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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마가복음
작성자
웹섬김이
작성일
2015-04-07 16:18
조회
5406

마가복음 1장 본문(클릭하세요)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개역개정)

1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2 As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 "Behold, I send my messenger before your face, who will prepare your way, 3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4 John appeared, baptizing in the wilderness and proclaim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5 And all the country of Judea and all Jerusalem were going out to him and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6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wore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7 And he preached, saying, "After me comes he who is mightier than I, the strap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tie. 8 I have baptized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 In those days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10 And when he came up out of the water, immediately he saw the heavens being torn open and the Spirit descending on him like a dove. 11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beloved Son; with you I am well pleased." 12 The Spirit immediately drove him out into the wilderness. 13 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the angels were ministering to him. 14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16 Passing along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Andrew the brother of Simon casting a net into the sea, for they were fishermen. 17 And Jesus said to them,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become fishers of men." 18 And immediately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19 And going on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the son of Zebedee and John his brother, who were in their boat mending the nets. 20 And immediatel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servants and followed him. 21 And they went into Capernaum, and immediately on the Sabbath he entered the synagogue and was teaching. 22 And they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for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and not as the scribes. 23 And immediately there was in their synagogue a man with an unclean spirit. And he cried out, 24 "What have you to do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25 But Jesus rebuked him, saying, "Be silent, and come out of him!" 26 And the unclean spirit, convulsing him and crying out with a loud voice, came out of him. 27 And they were all amazed, so that they questioned among themselves, saying, "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He commands even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obey him." 28 And at once his fame spread everywhere throughout all the surrounding region of Galilee. 29 And immediately he left the synagogue and entered the house of Simon and Andrew, with James and John. 30 Now Simon's mother-in-law lay ill with a fever, and immediately they told him about her. 31 And he came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lifted her up, and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serve them. 32 That evening at sundown they brought to him all who were sick or oppressed by demons. 33 And the whole city was gathered together at the door. 34 And he heal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cast out many demons. And he would not permit the demons to speak, because they knew him. 35 And rising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he departed and went out to a desolate place, and there he prayed. 36 And Simon and those who were with him searched for him, 37 and they found him and said to him, "Everyone is looking for you." 38 And he said to them, "Let us go on to the next towns, that I may preach there also, for that is why I came out." 39 And he went throughout all Galilee, pr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casting out demons. 40 And a leper came to him, imploring him, and kneeling said to him, "If you will, you can make me clean." 41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him and said to him, "I will; be clean." 42 And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made clean. 43 And Jesus sternly charged him and sent him away at once, 44 and said to him, "See that you say nothing to anyone, but go, show yourself to the priest and offer for your cleansing what Moses commanded, for a proof to them." 45 But he went out and began to talk freely about it, and to spread the news, so that Jesus could no longer openly enter a town, but was out in desolate places, and people were coming to him from every quarter.
(ESV)

전체 23

  • 2015-05-13 23:59

    말씀이 늘 그렇지만 익숙한 본문일지라도 읽을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마가복음을 다시 읽으며,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느낀 그 "권위"라는 것이 이전과 달리 집요하게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유대인들이 그 가르침에 놀란 후 (v.22),
    마가는 그 가르침 혹은 교훈의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으로 초점을 옮깁니다 (v.23-26).
    그리고는 그 이적에 놀라는 유대인들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v.27)

    놀라운 이적을 보고 난 후의 고백치고는 좀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이후 마가는 9장까지 꽤 많은 분량을 통해 계속되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언급합니다 (10장 부터는 제자들과의 담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그리고 1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수님께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고 다그치다가 오히려 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도 묘사를 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율법과 그 가르침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하늘의 권위가 눈 앞에 현실로 나타남...
    그리고 그 권위가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와 그 삶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 내는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현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생명의 능력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목격했겠지요.

    바울이 율법을 "의문" 혹은 "조문"이라고 표현을 하고 그와 반대되는 성령을 이야기 한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새로운 권위는 "죽이는 율법의 조문"이 아닌 "살리는 영"을 통한 종말론적 구원을 보이셨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성령없이는 그 어떤 권위있는 율법의 가르침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한의 회개를 구하는 세례와 예수님의 성령세례, 그리고 새로운 권위있는 가르침.
    이 모든 것이 복음이 죽음에서 택함 받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이자 약속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 예수가 그들의 삶안에 이렇게 현실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영이 우리를 하늘의 백성으로 새로이 만들어 가십니다.
    개인과 공동체에서 그 부흥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소망합니다.

    그저 문자로서의 말씀을 읽고 종교적인 소위 "유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이 있는, 그래서 이 삶을 새롭게 통치하시는 권위있는 살아있는 말씀이 제 삶을 계속해서 바꾸시고 성장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2015-05-14 08:23

      저도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신 후 사탄과 싸워 그를 물리치신다. (1:1~15)
      2. 마가복음의 나머지 부분은 이것을 증언한다. (귀신을 쫓아내심. 병든 자를 고치심. 사탄의 종교적 정치적 대리인과 싸우심, 부활로써 사탄을 극복하심)
      3. 그리고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똑같은 싸움을 계속해야 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1:8)

      우리말 개역개정에는 마가복음에 '성령'이라는 단어가 6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용례를 보면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1.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신다. (1:8)
      2. 예수님은 (먼저) 성령을 받으셨다. (1:10)
      3.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탄을 이기셨다. (1:12~)
      4.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역하셨으며 그 사실을 왜곡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3:29)
      5.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미) 증언하셨다. (12:36)
      6. 성령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적자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하실 것이다. (13:11)

      Craig S. Keener가 신약성경배경주석(한국IVP)의 마가복음 1:1~15의 해설에서 '고대의 저술가들은 종종 글의 서론에서 책의 주요 주제들을 언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의 제목을 '성령을 주시는 분에 대한 소개'라고 붙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권세와 성령을 결부시키지 못하면 가장 중요한 그림을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선택하신 백성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의 권세와 우리의 권세를 결부시키지 못하면 신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요즈음 사도행전 1:4에 머무는 듯합니다. (기다림) 1:8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요. (성령) 같은 기다림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과의 나눔이 감격스럽습니다.
      이누하님, 작은자님, 펀치넬로님, 매인자님 감사합니다.
      다른 분도 빨리 합류하세요^^


  • 2015-05-11 17:49

    매인자님 말씀처럼 요즈음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무슨 절차나 분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고 아버지의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방향성을 가지고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그의 백성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믿음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안에서 성장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인식이나 이해나 심리의 만족 혹은 관념이 아닌 실재적 영이십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의 나의 구주란 고백은 단지 인식이나 이해나 학습에 의한 고백이 아닙니다.

    실제 인간사에 개입하시고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증인의 고백입니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기에 아들의 부활의 증인의 자리에 서 있게 하고 아버지의 영이기에 아버지의 비밀을 그 아들의 권세를 가진 백성에게

    비밀의 계시를 알려 주십니다.

    성령은 개인에게도 역사하지만 공동체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하시고 인간의 사회적 구조를 변혁하십니다.

    한 명의 성령의 사람은 빛으로 공동체에 놀라운 빛을 발합니다.

    개독교가 판치는 한국 기독교에 과연 성령의 사람이 얼마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버님과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살아있는 그분의 영의 공동체인지..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 2015-05-08 06:58

    2. 요한의 물 세례(침례)와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침례) (7-8절)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정결 예식은 매우 흔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부 부자들은 자기 집에 정결 예식을 위한 개인 풀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당시의 관습적인 의식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할 때 행했던 의식이나 쿰란 공동체에 일원으로 가입할 때 행했던 의식과 유사점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동안 하던대로 단순히 반복적이고 피상적인 예식에 참여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사함을 받으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태복음 3:7-8, 누가복음 3:7-8),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라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 뒤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이사야(40:3)와 말라기(3:1)의 예언대로 이제 임박한 하나님의 개입, 그분의 종말론적 역사가 다가 오고 있으니,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를,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요한은 외쳤던 것 같습니다.(2-3절) 그리고 예수께서도 요한이 잡힌 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저는 이번에 마가복음 1장을 다시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를 통한 죄씻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임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5-27)

    왜 역사상 모든 부흥의 현장에서 그렇게도 회개가 외쳐지는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천년 전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때나, 행전의 기록들, 그리고 근래의 웨일즈 부흥, 평양 대부흥, 루이스 부흥, 인도네시아 부흥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기까지 합니다. '회개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 2015-04-27 22:45

    마가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포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선포에 관하여 깊은 고민을 하지 말씀을 읽습니다. 마가 복음의 첫 말씀에 깊은 교훈을 같이 나누겠습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좋은 소식이란 유앙겔리온(euangelion) 이라 합니다.

    마가 복음이 작성될 때 당시의 독자들은 이 1 절의 말씀을 듣고 충격과 떨림의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단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의 구원의 말씀이란 의미이기에 복음이란 단어에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놀라움을 가졌을까요?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2000 년 전 마가 복음을 읽었던 당시의 독자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초대 공동체의 성도들이 말씀의 은혜를 같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 당시의 고대 로마 문서에서 복음이란 단어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복음이란 적당한 영어 단어는 선포(proclamation)를 의미합니다.
    이는 당시에 절대 왕권을 가진 자들의 성명서와 같은 의미입니다.
    당시에 로마 문서에서 복음이란 단어는 왕의 탄생이나 커다란 전쟁에서 승리를 할 때 백성에게 선포하는 사면(amnesty)개념입니다.

    절대 권세가 그들의 백성에게 선포하는 큰 선물인 사면과 같은 선포의 의미가 당시에 복음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 황제의 절대 권력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마가 복음 기자는 이러한 절대 권력자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마가 복음 1 장 1절에 사용하였습니다.
    아마 이 마가 복음서를 읽은 당시의 초대 공동체 성도들은 " 또 하나의 권세가 주어짐"에 놀랐을 것 입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의 왕권을 가진 자들의 눈에는 하나의 반란과 같은 대역죄의 선언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하여져 아버지 왕국의 그의 의지가 행하여진 것 같이
    여러 선지자들의 계시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이 척박한 땅에서도 선포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가 기자는 드디어 그분의 계시가 이뤄지는 그 놀라운 은혜를 선포를 하였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기다린 소망의 그림자는 더욱 어두워져 가고 있고 이 땅에 과연 주님의 은혜가 임할 것인가?
    우리가 받은 계시는 단지 인간의 소망의 표현이지 이 땅에서 열매를 맺는 하늘의 권세의 은혜는 아닌가?

    많은 사람이 기다린 메시야의 흔적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의 상황은 더욱 어두워 이제는 인간의 노력이나
    열정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로 되었고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의 종교적 열정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어리석은 길로 오도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이제는 계시의 소망이 끊기고 절망의 그림자에 눌려 그들의 고통에 몸부림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역사의 현장 속에 개입하였고 어둠의 세력을 가진 땅의 권세에 주님의 종말론적 은혜의 빛이 그의 백성의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마가 복음의 기자는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이 첫 말씀은 온 인류가 기다린 구원자의 역사의 개입을 그의 백성에게 선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 단지 마음이나 교리적 이해가 아닌 주의 은혜의 현장에서 지체님의 삶 속에서 비추어지기를 바랍니다.


    • 2015-04-29 11:13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황제에게는 '신의 아들'이라는 공식직함도 있었고
      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누리기 원하면 로마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라고 요구했지요

      마가복음의 첫 선언
      예수야 말로 진정한 세계의 왕이라는
      로마황제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확고한 선언이고 주장이라면

      하나님나라의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왕되심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톰라이트의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약성서 주석 용어풀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다윗가문의 왕을 일컫는 호칭이었는데
      신약시대에는 메시아를 일컫는 호칭으로 쓰이다가
      바울서신에서는 메시아 본래의 뜻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등한(신성) 하나님이 보내셔서 인간이 되고 메시아가 되신 분이라는
      더욱 온전한 의미로 사용


  • 2015-04-27 10:02

    어떤 사본에는 (1절)의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11절) 웹섬김이로서 첫 댓글을 남기게 됨을 감사합니다.


  • 2015-04-30 01:31

    사실 바울의 초기 사역의 과정에 많은 실수가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열정이 너무 강하여 어느 경우는 사람에게 상처를 제공하고 또한 그의 서신서 표현에서 종종 강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아니하지만 그러한 불완전 존재를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의 성취에 사용하시는 모습이 은혜이고 놀라움입니다.

    바나바는 형제님 말씀처럼 온유하고 타인을 장점을 잘 세우는 좋은 기질을 가진 분입니다.


  • 2015-05-02 07:29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v.24)

    복음 선포의 시작 이후에 예수님을 향한 이 고백(?)은 다름아닌 귀신들린 자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지요.
    야고보도 이야기 했듯이 예수님을 누구인지 안다라는 것은 결코 우리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할 수 밖에 없군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권위"를 느꼈을까요? 처음 보는 젊은 청년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왜 그렇게 압도되었을까요?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서기관들과 비교를 하는군요.

    말씀의 가르침에 하늘의 권세가 있음이 오늘날 제 자신은 어떤 말씀을 접하고 또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성경학자 혹은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인지, 아니면 하늘의 권세가 제 삶 속에서 오늘도 저를 이끄는 생명이 있는 가르침인지.

    땅의 권세가 끝이 나고 이제 하나님의 권세가 이 땅에 임하였다...

    이 복음의 선포가 종교 경전을 지침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늘의 권세가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하심 아래 복종하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15-05-06 09:30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있는 자와 같다는 표현은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될 만한 하늘의 권위를 사람들이 느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바리새인 같은 당시의 선생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권위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 또는 랍비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권위에 의존하여 가르쳤지요

      예수님은 그 누구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권위로 가르쳤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 2015-04-29 09:48

    1
    복음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되었을 마가복음
    저는 마가를 생각하면 바나바가 떠 오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인데 (골 4:10)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밤빌리아에서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마가가 믿음직 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그 후에 다시 형제들을 방문하려 할 때
    바나바는 마가도 함께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바울이 반대하고 둘이 심하게(?) 다투었다는 일화가 있지요

    결국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나게 되고
    (사도행전 15:36~41)

    누군가는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은 바울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기에
    이후의 사도행전 기록은 바울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과연 그럴까요...

    2.
    바울 서신의 몇 곳에 언급되는 내용을 보면
    나중에 마가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빌레몬서 1:24
    나의 동역자 마가...

    골로새서 4:16
    나와 함께 갇혀있는 마가...

    딤후 4:11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 마가를 데려오라...

    3.
    그렇다면...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기 까지 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실수하고 연약한 형제를 따뜻하게 보듬지 못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라고 완전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어쨋든 마가는 그 이후 많이 반성(?)하고
    더욱 열심을 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요
    복음서를 최초로 쓰는 귀한 사명까지 잘 감당하게 되었지요

    아마도 바울이 나중에 마가에게
    그 일에 대해 한번쯤은 사과하지 않았을까.^^

    바울 : 여보게 마가 그때 자네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바나바와 대판 싸우고 갈라선 일
    미안하게 생각하네..그때 내 마음이 넓지 못했어
    자네 때문에 전도여행이 힘들어져서 많이 실망하고 화도 났었거든

    그럼에도 내가 더 참고 넉넉한 마음으로 품었어야 햇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네 용서해 주게...

    마가 : 형님도 뭘... 지난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주세요.
    그때 제 행동이 무책임했던 것은 사실이고
    바울형님이 충분히 화낼만 하시지요. 다 제 탓입니다.

    저 때문에 바울 바나바 두 형님께서 대판 싸우시고
    결국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제가 더 정신 바짝 차렸어요.
    다시는 그런 무책임한 일 하지 않겠다
    나중에 꼭 바울 형님께 인정 받는 동역자가 될꺼야

    굳게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어쩌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지요.

    바울 :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역시 우리 하나님이시네
    나의 연약한 모습조차 결국 선하게 사용해 주셨네 그려...

    4.
    바나바는 연약한 형제를 세우는 일에
    특별한 은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재야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 소개해준 이도 바나바 였지요.

    예루살렘에서 재산을 모두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은 이도
    바나바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위로와 권면의 사람
    연약한 형제를 세우는 사람
    나눔의 사람

    바나바

    신약교회의 초기 시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처럼 살고 싶습니다.


  • 2015-05-02 13:16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1절)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천사, 이스라엘, 또는 신실한 유대인을 가리켜 사용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그 백성을 다스리는 왕을 지칭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로마의 지배 하에서는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구원자'이며, 그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작은자님 말씀처럼 마가복음의 기자는 놀랍게도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이 약속하는 평화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친히 약속하신 평화의 ‘복음’이 시작되었다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지배 하에서 이 메세지를 들은 독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바벨론 포로기,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는데, 계시는 사라지고 이제 로마 지배하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고...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마가 복음의 기자는 바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디어 이땅에 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이사야 61:1)


  • 2015-05-06 11:24

    4절 세례요한이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8절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

    1
    '세례요한' 보다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오래 사용해서 이미 익숙해졌고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어법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가르치는자 요한'을, '가르침 요한'이라고 말하면 어색하지요
    공동번역도 세례자 요한으로, 새번역 성경도 세례자 요한으로 되어 있네요.
    누군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
    뭐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2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알다시피 당시의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였지요
    회개를 전파하는 예언자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기대를 바꾸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회개가 돌이켜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라면...
    그들은 그들의 엉뚱한 바램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방향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3
    요한의 물세례(baptize with water)와 예수님의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이 내용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마가와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 사도행전 11:16
    고린도전서 12:13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구절은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른바 '성령세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리적 문제로 논쟁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고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에 적실하고 긍정적인 도움이 될 수도
    이 공간에서 이런 토론이 적절한지도 잘 모르겠네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거 같아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즉 구원 받음을 성령세례라고 주장하는 입장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인데
    존 스토트의 입장이고 아마 개혁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장로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받아들여지는 주장이지요.

    다른 입장은...
    성령세례를 복음전파와 봉사를 위한 능력을 힙입는 것
    성령의 능력충만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지요.
    로이드 죤스가 이런 주장을 했고
    주로 오순절적 배경을 지닌 분들이 이런 입장을 수긍합니다

    개인적으로는 7-8년전쯤 처음으로 신앙적으로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던 무렵
    마틴 로이드죤스의 '성령세례'라는 책을 몇 번 탐독하며
    큰 도전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수백권의 경건서적을 탐독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제게는 기억에 남는 몇 권의 책중 하나입니다.

    오랜 기간 나름대로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나는 후자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사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 문맥에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표현이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싶어요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요한이 물로 한 일을 예수께서 성령으로 하신다는 건데..

    요한이 베푼 물 세례가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게 할 수 없었고
    성령으로 진정한 회개의 세례를 주는 분이 주님이라면

    성령으로 주는 세례란 구원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으로 능력충만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사역이
    보다 더 본질적인 사역이라 생각하는 거죠.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의
    성경적인 정확한 의미 과연 어떤 것일까
    나중에 꼭 예수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중 하나지요^^

    지체들의 생각이 궁금하네요...
    물론 작은자님의 생각도^^


    • 2015-05-08 04:51

      저도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가 회심시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심 후에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부여하시며 임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에 관한 여러 논쟁과 의견들을 접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자님이 추천해 주셨던 크레이그 키너(Craig Keener)의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라는 책을 읽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분은 진보적인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본인이 강한 성력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기에 굉장히 균형잡힌 견해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키너의 견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울과 누가가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듯이, '성령을 받으라' 또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동일한 표현이 성령의 역사하심의 여러가지 측면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통찰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고, 또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가 자주 성령의 역사하심을 공식화하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의 틀로 제한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책의 성령세례에 관한 챕터에서 결론 부분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고, 이제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통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지체들을 서로 세울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바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셨고,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성품을 갖고 거듭나게 하신다 (요한). 성령의 권능을 입혀 주심으로,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땅끝까지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행전). 성령의 권능을 입혀 주심으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수행하는데 수반될 갈등을 마주하도록 준비시키시며, 필요시에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도록 하신다 (마가).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올 때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분의 권능을 계속 의지해야만 한다."


      • 2015-05-11 10:24

        크레이그 키너의 책은 당연히 번역은 안된 책이네요^^
        이런 책들도 좀 번역해 주면 나같이 영어 짧은 사람들에게 큰 복인데...

        매인자님의 설명을 읽다보니 제가 오래 고민하면서 대강 정리한 입장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바울이나(다른 복음서 저자)와 누가의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하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는 것과.
        인용하신 그 책의 결론부분의 표현이 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하시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속으로 들어가서 그 관계 속에 머물면서
        믿음의 순종, 거룩한 삶,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게하시고 (내적 능력)

        공동체에서 지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거나 악한 세력을 대적할 때
        능력으로 힘을 주시는 (외적 능력)

        그런 두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5-05-06 13:16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니 예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집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십니다.

    사람들이 저녁에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옵니다.
    천하의 명의가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구해주십니다.
    그저 단 한마디 말로...모든 병자를 한꺼번에 치유하실 수도 있는 분이지만
    우리 긍휼하신 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지요.

    한 사람씩 사연도 들어보고 그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병까지 같이 어루만져 주셨겠지요.
    어쩌면 저녁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겠네요.

    저녁이 지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어쩌면 자정이 지나도록 밤 1시.. 2시가 지나도록
    주님의 치유가 계속 되었을지 모르지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겨우 피곤한 몸을 누이셨을 주님...

    그런데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죄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옵니다.

    새벽에 아직도 어두운데
    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일어나십니다.

    주님은 사람이셨기에
    기도하셔야만 성령의 능력으로 권능의 사역을 하실 수 있었겠지요
    분명히 기도가 주님의 능력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한편으로 주님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겠지요
    아무 죄 없는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기도하러 가시네요

    아...게으른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기도충성...
    새벽충성...


  • 2015-05-11 10:47

    11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보면서 그날 예수에게 하신 그대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체로 보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존재로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면서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매우 소중한 자녀야. 나는 너로 인해 기쁘다"

    이 말이 사실인 까닭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이고
    메시아에게 해당하는 것은 그 백성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톰라이트)

    .....

    언제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런 음성을 내게도 들려주시면 정말 끝내주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 그런 음성을 들려주시겠지요
    다만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하는 것일뿐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제게는 필요합니다.


  • 2015-05-08 20:32

    두란노 서원의 나눔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주님의 지혜가 여기에 참석한 모든 지체께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열정에 저도 조심스럽게 나눔의 글을 작성하겠습니다.

    이누하님의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있는 자와 같다는 표현은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될 만한 하늘의 권위를 사람들이 느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모세가 이렇게 말했다... 또는 랍비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권위에 의존하여 가르쳤지요. 예수님은 그 누구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권위로 가르쳤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관하여 좀 더 고민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의 말씀의 권세에 관하여 언급할 때 그분이 "나는 ..이다"란 소위“I Am” Sayings 말씀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이 당시의 구전의 인용으로 스스로의 자신의 권위를 언급하지 못하는 랍비와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욱 예수의 "나는 ..이다"란 선포는 다른 랍비의 말씀과 다른 자기의 권위를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그 말씀 권위의 차별성의 가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소위 예수의 “나는 …이다” 라고 하신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7 개의 “I Am” Sayings 말씀은 유일하게 복음서에서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나는 ..이다” 말씀을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말씀에 신학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붙였다. 혹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다. 이러한 두 가지 논의가 오랜 역사에 걸쳐 진행되었고 지금도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에 나온 “ 나는 ..이다” 말씀에 관한 학자들의 간단한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 복음에 사용된 “나는 ..이다” 란 7 개의 말씀은 고대 헬라어로 Ego Eimi 라 작성되었고 70인역의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언급하실 때 사용한 말씀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말씀에서 이 요한 복음서에서 사용한 헬라어 Ego Eimi를사용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은 요한 복음의 저자가 요한 목적의 기록 이유를 밝힌 20장 31절의 말씀인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와 연관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이란 요한 공동체의 저술 목적에 이러한 “나는 ..이다”의 신학적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의 유대적 기원으로 이사야서를 언급하였고 좀 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 참여의 장으로 (모세의 출애굽의 경우에 하나님의 정체성을 언급하시면서 사용의 경우)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헬라적 기원을 언급한 슈바이쩌나 볼트만은 영지주의나 마니교에서 이러한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고 주장합니다.

    요한 복음의 7 번의 이적과 “나는 ..이다” 언급은 하나님의 온전한 역사를 표현하는 유대교의 수신학적 숫자와 관련이 있고, 이 말씀에는 이미지가 연관되면서 예수의 사역의 정체성과 역활을 언급합니다. (참고: A Study of the “I AM” Phrases in John’s Gospel By O. L. Veres)

    마가 복음을 포함한 공관 복음서는 이와 다르게 당시의 유대교 랍비의 가르침과 유사한 비유의 설명과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가 복음서에서 나온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있는 자와 같다는 표현”은 예수의 말씀 형태에 관여한 것이 아닌 하늘의 권세를 예수가 가졌다는 예수의 징표에 당시의 유대인이 보인 반응입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달리 말씀보다 이적을 강조하였습니다. (18개의 이적의 표현과 4 개의 온전한 비유말씀의 언급) 특히 다른 복음서와 달리 18개의 이적중 7개은 축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 복음서의 기술적 특징은 행동의 즉시성을 강조하여 종말론 현장에서 악한 영의 지배에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예수의 사역을 기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1장 1절을 복음의 시작이라 표현(예수 왕국의 지배)하였습니다.

    이러한 종말론 메시야 나타나심을 소망하는 유대인의 심정은 당시의 유대의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심지어 주의 기도문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진 당시의 기도문인 18 기도문(쉐모네에스레)이나 카디쉬기도문에도 잘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에녹서 희년서등 소위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나타난 문서에서 이러한 하늘의 권세를 가진 종말론적 메시야의 유대인의 열망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마가 복음서는 당시의 유대인이 소망한 이러한 하늘의 권세를 가진 종말론적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가진 예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심판의 자격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시고 계시의 완성으로 이 땅에 오심을 표현하였습니다.(왕국의 도래)

    이러한 징표로 바로 축사나 이적을 마가 복음 기자는 강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마가복음서에 언급된 당시에 유대인이 보인 반응과 악한 영의 지배에 놓인 자의 고백에서 예수가 하늘의 권세를 가진 선지서에 언급된 종말론적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마가 기자는 작성하였습니다.

    참고로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비둘기의 상징성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며 노아 홍수의 새로운 계약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표현 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으로 비둘기와 독수리가 성령의 상징으로 표현이 됩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시 하늘로부터 소리인 “내 사랑하는” 말씀은 당시에 유대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메시야를 언급하는 당시의 메시야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현재 이곳에 논의된 성령 세례에 관한 나눔은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작성하겠습니다.


  • 2015-05-16 12:24

    3. 광야, 성령, 권위

    피스님 말씀처럼 마가복음의 기자는 1장 앞부분에 복음서 전체의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동일한 단어를 포함하는 구절들을 연결하여 성경(구약)을 해석하던 전통에 따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반복해서 표현하던 방법을 따라 중요한 키워드를 역시 반복해서 표현함으로 핵심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1장 부분에서만 광야(한글 4번, 헬라어 에레모스는 6번), 성령(한글 3번, 헬라어 프뉴마는 6번), 권위(2번)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점이 특히 눈에 띄입니다.

    '광야'(히브리어로 '미드바르')는 말씀, 실재 등을 뜻하는 '다바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미드바르)는 하나님의 말씀, 계시(다바르)가 임하는 곳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종살이하던 이집트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다다른 곳...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직접 인도하여 주시고, 매일 만나로 먹여 주시던 곳...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임한 바로 그 곳. 마가복음의 기자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구원의 역사가 시작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도 펀치넬로님, 피스님 말씀처럼 이번에 새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께 '성령'이 임하시고, '권위'를 받으신 점에 계속 마음이 갔습니다. 이 '권위'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는 고전 헬라어 문헌들에서, 어떤 내재된 육체적, 영적, 자연적 힘을 뜻하던 '두나미스'라는 단어와 달리, 법적, 정치적, 사회적인 권능, 권위, 권한 등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타고 나는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권세'를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다니엘서에서도 이 '엑수시아'라는 단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권세, 특히 하나님의 통치를 임하게 하시는 인자 같은 이에 주어진 권세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13-14)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과 대적하여 승리하심으로 이 인자의 권세를 증명해 보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이땅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더러운 영과,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심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통해 계속 승천하시기 전의 예수님게서 남기신 사도행전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어찌나 그분께서 지상사역 동안 보이신 모습과 동일해 보이는 지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을 그분의 영을 받은 자들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인은 말그대로 자기 두눈으로 사건을 보고, 목격한 사람을 말하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목격자의 말을 전해만 듣고 어떤 사건의 증인이 되겠다고 법정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말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는 단지 웃음거리만 되겠지요. 우리도 많은 경우 그런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 저도 함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립니다.


  • 2015-05-22 10:36

    4. 부정의 전파에서 정결의 전파로 (40-42절)

    제가 주님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성경을 다시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해서 복음서에 다다랐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점 중에 하나가 예수께서 부정한 자를 '만져서(!)'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셔서 광야로 이끄신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친히 그들과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출애굽기 33장),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하신 것으로 마무리됩니다(40장).

    이제 레위기에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정한 존재인지를 지루할 정도로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행해지던 동물 희생 제사라는 틀 안에서,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피 흘림을 통한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히브리서 9장). '부정'과 '정결'에 대해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더럽거나 깨끗함, 비위생적이거나 위생적인 것의 구분을 넘어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고 한편으로 악한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구별되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각인시켜 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서까지 이어지는 성경의 내용은 인간은 부정을 전파할지언정, 정결을 전파하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학개 2:12-14)

    인간은 자신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 7:20-23). 바울 사도도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로마서 7:18), 자신은 곤고한(비참한) 자라고(로마서 7:24)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것이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나병 환자와 접촉한 사람도 부정하다고 여겨졌기에 혼자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살았고, 다른 사람이 지나갈 경우 접근을 막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했다고 합니다. 즉,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면 예수님 자신도 예식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부정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대로 부정한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결이 전파되었습니다!

    다윗의 시편 기자도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던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탄식하며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10-12)

    여기서 '창조하시고'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바라'입니다. '창조하다' 또는 '구분하다'의 의미를 가지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창세기 1장 1절에서와 같이 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창조 사역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도 자신 스스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음을...오직 하나님께서만 정한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며 눈물로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도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정결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 2015-05-27 18:23

      1
      그렇군요. 주님은 정켱케 하시는 분입니다. 정결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2
      이 내용이 이곳 이 시점에서 적절한 것인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매인자님 글에서 언급된 내용중에 최근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있는 내용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다른 것이 아니라...
      로마서 7장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쯤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채셨지요
      매인자님께서는 롬7장에서 묘사하는 사람이 바울사도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저도 거의 평생을 장로교회를 다니면서 같은 해석을 지지하다가
      (하긴 지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그런가 보다 했으니까...^^)

      최근에는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이라고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단지 성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무의미 하지요.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적절한 해석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젠가 로마서에 대한 나눔도 있겠지만
      기다리다 숨 넘어 갈거 같아서...^^

      가능하시다면 롬7장에 대한 토론방도 열어 주실 수는 없을까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려봅니다.

      샬롬


      • 2015-05-30 07:17

        이누하님,

        로마서 7장에 관한 나눔을 위한 자리를 씨앗나눔 게시판에 마련했습니다.

        바로 가기

        샬롬


  • 2015-05-22 14:07

    2000년 전의 마가 복음 기자는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는가?
    그리고 현재의 독자인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공관 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이 수인(囚人)된 후부터 그분의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언급을 하고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와 달리 세례 요한의 옥에 갇힘 전에 사역의 시작이 있었다고 언급을 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와 4 복음서의 예수 사역의 신학적 어느 정도의 해석의 차이점에 따른 기술인 것이다.
    이곳에서 이러한 신학적 깊은 논의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 논하지는 않겠다.

    마가 복음서 기자의 예수의 첫 공생애의 외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을 우리 주목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전제 조건이 바로 때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도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많이 잊고 있다.

    예수의 말씀에서 이러한 구원의 때를 비유로 언급하신 성경 구절이 많다. (기름을 준비한 혼인 잔치나 탕자의 비유 혹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등 매우 많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6장 1-2 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언급하면서 은혜의 때가 구원의 날로 언급하였다.

    사실 구원이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은혜의 때가 임해야 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때를 (구원의 문을 열 때 닫을 때를 성경은 분명히 언급을 하였다.) 구원의 날로 언급을 하였다.
    사실 구원의 날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그분의 은혜의 때임을 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항상 언급을 하였다.

    예수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서 은혜의 때가 도래한 것이고 그렇기에 회개와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회개와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은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은혜의 때에 가능한 것이다.
    공동체의 경우는 부흥이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고 또한 택한 백성에게는 각 개인의 어느 삶에서 주님의 부르심이 분명할 때가 그러한 때이다.

    주님의 은혜의 구름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하여 쉐키나의 영광이 각 개인에게 임할 때 그들은 구원의 단비를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선포는 이러한 성경의 구원의 역사의 영적 정통성을 따라 하신 말씀이고 선지자의 계시의 완성의 시작을 선포하신 말씀이다.

    23절의 회당에서 귀신들인 자의 고백은 더욱 놀라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사실 회당에 참여한 자는 유대인의 성인이고 자신들의 관점(유대인)에서 주의 백성이라 불리우는 자이다.
    귀신 들인 자가 회당에 참여 할 수는 절대 없다.

    이는 정상적으로 보인 자가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그 안에 있는 악한 영이 자신을 표현 한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믿음이 있는 자 혹은 매우 종교적인 자가 바로 귀신이 들린 자가 될 수 있는다 성경적 예증이다.
    복음 사역의 현장에서 이러한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예수의 회당의 사례처럼 지금도 대부분은 이러한 영적 반응도 보이지 않고 설사 반응을 보여도 악한 영의 놓인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개인적으로 목도하였다.

    악한 영은 예수의 사역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당시에 지명을 따라 이름을 호칭하는 표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고 있다는 표현이다.

    예수의 오심은 악한 영의 권세와 직접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그리고 그들을 멸하러 오셨고 그분의 권세의 명칭은 하늘의 거룩한 자였다.

    바울의 표현처럼 "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에베소서 2장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장 12절) 이 말씀은 단지 1 세기의 신화적 요소를 가진 표현이 아닌 진정한 영적 전쟁의 참여자의 경험에서 나온 표현이고 이는 마가 복음 1장에 예수의 첫 사역의 현장인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정상적이고 종교적인 유대인에게 임한 악한 영의 고백에서 나온 예수의 사역의 정체성을 바울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 사역의 현장에서 깨닫게 된 고백이다.

    만일 마가 복음 1장을 읽으면서 회당의 귀신 들린 자의 고백이 단지 예수의 사역의 근동 고대적 양식적인 표현이고 당시의 이분법적인 우주관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해석되고 단지 비유적이고 현재의 과학의 시대에 어울리지 아니한 말씀이라고 해석이 된다면 당신은 아직 구원을 모르는 자이고 당신이 아는 예수는 단지 역사적 예수, 종교적 예수 혹 윤리적 선생으로 예수를 아는 것일 뿐..아직 구원자 예수를 모르는 증거일 수가 있다.

    주님의 택한 백성은 그렇기에 은혜의 때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