전히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 속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강권하신 은혜를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말씀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것을 배우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택한 자들이기를 원하고, 우리 앞에 진리의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는 가던 길이 어디이든, 잡고 있던 가치가 무엇이든 내려 놓고, 주님 말씀을 의지해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걷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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