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하늘이 보낸 사람, 송요한'의 머리글이다.

이 전기는 한 비범한 인물에 관한 솔직한 기록이다. 저자는 송요한의 특이한 성격이나 영적 결함을 감추거나 미화할 의도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송요한은 고집이 세고 성정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너무나 완고해서 어디에도 쉽게 속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반항아였고 평생을 독불장군처럼 살았다. 무뚝뚝했고 심지어 무례할 때도 있었다. 부인과 가족은 때로는 송요한이 자신들을 버려뒀다고 느꼈을 것이다. 뛰어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학자처럼 설교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투박하게 설교했다. 외모도 호감을 주지 못했다. 이마로 흘러내린 흐트러진 머리칼과 보잘것없는 옷차림새, 걸걸한 목소리가 그의 특징이었다. 독자로서 언뜻 보기에는 왜 하나님이 송요한의 사역을 특별히 기뻐하시고 축복하셨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레슬리 라이얼은 송요한을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하나님은 송요한을 사용해서 당신의 영향력을 동남아 전 지역으로 넓히셨다.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고 그 열매는 지금도 남아있다. 중국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의 후신인 OMF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의 선교사들은 지금도 타이완, 인도네시아, 타일랜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송요한의 순회 사역을 통해 회심한 중국인과 마주치고 있다. 기도와 말씀에 열중하는 수많은 교회가 송요한의 방문으로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송요한이 가는 곳마다 부흥의 불이 붙었다.

송요한의 놀라운 사역에 비결이 있을까? 그의 기이한 면모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은 왜 그를 사용하셨을까? 왜 그를 통하여 수많은 죄인에게 구원을, 수많은 신자에게 삶의 충만함을, 수많은 교회에 부흥을 허락하셨을까? 어떻게 15년에 불과한 단기간의 사역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셨을까? 그의 경험과 삶에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특별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까? 여러분은 이 매력적인 인물의 전기를 읽는 동안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독자로서 당연한 질문이다. 신자가 부흥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거룩한 삶과 놀라운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비결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찰스 피니 같은 이는 교회가 특정한 조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부흥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송요한이 관련된 영적 부흥은 중국 교회의 조건과 상관없이 중국 교회가 혹독한 시련을 앞두고 강해져야만 할 바로 그때 일어났다. 동시에 이 부흥은 송요한의 성품과 노력이라는 조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송요한을 사용하셨다고 믿는다. 동시에 송요한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그릇이었다.

무디가 세상을 떠난 후에 토레이는 “왜 하나님은 무디를 사용하셨나?”라는 소책자를 쓰고 일곱 가지 이유를 제시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왜 하나님이 송요한의 사역을 탁월하게 하셨나?”를 물을 것이다. 독자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나는 여기서 송요한의 인격과 사역의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로, 송요한은 자신을 제물로 바친 사람이었다. 저자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임스 데니는 이렇게 말했다. “큰 포기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낳는다.” 저자는 송요한의 삶이 이것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송요한도 여러 번 넘어졌지만, 그의 중심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에게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평생 지고 살았다. 영예로운 학자의 삶을 포기했고, 뛰어난 총명의 상징인 졸업장도 바다에 던져버렸고, 부모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쳤다. 누가 이러한 처절한 몸부림에 감동하지 않겠는가! 송요한은 명예와 돈을 탐하지 않았고 인기도 구하지 않았다. 칭찬받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는 종종 “여러분은 사람을 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곤 하였다. 강단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위는 진리를 드러내려는 것이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어리석은 자가 되려고 했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청중의 환호와 갈채로부터 높아져서는 안 될 자신을 보호하려고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을 위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웠다. 엄청나게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났고 끼니는 간단하게 때웠다. 그는 자기 병의 고통조차 무시하고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강단에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런 일꾼을 부르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은밀한 욕망으로 인해 우리의 섬김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우리는 성공적인 전도를 통해 명성을 떨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단체와 교회가 유명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사람의 칭찬에 들뜨고 그것이 사라지면 낙담한다. 우리는 세상의 공명심에 사로잡혀 권력과 인기와 특별대우를 갈망한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높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송요한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렸다.

둘째로, 송요한은 능력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았다. 천성적으로 탁월한 지성과 특별한 개성이라는 은사를 받았지만, 그것에 의존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7-2:5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말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체험을 통해서 기도의 막강한 능력을 배웠다. 사실 엄청난 영적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기도가 함께할 때 드러난다. 십자가의 말씀이 기도와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될 때에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송요한을 통해 나타난 능력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이었다.

송요한은 성경을 사랑했다. 미국에서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걸신들린 듯 말씀을 먹기 시작하였고 성경은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매일 11장씩 성경을 읽으며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의 신성한 가르침에 푹 절였다. 심지어 성경과 신문 외에 어떤 것도 읽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성경을 강해할 때 성경의 장과 권을 넘나들며 남이 보지 못한 깊은 교훈을 연결하여 가르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때로는 알레고리에 의존하여 기발하고 엉뚱한 해석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성경의 교훈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깊이가 있고 놀라울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십자가가 중심이었다. 그는 설교할 때 청중을 놀라게 할만한 행동이나 극적인 몸짓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했고 깊은 기도의 결과였던 것이 분명하다. 정죄하는 설교도 했지만, 영혼을 세우기 위한 기도도 끊이지 않았다. 그의 기도생활은 잘 훈련되어 있었고 중보기도는 체계적이었다. 매일 새벽 4, 5시면 일어나 회심한 신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목록을 보며 기도하였다.

오늘날 교회에는 타협 없는 설교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십자가는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은 여전히 인간의 연약함을 사용하신다. 성령은 여전히 더듬거리는 단순한 말을 통해 청중의 양심에 호소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의 근원을 다른 데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셋째로, 송요한은 참된 사람이었다. 그를 무례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참되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아첨의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예수님처럼 위선을 혐오했다. 목회자건 아니건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기만적인 요소를 강하게 질책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존 웨슬리에게 부흥의 첫 전조는 ‘죄의 자각’과 ‘철저한 죄의 고백’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청중에게 항상 이 두 가지를 기대했다.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때로는 집회 중 공개적으로 개인을 지목해서 죄악을 폭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지목을 당한 신자들은 크게 부끄러워하였지만, 이후에 죄의 고백을 통해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세례요한처럼 죄인들을 질책했다. 특히 변질된 복음을 전하거나 삶이 복음 진리와 모순된 목회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 질책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항상 실천 가능한 것을 제시하였고 죄의 폭로는 고백과 용서를 받게 하려는 방편이었다. 그는 죄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변상해야 할 것을 변상하며,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바리새주의는 오늘도 서구의 교회를 배회하고 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면서도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확신하게 하는 이 끔찍한 위선의 영은 늘 우리를 점령해왔다. 이 영은 진정한 기독교를 파괴한다. 왜냐하면, 위선은 우리를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서로에 대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송요한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넷째로, 송요한은 교회를 통해 일했다. 자신은 독립적인 기질의 사역자였지만 한 번도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교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어떤 교회의 초청에도 응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교회와 함께 일했고 교회를 통해서 일했다. 그래서 그가 지나간 곳에는 회심한 신자들뿐 아니라 부흥한 교회가 남았다. “송요한의 집회 후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 교회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이 전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의 사역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집회가 끝나면 작은 전도단을 만든 것인데 주로 한 조에 세 명이 속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복음을 전하기로 서약한 회심자들로 구성했다. 후저우에는 50개의 전도단이, 푸저우에는 96개의 새로운 전도단이 생겨났다. 샤먼과 구랑위 섬 지역에는 147개의 전도단이 조직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송요한의 집회가 절반 정도 진행된 시점에 약 503명의 회심자로 조직된 111개의 전도단이 생겼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타이완의 타이중과 타이난에서는 신자들이 조직된 295개의 전도단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돈과 보석을 헌납하기도 했다. 송요한은 회심자들이 성령 충만을 통해 거룩해져서 영적 전선에 동원되기를 열망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기 위한 사경회와 성경학교를 계속해서 열고 또 열었다.

하나님은 송요한을 일으키셔서 새로운 길을 만드셨다. 그래서 그 길을 많은 신자가 따를 수 있었다. 그는 복음 전도가 안수받은 목회자나 능력 있는 소수 그리스도인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리든지 성숙하든지 주님의 증인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중국은 송요한 같은 위대한 전도자들뿐만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간증으로 복음화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가 예배자로서뿐만 아니라 증인으로서 회중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역을 나누어 감당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영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의무와 특권은 모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남인도 교회 헌법 중)

우리는 위대한 섬김의 능력을 소수의 영적 거장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은 대가를 치르고 믿음으로 그 능력을 붙잡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이 일꾼의 자질과 하나님이 왕성하게 하신 그 사역의 특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4년, 존 스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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