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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복음 1,2장 그리고 기도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4-09-17 12:18
조회
5792
아래의 글은 몇 년 전에 청,장년 지체들을 섬길 때 임시로 작성한 성경 교재입니다.

성경 공부 대상이 성경에 대한 신학적 호기심을 20-30대 청,장년 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신학적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몇 몇 청년들은 그들이 학습한 성경의 문서설을 잘못이해하여 성경의 권위성에 심각한 의구심을 가졌기에 그에 대한 기초적 설명을 교재에 포함시켰습니다.

각 연령 별로 성경 말씀을 나눌 때 연령 대상의 특징에 따라 신학적 논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 나눔의 경험에 의하면, 말씀 속에 감추인 깊은 영적인 나눔은 대상의 영적 상태에 따라 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 연구의 나눔은 우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이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해석보다 더 중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 이 과정에서 원어의 표현 연구나 당시 문화의 배경 연구 혹은 해석의 역사적 전승사를 연구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나누는 자의 삶에서 그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자신도 이 점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나눔에서 지체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전하는 자가 스스로 하늘의 두려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으로 각 지체들이 장성하는 것은 주님과 각 지체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마가 복음의 1장을 가지고 나눈 말씀이고
뒤에 나오는 글은 초기 기독교의 이단의 모습에서 현재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성찰하는 글이고
마지막으로 기도에 대한 짧은 단상을 작성하였습니다.

성경 공부 교재는 pdf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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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 (REVIEW)

지난주까지 하나님의 이름 (God’s Name) 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학습한 이유는 인간의 역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중의 아버지 (Father of gods)란 의미가 있는 엘(El)이란 이름에서 모세 시대까지 개인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약 백성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그 증거로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 아들이삭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창세기 17: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창세기 저자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엘 샤다이(El Shaddai)라고 표현하였고, 21장 33절에선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의미로 엘 올람( El Olam)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개인의 경험 중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표현하시면서 모세를 그분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스라엘이란 의미도 야곱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겨루시는 하나님)에게 보내면서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3,14절을 그대로 인용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아룄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I am who I am)”>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최초로 그분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곧 나다.”라는 히브리어가 바로 여호와(YHWH), 곧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가 택하신 개인에서 민족으로 그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호칭이 예수님께서 아빠(Abba:아바)라 부르면서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임을 나타내셨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자이면서, 주로 믿는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 5절의 말씀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직접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름을 부를 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감격함을 느끼면서 그분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금주부터는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성경 속에 어떻게 예수님이 표현되었고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겠습니다. 특히 요사이 많은 설교자와 책자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왜곡되게 표현하여 올바른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워 우리 삶에서 그분 말씀의 교훈을 하면서 주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첫 성경 말씀으로 마가복음을 선택했습니다.
마가복음을 선택한 이유와 마가복음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아래에 요약하겠습니다.

1. 마태,마가,누가복음을 공관 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 복음(Synoptic Gospel) 이란 “같이 본다.”란 의미입니다. 마태,누가,마가복음을 읽으면 서로 같은 구절이 각 복음서에 많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통된 말씀을 서로 갖기 때문에 공관 복음이라고 합니다.
2. 마가복음을 예수님에 대해 알기 위한 복음으로 제일 먼저 선택한 이유는 마가복음이 4 복음서 중 제일 먼저 작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마가복음은 (아래에서 마가로 표현) 총 105부분, 661절로 구성되었고 마태는 93부분, 1,068절, 누가는 81부분, 1,149절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의 저자는 마가의 661절 중 606절을 마태에 사용하였고 누가의 저자는 마가의 661절 중 320절을 누가에 사용했습니다. 특히 누가의 저자는 마태의 저자가 마가에서 사용하지 아니한 31절을 누가에 사용했습니다.
3. 마태,누가는 마가의 순서에 의존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의 행적이 복음서마다 순서가 다르게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을 읽다가 “성경이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예수님의 행적과 일정이 복음서마다 어떻게 다르게 표현됩니까?”라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자료 (구전이나 사도에 의해 전승된 자료)를 가지고 각 저자의 관점에 맞게 배열합니다. 누가복음 1장 1절에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이 여럿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마가의 예수님의 행적의 순서가 마태,누가에서 거의 같게 표현되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 누가 둘 다 같이 마가의 사건배열과 다르게 표현된 구절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리스어로 표현된 공관 복음 중 마가복음의 단어나 문장구조가 마태나 누가에 비해 세련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특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냈습니다. (화내시고 우시고 배고프시고 피곤하신 모습을 그대로 나타냈습니다.) 특히 마가에서 예수님 당시의 언어인 아랍어가 성경에 그대로 쓰여 있습니다. (예: 달리다굼.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4. 초대 기독교 교부 파리아스(2세기)의 글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2절에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바나바의 사촌이 바로 마가였습니다. 아마 마가는 이런 사도들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에 대한 행적을 직접 듣고 마가복음을 작성한 것 같습니다(65년경).

이런 이유로 마가복음을 성경공부의 첫 교재로 선택했습니다.
성경공부 방법

1.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20절까지 숙독하십시오.

말씀을 읽으면서 각 구절에서 교훈과 저자의 작성의도 ( author’s intent in the composition)을 파악해보십시오. 자신이 느낀 내용을 노트에 적어 보십시오.
몇 가지 예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경공부의 깊이에 따라 어떻게 성경의 해석이 달라지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자신 말씀 이해의 깊이와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파악해 보세요.

1) 예수께서 오시기 전 세례요한이 나타났고, 물로 세례를 주었고 그 후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광야에 가셔서 시험을 받았고,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제자를 찾으셨다.
단지 이렇게 이해만 했다면 이는 말씀을 읽기만 하였고 말씀 속의 교훈을 전혀 얻지 못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 성경에 대한 것 지식은 얻지만 깊이 있는 교훈을 얻지 못하여 우리 삶에 적용시킬 어떤 말씀도 얻지 못합니다. 많은 교인이 이렇게 피상적인 말씀 읽기방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2) 2절에서 이사야 글을 인용함으로 예수의 오심이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그
예언의 말씀에서 세례요한이 나타났다. 세례요한은 유대인에게 세례를 주면서 회개하라고 하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였고 겸손함을 보였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 친히 말씀의 성취를 이루고자 세례를 받았고 그 후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요한의 죽음 후 새 시대의 나타남을 알리시면서 그의 사역의 첫 준비로 제자들을 삼으셨다.
교훈은 우리도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기다리면서 나의 죄를 회개하면서 요한처럼 겸손하게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겠다. 특히 제자들의 모습처럼 예수님의 말씀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겠다.
이렇게 이해하셨다면 많은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그 교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많은 큐티(Q.T)책자가 이렇게 작성되었습니다.

3) 1절에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이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마가복음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2절의 말씀은 이사야서와 말라기서가 같이 혼합된 말씀이다. 왜 저자는 이 말씀을 여기에 작성했을까? 세례자 요한이 나온다. 그의 모습은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과 같다. (열왕기하 1장 8절) 그의 모습에서 검소한 생활을 볼 수 있고, 그 당시 노예가 행하는 신발끈 푸는 행위를 표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 사역을 망각하지 않고 겸손하게 순종하였다. 이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다. 예수는 죄가 없으시면서 말씀의 성취를 위해 세례를 받으셨고 그리하므로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성(Identity)을 시편과 창세기의 말씀을 가지고 선언하셨다(11절). 예수는 성령에 의해 광야에 가셨고 거기에서 그분의 종말론적인 메시아 결단을 하셨다. 그분은 요한이 잡힐 때까지 준비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 드디어 공생 애의 시작을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침묵하신 300여 년의 시간을 깨고 드디어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자기의 삶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고 따라나섰다.
이처럼 말씀을 해석하면 매우 깊은 단계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해석
하려면 성경에 대한 배경역사와 기초적인 신, 구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래서 성경공부 시 별도의 좋은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사전이나 주석서)

오늘 공부할 내용은 이런 해석보다 몇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 개인의 성경공부에 이처럼 심도의 말씀해석을 적용할 필요가 없지만 더 많은 말씀의 신비를 맛보고자 예문으로 나타내 보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인 경건의 시간에 성경해석 내용으로 2단계나 3단계가 적절하다고 보입니다.

성경공부

1절: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어느 전승 사본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가 저자는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가의 저자는 마가복음 첫 장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하면서 기독론의 완성(예수가 구주이시다.)이 마가복음의 핵심임을 독자에게 알립니다.
특히 복음의 시작이란 표현은 마가의 저자가 배운 복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마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 마가복음을 작성하고자 얻은 자료들의 인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모습이 전승되었는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2절: 예언자 이사야 글에서 이는 이사야의 글이 아닌 말라기 선지자의 글(말라기 3:1)을 나타냅니다. 이 말라기 말씀은 당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나쁜 제물을 드리면서 형식적인 예배의 모습을 보인 유대인에게 향하신 분노의 말씀입니다. 즉 더러운 모습을 정결하게 하고 새로운 언약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와 같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아니합니까?
3절은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가의 저자가 인용한 구약 말씀은 말라기와 이사여서의 합성입니다. 그렇지만, 마가의 저자가 이사야의 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표적인 구약의 선지자가 이사야이기 때문입니다.

4절: 세례요한은 유대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터툴리안이라는 역사가는 유대인의 특성을 표현하면서 “그들은 매일 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이렇게 정결을 의미합니다. 비유대인이 유대인이 되고자 해야 할 3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할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약백성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속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세례입니다. 이는 정결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비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에게 세례를 준 이유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한 언약이 끝났고(유대인에게만 적용) 새로운 언약시대가(모든 민족) 오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새롭게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300년간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마지막 선지자이고 그 후에는 메시아가 온다고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5절: 5절과 9절은 절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대 지방을 나타낸 지도를 보면 5절에서 말하는 온 유대 지방 사람과 온 예루살렘 주민은 요단강 하류에 있는 지역에서 온 사람으로 소위 라오스(Laos) 계층의 사람으로 법의 보호를 받는 중상류층을 의미합니다. 9절의 갈릴리 나사렛은 요단강 상류에 있으면서 구약의 암하 아레츠(Am-ha-aretz)계급을 나타내는 오클로스(Ochlos)계층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류층 즉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마가 저자는 5절과 9절을 병립형태로 그리면서 갈릴리의 세례요한의 현장에의 긴장감을 나타냅니다. 보통 상류, 중류층과 하류층 투쟁의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서에 종종 그려지지만 여기에선 투쟁의 모습이 아닌 회개하기 위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사람의 계급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만듭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당시가 계급사회임을 기억하면 이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또한 새로운 언약은 우리의 진실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요사이 교회에서 회개의 설교가 나오면 낡다고 생각하는 교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멋진 프로그램과 참살이의 생활을 구현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모습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훈과 상충한 모습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6절: 세례요한의 외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열왕기하 1장 8절에서 엘리야가 가죽띠를 띠는 모습과 같은 외형을 보입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선지자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종말 때까지 더 이상의 선지자가 말라기 이후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는 레위기 11장 22-23절에 식물로 허락한 동물입니다. 꿀은 바위틈에 있는 야생 꿀을 의미합니다. 이는 요한의 모습이 구약의 선지자와 같이 삶이 검소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렇게 검소한 생활과 청빈한 삶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세상의 부귀를 먼저 구하는 것은 하나님 사람들의 삶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비록 우리가 요한처럼 살 필요는 없지만 항상 자신의 삶에서 절제와 겸손과 겸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화려한 삶을 구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나 자신의 삶과 목표는 어떠한지 생각해 봅시다. (세례요한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으로 반드시 엣세네파와 쿰란 공동체에 대해 언급해야 하나 이는 매우 복잡하고 신학적인 문제이므로 생략합니다. 그렇지만, 좀 더 깊은 성경 연구를 위해서는 쿰란 공동체와 엣세네파의 활동에 대한 학습을 권합니다.)

7절: 신발끈을 풀 자격이 없습니다. 이는 요한의 겸손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위치와 신분을 알고 순종했습니다. 보통 유대 지방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아서 샌들을 신고 다니다 다른 사람 집에 방문하면 통상 그 집의 종이 손님이나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줍니다. 신발끈을 풀 자격이 없다는 의미는 종보다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시에 세례요한의 인기는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지역에서 상류, 중류층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나왔습니다. 요샛말로 표현하면 세계적인 부흥사나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자신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직분을 알고 그 위치에서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아니면 교계에서 자신의 유명도에 얼마나 연연합니까? 나의 모습에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고 존경해 주기를 바라지 아니합니까? 이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고 우린 단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8절: 성령으로 세례를 줍니다. 이는 예수의 사역 당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어 병고 침의 기적을 행하게 하고, 사도행전의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의 고백으로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정결 예식을 갖추면서 성령 충만의 임재를 기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각자 기도에서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요사이 성령 충만이란 표현이 너무 가볍게 사용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 사고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치 신비주의자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함을 위해 어떻게 생활하고 성령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9절: 예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클로스(Ochlos)계층을 대표하는 나사렛에서 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외모나 출신 등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지 아니했고 말씀과 영으로 예수님을 주되심을 판단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의 인물됨을 판단할 때 세상 사람의 기준처럼 그 사람의 외모, 자산, 사회적 위치, 학력으로 판단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판단합니까?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면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놓인 자이고 영의 눈으로 판단하면 영에 놓인 자입니다. 나의 사람 판단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거지 나사로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외면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사람을 교회에서는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죄가 없지만 우리 인간과 동일시하고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서 멀리하시는 분이 아닌 우리 아픔의 현장에 같이 계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세례받으신 이유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그분의 사랑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10절: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 하늘이 열리는 모습을 마가의 저자는 갈라진다(헬라어: 스키조메두스: 옷처럼 찢김을 의미)라고 하였습니다.마태와 누가의 저자는 이 장면에서 하늘이 열린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메시아의 임재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마가의 저자는 하늘 간섭의 긴박감을 생생한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란 창세기 8장에 나타난 비둘기처럼 노아의 홍수시대처럼 세상이 멸하고 새로운 시대를 상징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시대를 폐하고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상징하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마치 노아의 홍수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나타내는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11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란 표현은 시편 2장 7절에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낳았다.”란 표현과 이사야 42장 1절의 “내가 택한 사람,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시편 2장은 다윗 왕의 취임을 축하하는 표현으로 메시아를 나타내고 이사야 42장 역시 종말의 메시아를 표현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을 하나님께서 선언해주시고 인정해주시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단순히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이 아닌 종말의 메시아를 선언하는 매우 거룩한 표현입니다. “사랑하는”이란 헬라어는 우리가 아는 아가페에서 파생된 형용사 아카페토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면서 유일(Only)한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준비되시고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하려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정체성을 얻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가 많은 어려움에 넘어지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역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체성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사역을 시작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역자를 선택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바로 이 점입니다. 과연 사역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체성을 확실하게 받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일을 할 때 내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분이 나에게 하시는 음성을 듣고 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직분과 그릇을 나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12절: “광야로 내보내셨다.” 마태, 누가의 기자는 이 모습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가셨다.”라고 10절처럼 완곡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내보내셨다(헬라어: 엑발레이) 단어는 마가복음 1장 34절에 “귀신을 내쫓으셨다.”에 사용된 동사와 같습니다. 이는 강제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사건의 순차적 발생(sequential occurance in time)을 의미합니다. 어느 사건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건이 그 사건에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복음 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면(예수를 주로 영접하면)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험(어려움)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는 영적 성장의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요사이 우리는 이런 영적 어려움을 피하거나 심지어 예수를 믿으면 어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그릇된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올 때 주님을 의지하면서, 또한 이것이 주님의 자녀로 능히 감당할 일임을 알고 피하지 말고 기쁨으로 이겨나가야겠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어서 우리에게 시험이 오면 우리가 예수를 올바로 믿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13절: 사십일이란 표현은 유대인의 숫자 개념으로 상당기간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사십일 동안 시내 산에서 있었고 (출 24:18) 열왕기상에선 엘리야가 천사가 준 음식을 먹고 사십일을 걸어 호렙산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왕상 19:8). 예수께서 꼭 사십일이 아닌 상당기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을 표현합니다. 사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말로 적대자 개념이고 또 하나는 중상자 또는 이간 자 개념인 악마를 의미하는 개념(헬라어:디아볼로스)입니다. 마가복음 8장 33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명하실 때는 사탄을 하나님의 의도에 반대한다는 적대자 개념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삶을 살면 우리는 사탄의 종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일에 이간질을 하면 역시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특히 우리의 세 치 혀로 사람들의 관계를 이간질하면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이유로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들짐승과 같이 계셨다는 표현은 종말의 모습을 나타낸 호세아 2장 18절과 이사야 11장 6-9절의 종말론적 세상의 도래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탄의 시험 후 천사의 시중을 나타내는 것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고난의 시험이 오면 이를 성령의 도움으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겠습니다.

14절: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영적 훈련을 하시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표현은 사건의 발생 후를 나타내는 표현보다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됨을 의미합니다. (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경 외 유대 역사서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일을 할 때 그분의 듯보다 우리의 의지나 요구가 먼저인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의 일이나 개인적인 사적인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1절의 그리스도 복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1절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승된 예수의 이야기(신학적인 전문 용어로 로기아나 Q자료)를 나타내는 것이고 14절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가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매우 깊은 의미가 있기에 여기에서 간단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천국의 개념이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말한 복음은 좀 다른 의미입니다만 다 같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복음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 예수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화목제가 되셨다는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성경 공부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는 유앙겔리온으로 단지 복 된 소식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서에도 같은 낱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낱말만 빌렸지만 그 단어 밑에 감추신 의미는 매우 중요하고 신비합니다. 예수와 바울이 말한 신비의 개념은 복음이란 단어 속에 (이 복음이란 단어는 기쁜 소식을 말하는 일반단어입니다.) 감추신 의미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사랑이란 단어는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젊은 연인이나 부모와 자식 간, 친구 간, 여러 관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나 그 의미는 각기 다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단어는 복된 소식을 말하는 유앙겔리온이란 헬라어입니다. 그렇지만, 그 복된 소식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기는 쉽지가 아니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복음이 무슨 연관을 하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신자나 사역자들도 바울이 말한 복음과 예수가 말한 복음의 차이점과 같은 점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15절: 여기서 예수는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 The Kingdom of God is coming)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 (Entering the Kingdom of God)보다는 참여한다는(Participating the works for the Kingdom of God)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땅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천국을 이루고자 모인 성도의 무리가 바로 교회(에클레시아)이고(이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무리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이뤄지는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이 어려운 의미이지만 우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전제 조건은 회개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 없이 하나님의 왕국건설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란 단어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이란 단어입니다. 이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그 고통으로부터 마음의 변화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라는 그 자체로부터 마음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마음으로 죄를 생각하면 그것이 죄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율법의 죄는 행동의 결과성을 나타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고 (이것이 율법에서 회개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죄 행동의 결과에 관계없이 죄 자체에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으로는 이러한 높은 주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주의가 말하는 죄와 주님께서 말하는 죄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윤리의식으로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래서 성도 각자는 공동체에서 누가 잘못했다고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16,17절: 예수께서 그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 당시에 갈리리 바다에는 약 330척의 배가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활동 지역) 육류를 잘 먹지 않고 물고기를 주요 음식으로 먹습니다. 후에 5,000명에게 음식을 주실 때 그들이 가져온 음식은 빵과 물고기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를 실 때 제자들은 자기 삶에서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삶에서 온 힘을 다하지 못하는 모습은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이 교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가정주부가 교회 봉사에 바쁘다는 핑계로 학교 공부나 가정일을 돌보지 아니하는 모습은 성경 적이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러하기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삶에서 치열성과 순수성을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모순되게 보이지만 (삶에서 치열하면 현실성을 갖게 되고, 순수성을 강조하면 삶에서 방관자가 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에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를 직접 선택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 직접 개입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일꾼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우린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을 위해 이렇게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함을 느낍니까? 신앙생활에서 이런 기쁨을 못 느끼면서 생활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를 따라오라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명령하는 표현입니다. 즉 제자 도를 의미합니다. 어부(제자)가 되게 하겠다에서 하겠더란 단어는 헬라어로 게네스다이(genesdai)란 단어입니다. 이는 긴 과정을 말합니다.
즉 제자의 과정이 짧지 아니함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제자들을 삼 년간 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일꾼이 되겠다고 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까? 쉽게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불평하지 아니했습니까? 성경에서는 제자의 삶이 절대 짧지 않고 쉽지 않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삶은 긴 성숙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고통 없는 제자 도를 말하는 많은 교회와 책자들의 홍수에서 우린 참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형통된다는 사탕발림의 거짓 복음과 우리의 요구만 강요하는 기도의 결과를 언제나 들어주신다는 거짓 복음에서 우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필요하고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18,19,20절: 예수의 부름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마가의 저자는 유디스(euthis)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즉시(곧: at once)란 시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즉시란 단어가 30번이나 나옵니다. 18 절만 읽으면 예수의 제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즉시 따르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갈릴리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시몬 베드로 장모의 집에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누가 4:38-39).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런 상황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그 결과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요구에 빠른 결단이 올바른 제자의 모습임을 강조하고자 그랬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기 전 예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또한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는 과정에 부르심에 대해 곧장 응답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대해 응답의 결과에 대해서 앞뒤를 챙기고 계산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바쁜 개인 삶 중에서 말씀을 깊이 읽고 기도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주님께서 그 뜻의 역사에 동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요구하면 즉시 순종해야겠습니다. 현명하고 깊은 생각으로 말씀으로 깨닫지만 그 깨달은 일은 행동으로 즉시 나타나야겠습니다.
혹시 말씀을 읽다가, 혹 기도 중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그 일을 아직 미루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속히 이뤄지고자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일꾼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선 이런 집안은 아주 극소수였습니다. 실패한 환경의 사람들이 아니라 좋은 환경의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를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제자는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당시의 유대 관습에서 야고보와 요한처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직업을 포기하는 일은 불효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스승(랍비)들은 그들의 제자들을 결코 이런 방식으로 부르지 아니했고 가르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런 방법은 독특했습니다. 당시의 문화와 많이 대치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당시 스승들은 스승의 일이나 가르침의 의도에 대해서 제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 스스로 결단하게 했지만 예수는 대화가 아닌 복종으로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아모스 선지자가 아모스 7장 14-15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는 선지자의 아들도, 선지자도 아닌 뽕나무 배양 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지자가 된 것처럼 어떠한 환경과 여건의 고려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이 제자 도의 기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에 결단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자는 어떠한 말이나 주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그 삶에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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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마가복음 1장 21절- 28절

전 주에 이어 계속해서 마가복음에 대한 말씀분석과 적용에 대한 훈련이 계속되겠습니다. 본 교재를 모아서 개인 성경연구 교재나 큐티 교재로 사용하면 말씀에 대한 옳바른 지식과 지혜를 얻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말씀 연구 시작 전에 성경에 대한 간단한 신학지식을 배우겠습니다.
신학지식은 그 자체에 은혜가 있기 보다는, 더 깊은 성경 연구에 매우 필요한 도구이기에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전 시간에는 공관복음과 마가복음이 다른 공관 복음보다 먼저 작성된 이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공관복음은 각 저자와 독자가 다르기 때문에 각 복음서 자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유대의 여러 종파에 대하여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알리기 위해 주후 75년경 작성 되었고 마가 복음의 경우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잘 알리기 위해 주후 70년경에 작성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이방인에게 예수의 행적을 좀 더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80년경에 작성 되었습니다.

전 시간에 배운 것 처럼 마가의 자료를 마태나 누가의 복음서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면 지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의 흔적은 20세기초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주후 125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 복음의 몇 구절이 기록된 파피루스 조각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완전한 형태의 성경 사본은 약 주후 400년경에 발견된 바티칸 사본과 시나이 사본입니다. 바티칸 성당의 박물관에 보관 되어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이라고 하고, 또 한권은 시나이산의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 되어 시나이 사본 (CODEX SINAITICUS) 이라고 합니다.

1세기나 2세기에 작성된 성경이 현재에 발견되지 못한 이유는, 당시의 로마 정부의 탄압과 출판시설의 낙후때문에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승천 후에는 예수의 제자가 살아 있기에 성경이 필요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전파해 준 초대 사도들이 순교등으로 사라지자 그들의 말씀 보존이 필요해서 신약이 작성하기 시작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말씀등이 구전이 되었고 전승된 말씀을 각 공동체에서 모아서 복음으로 작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전승된 말씀을 좀 더 세분화하여 처음의 구전경우엔 예수의 말씀 형태로 전승된 예수의 어록 형태의 교훈 부분 (로기아) 과 기적의 이야기 등이라고 가정했습니다. 이런 구전되고, 또한 사도에게 들은 각 부분의 말씀을 처음에 마가가 수집하여 마가복음을 만들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자료와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와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사용된 새로운 전승자료 Q ( 독일어로 자료를 의미하는 QUELLE 의 약자), 그리고 마태와 누가의 고유자료 M (마태를 의미하는 M) 과 L ( 누가를 의미하는 L) 자료를 사용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작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문서 작성 전 구전된 예수의 말씀자료+기적 자료+사도들의 증언에서

마태복음=마가복음자료+마태,누가의 공통자료(Q)+마태고유자료(M)
마가복음
누가복음=마가복음자료+마태,누가의 공통자료(Q)+누가고유자료(L)

형태로 작성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공관 복음서 마다 약간씩 표현 형태나 사건의 순서나 예수의 말씀이 정확하게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표현속의 내용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의 일관성은 모든 복음이 같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기 전 이런 기초신학을 설명한 이유는 깊이 있는 변증론적 성경공부가 앞으로 이 시대에 필요 할 것 이고, 또한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 처럼 많은 비기독교 서적들이 지적하기에, 이에 대한 일반 신도들이 기본적으로 알 필요가 있는 확실한 사실을 설명하기위해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

마가복음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위해 노트를 준비하시고 말씀의 내용과 이해(석의)를 작성하시고 직접 생활에 적용 하시길 바랍니다.
대화식 성경 공부 (INTERACTIVE BIBLE STUDY)를 위해 기도하는 자세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왜 이 구절을 본문의 저자가 작성였고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하는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을 사용해서 읽으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작성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손과 입으로 전승 되었기에 각 시대의 처한 상황과 시대적 제한성(인식의 범위, 지적 수준, 정치 경제 종교성의 제한성등)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깊이 있는 성경 연구가 핗요 합니다. 또한 현대 시대에서는 이단이나 많은 반기독교 사상에 대한 옳바른 변증적 믿음관을 확립하기에 이런 성경 공부가 더욱 필요한 때 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 많은 성경 공부 서적이 출판되고 있지만 이런 목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서적이 없기에 부득이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교재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연구에 시작전 기본적인 몇 가지 질문들.(다음시간까지 연구해서 노트에 작성해 오시길 바랍니다.)

1. 마가 복음에서 저자는 예수의 첫 사역을 가버나움으로 정하였는가?
2. 마태나 누가의 경우는 첫 사역지로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을 선택하였고, 요한은 가나를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각 복음서에서 첫 사역지 선정이 각기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3. 마가복음 1장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오늘날 여러분의 각자 처한 환경에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해 보십시오.

21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제자들의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을에 오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새날은, 현재 우리가 아침을 매일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날에 해가지는 날이 새날의 시작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오시자 제자들의 집에 먼저 가시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회당에 들어 갔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매년 한 번씩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각 동네마다 회당(시나고그)이 있어 매 안식일 마다 그 곳에 모여 기도와, 랍비로 부터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회당엔 회당장이 있어 랍비에게 구약이 적힌 두루마기 성경을 전달하고 랍비는 말씀을 읽고 성경해석을 일반 대중에게 해주었습니다. 요사이 교회의 목회자와 비슷한 역활이 랍비(성경에선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로 나타남)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쳤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당시에 유대인에게 바로 랍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사역전에 말씀에 대해 깊이 연구하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말씀에 대한 당신의 깊은 연구가 계셨습니다. 21절에서 우린 예수로 부터 두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분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대한 사랑과 두번째는 성경에 대한 당신의 깊은 사랑입니다.
우린 얼마나 예배와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22절: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알수가 없읍니다만, 다른 복음서에서 비슷한 상황을 연구하여 어떤 말씀형태 였는지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4장 17절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17절부터 22절까지 읽어보고 어떠한 내용인지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읽은 이사야서 부분은 종말에 메시야의 보내심에 대한 약속과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께서 직접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나타내고 있지는 않지만 누가의 상황과 비추어 볼 때 이런 유의 말씀을 하셨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과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종말의 새로운 언약의 성취입니다. 아마 이 말은 들은 유대인들은 경악을 했을 것 입니다. 랍비로만 보이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란 청년이 구약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소식입니까? 유대인이 목 놓아 기다리던 메시야가 드디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엔 다른 랍비와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는 사람이 만든 권위가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권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이 강팍해도 예수의 말씀에 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글성경과 영어 성경에선 놀랐다란 동사에 감동을 의미하는 놀랐다(AMAZE)를 사용했는데 헬라어의 원 뜻은 기분 나쁜 놀라움을 의미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에 권위를 느끼면서도 그 마음엔 감사와 감격의 놀라움이 아닌 의심과 나쁜 감정의 놀라움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엔 어떤 감정을 품고 있습니까? 감사와 회개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한낱 나와 무관한 이야기이거나 피곤하고 듣기 싫은 이야기 입니까? 당시의 유대인이나 지금의 나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질 수 있고 (비참하지만 영원히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후에 우리가 말씀을 배워 알 수 있지만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가장 많은 많은 기적을 보이셨고 말씀을 전하셨지만 마태복음 11장 23절에서 예수께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직접 저주 하셨습니다. (마11:23,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 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도 회당안에 있었지만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아니한 이유로 구원을 얻지 못한것 처럼, 우리가 교회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과 기적을 많이 경험해도,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우리 주로 영접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유대인들과 같이 지옥에 떨어 질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 개인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23절: 악한 귀신 들린 (엔 푸뉴마 아카타르토스) 에서 들린이란 헬라어는 소유를 의미하는 엔이란 전치사입니다. 이는 어느 세력의 영향아래 놓여 있음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성령에 사로잡힌 이란 헬라어 또한 엔 푸뉴마( 푸뉴마는 영을 의미합니다.) 입니다. 악한 귀신들린의 어구에서 단지 깨끗하지 않다란 의미의 아카타르토스란 형용사만 없으면 성령에 사로잡힌 이란 뜻이 됩니다. 우리가 영에 놓여 있지만 깨끗하지 아니한 영아래 놓여 있으면 악한 귀신에 들린 상태이고 주의 영에 놓여 있으면 성령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과 성령에 들린 사람의 차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어느 영 (깨끗한 영, 더러운 영)아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때 이런 영들이(성령과 악령) 우리에게 임재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은 현상은 단지 심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내에서도) 영의 현상을 단순하게 심리적 현상의 일부분으로 해석하여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 반대로 영적 현상을 너무 확대 해석하여 병리적, 심리적 현상마저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김기동 목사의 귀신론). 이런 극단적인 두 해석에 대해 조심 스럽게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회당에 그 귀신 들린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신들린 자는 회당에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귀신 들린자는 예수의 말씀 선포 전에는 정상의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구원의 빛으로 나타나자 사탄은 그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태 5장 15절 말씀처럼 등불이 집안에 있어 어둠을 밝히는 것 처럼 진리앞에서는 어둠이 그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능력의 말씀은 이렇게 숨어 있는 악을 나타나게 합니다.오늘날 교회에서 겉 모습은 귀신 들린 그 유대인처럼 정상이지만, 중심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13장 30절 말씀처럼 추수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내버려 두다가 추수때 먼저 가라지를 뽑아서 불태워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교회에 왔다고, 교회에 있다고,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 뜻을 행하는 (단지 듣는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의 형제고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사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내 안에 있는 악한 죄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러므로 회개에 이르게 하여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로 예수의 제자도(행동)를 따르면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합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24절: 나사렛 사람 예수여! 사탄의 이런 표현은 당시 유대인의 언어표현에서 볼 때 매우 특이한 외침입니다. 출신지방을 말하면서 사람 이름을 호명할 경우는 그 사람을 내가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누구보다 이렇게 예수를 잘 알았습니다. 회당내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가 진짜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오직 그 회당에선 유일하게 사탄만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예수께 자기 자신을 복수로 표현 했습니다. (이곳에서 사탄은 헬라어에서 우리를 의미하는 대명사 헤민의 변형을 사용 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 5장 9절에서 나오는 귀신의 수가 많이 있음을 의미하는 귀신의 복수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아니고 귀신에 사로 잡힌 사람과의 하나임을 강조하는 복수 형태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자기의 세력에 있는 사람을 자신과 일치시키면서 집요하게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없앤다란 단어인 헬라어 아폴루미는 완전하게 제거한다란 의미입니다.사탄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사탄을 멸함으로 그의 지배에 놓여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 영악한 사탄은 마치 예수께서 자기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인간도 같이 망하게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복수)를 의미하는 대명사 헤마스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끝내 사탄은 자신을 나타내는 단수의 대명사를 사용하면서 예수의 정체성을 같이 밝힙니다. 거룩한 분( 헬라어:오 하기오스, 영어표현: The Holy One of God)은 시편 89장 18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 The Holy One of Israel)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어표현에서 정관사 the를 시편과 마가복음에서 같이 사용하여 대상을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정리하면 사탄은 자기의 세력에 놓은 사람을 두고 두 인격을 나타내는 대명사를 사용하면서 예수께 자기밑에 있는 사람도 같이 죽는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끝내는 자신과 주님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합니다.
마가복음의 이 간단한 기사에서도 사탄이 얼마나 집요하고 영악한지 잘 알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사탄은 이렇게 우리를 주님의 관계안에서 끊기위해 얼마나 악한 노력을 하는지 상상할수 있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끊임없는 영적 전투이므로 주님께(성령님) 우리 삶을 의탁하고 순종하는 삶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25절: 헬라어 피무란 단어는 입 닥쳐란 매우 강력한 명령입니다.예수께서는 사탄에게 말한게 아니라 꾸짖으면서 (헬라어:에피티마오: 이는 심하게 꾸짖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
입 닫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죄에 놓인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이렇게 강력하게 원하십니다.
혹시 자신의 습관된 죄성이나 반복되는 악한 행동, 또는 계속해서 죄의 유혹에 빠질 경우 예수의 그 능력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유혹하는 악한 사탄을 꾸짖으십시오. 여러분은 놀라운 영적 승리의 체험을 할 것입니다.

26절: 사탄은 예수의 말씀에 복종하여 나갔지만 자신의 수중에 놓인 사람에게 잠시나마 육체적 고통을 주고 나갔습니다. 우리의 죄성을 단절하기 위해서도 얼마만큼의 우리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끝내 사탄은 나가고 맙니다. 각자의 삶에서 이런 죄성의 단절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계시면 이런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만큼의 어려움을 줄 수 있지만 끝내 승리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어둠의 권세의 세력에게 무섭게 꾸짖으면서 우리와 가정과 교회를 지키시는 우리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아멘.
(이러한 축사현상(마귀쫓는 현상)은 지금도 예수의 시대와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27절: 예수께서는 말씀과 기적의 능력을 같이 보이셨습니다.
악한 유대인들도 예수의 축사의 능력에 놀라움을 보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서 어느 한 사람이 귀신이 들려서 소란을 피웁니다. 새로운 말씀으로 권위를 보이신 예수께서 단호하게 꾸짖으면서 귀신을 내 몰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상과 능력에 기이하게 여기면서 서로에게 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이천년전의 한 유대 지방에서 생긴 일이 아닌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사탄의 악한 세력의 힘에 놓여, 귀신들린 자같이 절망과 저주의 삶에 있을 때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해방되었고 주님께 영광드리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이런 영적 해방자들의 모임입니다.
부언 설명을 하면 당시 유대나 헬라의 풍습에도 귀신을 몰()아내는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은 주문과 물리적 행위를 요하는 주술행위나 에니미즘(정령주의)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의 행위는 그들의 전통방법과 전혀 다른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런 축사행위는 다른 어떠한 문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현상입니다. 그렇기에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예언자에게 예언하신 새로운 세계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축사행위를 보고 샤머니즘에 볼 수 있는 주술 행위라고 하지만 마가복음 1장 3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병들린 환자와 마귀에 놓인 환자를 구분하여 치료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공부할 29절 이하의 베드로 장모의 치료에서는 축사 행위가 아닌 병 고침의 은혜를 배풀어 주셨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칼 융과 같은 심리학자는 이런 축사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뇌 생리학 전문가나 심리학 전문가들이 현대의 의료 기구 ( 핵 자기 공명장치등 첨단 기재)를 사용하여 정신병과 영적문제 (축사문제)를 연구 하고 있지만, 현재 까지 임상적 해석은 정신병적인 현상과 영적 현상에 대한 차이가 있음을 과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반인들이 이런 축사 현상을 비이성적 현상으로 생각하지만 전문가 그룹에선 오히려 반대로 심각하게 고려 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주후 340년까지 교회내에 악귀 쫓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제도와 신학 사상의 변화로 그 이후 이 제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오순절파의 교회에서 이런 제도의 복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현대 사회에서 어떤 행동이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심리학과 귀신들림의 현상에 대한 차이에 대한 쉬운 이해의 책자중 몇 권을 추천합니다.
1. 귀신들림과 상담. 로저 버드포 저, 두란노
2. “DEMON POSSESSION OR PSYCHOPATHOLOGY, A CLINICAL DIFFERENTIATION,” 1976,4, PP. 286-290.
3. J. RAMSEY MICHAELS, “JESUS AND UNCLEAN SPIRITS,” IN JOHN WARWICK MONTGOMERY ED., DEMON POSSESSION, BETHANY FELLOWSHIP, 1976
4.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2D, ED DSM-3
한글로 번역된 책자가 많지 않습니다.
첫번째 책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약간의 관심을 요구 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책은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지만 임상자료와 분석에서 매우 과학적 자료이므로 추천 합니다.
네번째 자료는 정신과 전문가들의 메뉴얼 입니다.

28절: 곧 소문이 두루 퍼졌다란 어구에서 마가복음의 언어적 특성인 곧(헬라어:에투스)이란 부사를 사용했습니다. 소문이란 아코에란 헬라어는 뉴스를 의미하기도 하고, 퍼졌다란 동사는 헬라어로 엑케르코마이란 단어로 인위적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간다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기적과 말씀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갈릴리 지역의 많은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달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구원의 말씀이 아닌, 그들이 본 신기한 행동과 그들의 사고에서 판단한 말씀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내용보다 신비한 기적과 개인 경험을 더 강조하면 많은 문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깊은 성경의 묵상과 그 묵상에서 깨달은 영성있는 기도가 우리를 주님과의 깊은 관계에 놓이게 합니다.

지난 주의 자신의 영성훈련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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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몇가지 흥미있는 역사적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6장에서 7명의 선택자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3절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7명을 뽑는데 6명은 헬라파유대인(디아스포라)이고 나머지 한명은 안디옥 사람으로 이방인인 니콜라스(니골라)이었다.

이 니골라는 다시, 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의 이단(heresis)으로 니골라당(Nicolaitanism)이 언급되는데, 이 니골라당의 교주로 나온다.
초기 교회 지도자 이레니우스나 히포류투스는 그들의 저서 이단 반박론(1,26,3) 과 이단론(7:24)에서 이 사실을 증명한다.

헐트그렌의 초기 기독교 이단이란 책자 (The earliest christian heretics by Arland Hultgren)에서도 당시의 자료와 상황에서 니골라가 계시록과 벧후3장(직접 이름이 언급되지 아니 했지만)등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많은 해를 준 사람(이단교주)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새로운 교리를 만들고 사람등을 지배(니골라는 사람을 정복한다란 희랍어 니칸과 라오스에서 나온 의미다(발람역시 히브리어로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면서 많은 사람을 잘못 인도 하였다.

니골라는 분명히 성령에 충만하고 칭찬받는 자라고 사도 행전이 증명했다.
그렇지만 그가 마지막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강조하면서,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교인을 지배하면서 자신의 말이 진짜 복음인냥 오도하였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지역에서 빌립의 말씀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세례를 받은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다.

그는 그 후 베드로에게 성령을 돈주고 사겠다고 하다가 경고를 받았다.
행전에서는 더 이상의 그의 이야기가 없는데 초대 교부들의 글에서 그의 행적이 계속 된다. 그가 바로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공동체에 큰 해를 준 초기 이단인 시몬 메그너스 (마술가 시몬 :Simon Magnus)이었다.

그는 니골라당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고 (니골라당은 윤리적인 면에서 문제가 많았지만 시몬은 후에 자신의 아내 창녀 헬레나를 경배하게 하였고 마침내 자기가 종말에 오는 메시아라고 했다.

그는 특히 "기적과 이사를 이용하여 성령의 능력의 열매"라고 강조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옥시켰다.
그의 학파가 생겨 후에 영지주의까지 연관성을 갖게 된다.(The earliest christian heretics 에서)
이상을 살펴보면 현실적인 타협과 안주에서 복음과 타협하기 위해 생성된 니골라당,
성령의 능력이라는 기적에 더 중점을 둔, 그리고 사람만 따르는 행위에서, 온 시몬니즘(5세기까지 존재함) ...

복음은 그리스도의 하늘의 왕국을 이 땅에 도래시키는 그의 고난을 따르는 제자도가 바로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아직도 영성이란 단어에 옳바로 정의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영성은 심리적 방법을 이용하여 웰빙시대의 자아 발견이나 관계의 효율성 훈련도 아니고 (진보측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 기적과 주관적 체험만 강조하여 말씀에 대한 왜곡된 사실도 모르고 기복 신앙과 교회 성장에만 치중하는 (보수적 교회에서 언급하는 ) 것이 아니다.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바로 읽고 해독하여 배우고" 배운 바를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훈련이다.

옳바른 영성은 우리의 인격과 가치를 그 분의 모습으로 바꾼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자기를 비우면서 예수가 말한 팔복을 그리워 하면서 그의 나라와 뜻을 이땅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실현시키는 훈련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고 제자도이다.

인간의 방법이나 뜻도 아니고 욕심에서 나온 천박한 자본주의적 속성으로 마음엔 맘모니즘을 그리면서 성령과 예수란 탈을 쓰고 자기 욕심을 구하는 저 초기의 타락한 "니골라 와 시몬"의 발자취가 아니다.

나를 버리고 이 땅에서 보혜사의 도움으로 주님만을 내 맘속에 간직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종말론적인 생각을 가지면서 하루 하루에 만족하는 에수의 제자의 삶이 바로 영성이다.

농담이나 그럴듯한 성경 이야기.. 말씀 선포에서 (케리그마) 신학부재의 설교와 카타르시스적인 해학으로 인격의 성령을 격하시키는 설교자들...성령의 역사함이 없는 성령의 임재함을 모르면서 제 학문과 접합점을 찾아서 지적인것 처럼 현학적인 냄새만 나는 인본주의적 설교...
본 회퍼의 말대로 우린 지금 너무 값싼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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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나에게 무엇인가?

기도는 나의 연약함을 확인하고 그분께 드리는 간절한 바람이다.
기도는 자신의 무능력을 주께 고백하는 자리이다.
능력의 기도란 이렇게 나의 무능력을 깨닫고 오직 주님만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자리이다.
기도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대화의 자리이다.
그분의 원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원하신 거룩한 뜻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고백의 자리이다.
다른 생각이나 내 인간적 복안이 얼마나 무가치이고 무능력한가를 고백하는 자리이다.
온전하게 주님에게 도움을 고백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이다.
기도에서 얻은 열매는 주님과 친밀함을 보여주고 나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기도는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는 자리이고 그 말씀이 능력을 발하는 자리이다.
말씀의 기도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칼이 된다.
기도의 열매가 풍성할수록 기도의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간절한가를 배운다.
세상의 유혹이나 파도에 대해 주님과 대화로 보호를 받고 물리칠 수 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기도의 열매로 가장 귀한 시간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열매 없는 기도는 거짓 기도이고 나의 단순한 바람일 뿐 주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아니다.
주님과 대화에는 능력이 있고 주의 뜻을 알 수 있다.
기도의 비밀이 말씀에 있고 말씀의 깨달음이 기도에 있다.
기도는 살아계신 여호와께 고백하는 자리이고 그분 영의 교통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거룩하고 온전하게, 정성으로 기도해야 한다.
감정의 호소나, 종교적 열심히나, 신비를 경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 주님과의 교통함의 자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의 음성을 듣고 나의 바람과 결단을 주께 아뢰는 거룩한 산 제사의 자리이다.
시간과 언어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닌 진정과 영으로 기도해야 한다.
진정과 영의 기도는 제사를 드리는 자가 자신의 재물의 진, 위를 아는 것 같이 자신이 알 수 있다.
기도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열매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중보의 기도로 발전한다.
이 중보의 기도가 주님께서 가장 어여쁘게 받으시는 그의 나라의 기도이다.
초신자에게 형식적인 중보기도보다 간절한 자신의 기도의 만남에서 열매를 얻어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체험한 후 진심으로 중보의 기도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절차이다.

영적인 공동체의 중보기도는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고 주님의 마음을 올바로 알수 있다. 그렇기에 영적 공동체는 자신의 영을 더욱 성숙시켜 주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면서 이 땅에 그의 나라가 온전하게 임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영적 공동체의 기도 힘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분리주의자나 자신의 울타리에서 하는 기도는 힘이 없거나 온전한 기도가 될 수가 없다.
이 땅의 영적 공동체는 나의 형제요 자매이다.
그리고 교통함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뤄지는 중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린 그분의 기도가 우리 기도의 온전하고 절대적 표준이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는 말씀이다.

영적 기도는 그분의 온전한 방법과 때에 절대 이뤄진다.
우리 기도의 부족한 부분과 깨닫지 못한, 온전하지 못한 부분은 “예수 이름으로” 그분 성령의 중보기도와 그분의 권위로 온전한 제사가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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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나눔에서 좀 더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기에 여러 지체와 나눈 댓글을 편집하여 같이 올립니다.

지체 1:

좋은 묵상 자료에 감사합니다.
항상 작은 자님의 글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전부는 읽지 못하였지만 올려주신 글 중에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복습(Review)부분에서 여호와(YHWH)로 표기된 부분은 야훼로 표기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 아직 잘 모르는 분을 위해서 올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야훼(YHWH;이것도 이스라엘 사람은 모음을 발음하지 않기에 정확한 발음인지 모르지만)를 부를 수 없어 대신 아도나이(Adonai;주) 또는 하셈 또는 엘로힘이라고 부르는데 "주 야훼"가 같이 병기된 부분에서는 아도나이 엘로힘이라고 부르라는 의미로 야훼의 자음에다 원래의 모음이 아닌 아도나이의 모음을 섞었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은 Jehovah (영어성경)을 그대로 번역하여 여호와라 하였습니다.
2. 마가복음을 선택한 내용중 공관복음임을 설명한 1번에 마태, 마가,누가 대신에 마태, 누가, 요한복음이라 오기가 되어 있네요.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작은자 :

현재의 영적 사역과 초대 기독교의 영적 사역이 매우 다름을 알수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성령 사역에 대하여 인식론적 한계에서 평가를 하기에
실제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지체들에게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에서의 성령 운동의 교훈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20 세기에 발생한 영적 운동의 문제점과 초대 교회의 성령 운동을 비교하여 글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특히 방언 현상에 대하여 1904년 웨일즈와 1965년 인도네시아 부흥과 ( 이 두 부흥은 여타 부흥 운동과 다른 매우 특이한 부흥 운동의 특성을 가졌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방언 운동을 일으킨 아주사 운동과 초대 기독교에서의 성령 운동을 비교하여 글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방언의 영적 현상에 대한 최근의 뇌 생리학의 연구 보고와 다른 종교에서의 방언 운동의 문제점을 기술할 예정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의 펜실베니아 의과 대학에서 오순절 종파의 성도들의 방언을 MRI로 연구 분석하여 발표하였는데 아주 흥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영적 현상이 실제적으로는 강압적 의식 활동에 의한 뇌에서 특정 부위의 혈류 변화와 연관이 있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는 많은 영적 현상이 실제적으로 개인의 의식으로 인한 잠시 일어난 뇌의 이상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인위적 영적 현상에 대하여서는 오래전에 많은 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많이 밝혀졌고 로이드 죤스 목사는 그의 의학적 지식에서
실제 영적 현상과 이런 유사 영적 현상의 구분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 많은 지체님들은 이런 사실에 많은 정보가 없어 유사 영적 현상을 실제적 영적 현상으로 믿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의 오타에 대한 **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공관 복음 설명에서 오타를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와 야훼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잠시 나누겠습니다.
좀 전문적인 내용이지만 평이한 글로 작성하였기에 나눔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위 4개의 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단자 YHWH에 대하여 역사적 고찰을 나누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여호와로 표기되는 4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구성된 단자의 발음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역사적 기록에서 그 발음을 추론을 합니다.(구약에서 이 단문자(이 4개의 단문자를 tetragrammaton이라 합니다.)는 약 6800번 언급되고 있습니다.또한 고고학 자료로 기원전 9세기의 모압비석과 라기스 서신(Lachish 기원전 589)에서 이 4개의 단자 YHWH의 문자가 발굴되었고 애굽에서 발굴된 기원전 14세기의 음각이 된 문자에는 "유목민의 땅 야훼,(Yahwe)(혹은 야훼를 섬기는 유목민의 땅"이란 글이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유대 왕국을 전통으로 전승된 J 문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4개의 단자는 아담의 손자인 에노스에서(창세기 4:26)시작되었고, 이는 “에노스(Enosh)”란 단어가 사람을 의미하기에 계약 신학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뿐 아니라 온 인류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야훼라 칭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남 유다 왕국 의 전승된 구약의 전통으로 학자들은 생각하여 독일어 야훼 문자의 의 처음 문자인 J를 인용하여 남 유다에서 전승된 모세의 전통을 j문서,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엘/엘로힘의 첫 문자인 E를 가지고 그 지역에서 전승된 모세의 전통을E 문서라 하였습니다.(일부 학자들은 구약에서 요나단을 엘나단이라 표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인 엘과 야훼의 구분이 초대 전승에서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이 YHWH(야훼,여호와)는 몇몇 학자들의 생각에는구약에서 25회 사용된 야(Yah)파생된 야후 (이사야에서 “야후는 구원이시다.:고 표현 되었습니다) 혹은 요엘서에 표기된 요(요엘서에서 “요는 하나님이다”이다 표현 되었습니다.) 가 어원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실제로 “ 야(Yah)”는 고난에서 부르짖는 절규를 나타내는 의성어이기도 합니다.
실제 히브리어 성경은 의성법을 많이 사용하여 말씀을 표현합니다.
이사야 40장 1절의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나하므 나하므 아미)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된 찬가중 하나인 사사기의 드보라의 찬가에서는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린다.(다하로트 다하로트 아삐라브), 사사기 5:22b) 라고 펴현하면서 의성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학자들은 야훼, 여호와를 의미하는 4 단자 문자 YHWH는 고난에서 부르짖는 “야(Yah)”와 정형 동사의 미완료 표현의 형태인 (Hyh 형의 변형인 Hwh)가 결합된 단어가 갖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히브리어는 시제가 단순하여 미완료동작은 미래 시제로 표현하고 완료된 동작은 과거 시제로 표현합니다.(한국어와 시제가 유사)) 특히 동사의 어간은 단순형(칼)과 사역형(히필)이 있는데 단순형으로 해석하면 “스스로 있는 자”로 해석할 수 있고 혹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해석을 하고 사역형으로 번역을 하면 (많은 학자들은 사역형으로 번역을 합니다.)분사 형태로 “창조자 하나님”을 의미하여 “존재하는 모든것을 돌보시는 창조자”로 해석합니다.(근동 지역의 페니키아 비문에서도 이런 사역형의 형태로 신의 이름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느 학자들은 라스 샤므라 문헌에서 발굴된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 사람이름인 야움일루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소수 의견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계시의 하나님을 켄족과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 시내산은 미디안족의 예배 장소였고 모세 장인 이도로와 연관을 가지기에 이런 해석을 한 것 같습니다.

초대 기독교 문서에서는2 세기에 알렉산드아의 클레멘트가 4 문자를 야웨(Iaoue)라고 음역을 하였고 (그의 저서 Stromata에서 그는 "성스러운 4개의 단문자(tetragrammaton)의 발음을 ιαουε라 한다"고 작성하였습니다.)
4 세기에 싸이러스의 테오도레토스가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오경에서 야베(Iabe)로 발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3세기 것으로 알려진 애굽에서 발굴된 파피루스에 작성된 능력을 요구하는 주문에 야베란 단어로 발음됨이 알려졌습니다.
(초대 교부의 성경 해석에 대하여 고민하면, 속 사도 시대 이후로 순교자 져스틴 이 후 유대적 해석의 전통이 끊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를 읽으보면 얼마나 유대적인 유산에 초대 교부들이 부정적인지 잘 알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초대 기독교를 박해하고 영적 유산을 이해 못하는 유대인에게 비판적이었지만 그는 유대 전통에 매우 강한 자긍심과 예수의 가르침의 뿌리도 유대의 영적 전통에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교부들의 성경 해석을 읽을 때 이런 문제점을 의식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 성전 시대(예수 시대)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는 YHWH의 4 단자의 사용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생각하여 “나의 주”란 의미의 아도나이란 단어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에서 사용한 구약의 70인역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거주자를 위하여 번역되었는데 여기에서도 YHWH를 헬라어 키리오스(이 헬라어 키리오스는 아래 사람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를 부를 때 사용한 단어로 신약에서 대부분이 사용되고 원래 이 단어에는 신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혹은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를 사용하여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Schiffman이란 학자는 그의 저서” 제2 성전과 랍비 유대교의 이해”란 책(Understanding Second Temple and Rabbinic Judaism)에서 초대 기독교 당시에 사용된 70인역은 원래 히브리어 성경의 충실한 문자적 번역이 아닌 당시의 랍비 문서에서 발견된 구약 해석의 헬라적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원문의 불충실한 해석의 70인역을 대신하여 2세기 초에 유대인Aquila the Proselyte 와 Theodotion은 새로운 헬라어 번역의 구약을 작성하였습니다.(최근의 쿰란 문서의 연구에 의하면 쿰란 공동체도 당시의 히브리어의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가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유대의 제2 성전의 시대에 시작된 랍비 유대교는 그후 예루살렘의 파괴 후에 본격적인 랍비 시대를 시작하면서 마소라 사본을 완성하면서 4 단자 문자 YHWH의 발음을 아도나이의 모음과 연결하여 예호바(Yehovah: 후에 4 단자의 3 번째 단자 W는 현대 히브리어의 Vav로 바뀌었습니다.)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의 경전(타나크)에서4 문자 발음을 예호바와 유사하게 발음합니다.(우리의 여호와).(그들의 발음은 Yod-Heh-Vav-Heh : 고대에는 Ehyeh-Ashev-Ehyeh로 발음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참고 문헌: 유대인 성경 (The Jewish Study Bible; Tanakh Translation , Jewish Publication Society,Oxford Univ.( 구약 을 영어로 해독할 때 유대인이 사용하는 이 유대인 영어 성경을 사용하면 좀 더 자세하고 깊게 유대인의 정서에서 구약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을 "주의 행하심으로 주님께서 명백하여 지십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즉 역사안에서 그분의 계시의 행하심으로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합니다.

유대 전승에서 야훼/여호와의 의미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계시를 이루심으로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이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여호와란 발음이 1520년 대 칼라티노란 학자( Pietro Colonna Galatino)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원래는 마소라 학자들에 의하여 주창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빈 윌슨(Marvin Wilson)이란 학자가 작성한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Our Father Abraham: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Edermans,1988)” 란 책이 있는데 그는 그의 책에서 유대인은 신앙의 사고가 신학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YHWH의 발음을 그들은 아도나이의 모음과 연결하여 예호바라 발음하라고 주창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야훼란 발음은 고고학적 전승사에서학문적인 의미가 강하게 강조된 발음이고 여호와는 유대 전통의 교훈이 있는 발음입니다.
(좀 더 깊은 영적 의미로 전능자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는 의미를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이 엘샤다이란 단어는 근동 지역의 영적 경험을 나타내는 단어로 성전의 의미와 연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산 기도의 능력과 위험성…산의 하나님이란 뜻의 엘 샤다이여호와 이름과 같이 많이 고민해야 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지체 1:

샬롬.

야훼/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더욱 깊고 넓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내용 중
(이런 인위적 영적 현상에 대하여서는 오래전에 많은 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많이 밝혀졌고 로이드 죤스 목사는 그의 의학적 지식에서
실제 영적 현상과 이런 유사 영적 현상의 구분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 많은 지체님들은 이런 사실에 많은 정보가 없어 유사 영적 현상을 실제적 영적 현상으로 믿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적현상을 실제영적현상과 유사영적현상을 구분하였고 많은 부분이 개인의 뇌의 혈류에 대한 이상반응으로 설명하셨는데 실제영적현상에는 이러한 신체반응이 없는지요. 아니면 실제 영적 현상에는 어떤 반응이 있고 유사영적 반응은 어떠한 반응이 있다라고 규명된 의학적, 심리학적인 명확한 근거(guideline)와 이를 소개한 책자가 있는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영적현상이 나타난다면 신체적 반응이 있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저의 무지한 단견을 표한다면 영적현상을 학문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도전으로 이해한다면 괜찮지만 그 자체가 어떠한 절대적인 객관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3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저희가 저희의 관점에서 영적인 현상을 바라보기에) 옳고 그르다는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즉 영적 현상을 혼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육체의 반응을 검사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판단의 요소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작은 자님께 제가 너무 궁금하기에 묻는 것입니다. 작은 자님의 귀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작은자 :

귀한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혹 저의 작은 나눔에 주님의 영광에 누를 끼칠 내용이 있으면 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님의 질문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작성할 "초대 교회의 영적 운동과 현대 부흥의 운동과 영적 현상에 대한 의학적 연구"에서 좀 자세하게 밝힐 예정입니다.
단지 단순하게 작성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 이란 단어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이란 단어의 의미가 너무나 많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실제 영과 혼을 잘 구분하지 않고 "영혼"이란 한 단어로 육체와 구분하여 표현했습니다.
실제적 영과 혼의 구분의 표현이 신약에서 바울의 표현과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서 나오는데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5장23절)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히브리서 4장 12절)

이 부분을 가지고 확대 해석하여 영과 혼을 구분하여 각 기능을 설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예를 들면 지방 교회의 창시자 중국인 워치만 리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가 마담 귀용과 제시 펜 루이스, 형제단 교회의 창시자중 한 명인 존 다비의 책자들을 읽으면서 그의 신학적 사고를 완성해 나가면서 혼과 영의 기능을 구별하여 강조한 분입니다.
(이런 부분을 가지고 그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교단도 있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런 이단 주장은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단 그의 제자 위트리스 리는 심각한 교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영과 혼의 구분은 유대적 사고가 아닌 이방적 사고였습니다.
헬라 철학의 해석으로 랍비 유대교 시절(제 2 성전) 이런 사고가 유대교에 들어와 새로운 성경의 해석관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해석관은 더욱 발전하여 후에 영지 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 시절에 유대교의 성경 해석 전통을 가지고
기독교도 지금과 달리 그리 교리 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도들에게서 전승된 전통을 가지고 각 지역 교회에서 그들의 해석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해석의 많은 다른 부분들이 공동체의 다양성을 가지고 이해가 되었지만
점점 그 다양성이 확대되어 부작용을 가져오고 그리고 그 확대된 해석이 원래의 사도들의 전승의 전통의 해석을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단의 시작이었습니다.
(원래 이단(heresy)이란 단어가 선택(choice)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에
전통을 벗어난 그들의 독자적인 해석을 가지고 따르는 무리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에 대한 구분은 사도들의 전승된 말씀을 신앙의 뿌리로 삼고 다양한 해석의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 같은 신앙의 뿌리로 보았지만
그 해석이 본래의 전승돤 말씀(케리그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관을 가질 때 이단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지금의 이단 구별과 좀 다릅니다.
현재의 이단 구별은 거의 교리적 중심으로 이는 교부들의 시대에서 시작되어
현재 신교나 구교에서는 이런 교부들의 이단 해석 방식으로 즉 그들의 자신들의 전통적 교리적 해석으로 이단을 구별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영혼의 구별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해석할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는 많은 학자들이 당시의 외경과 헬라 철학의 연구에서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영과 혼의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좀 조심해야 합니다.
그 기능을 강조하면 사도들의 전통을 벗어나 왜곡된 새로은 해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영과 혼의 기능을 어느 정도 구분한다 하여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는 영적 현상을 "특이한 신체적 변화"에 국한 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영적 현상을 여호와라는 단어의 뜻과 같이
주께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약속의 실현 과정에서 세상에 개입하시는 부분을 영적 현상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는 육과 영혼을 전부 다스리면서 그분의 뜻을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이한 현상을 단지 영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고 이는 오히려 이방인들의 사고관입니다.
(그렇기에 기적의 해석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해석의 차이가 너무 달랐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영적 혹은 기적을 해석하는 입장은 예수 당시에서 보면 이방인의 관점입니다.)

**님의 말씀처럼 단지 기이한 현상을 두고(방언,예언, 축사)
모든 것을 현대 과학으로 분석을 할수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할 가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전에 언급한 독일 여학생의 접신 사건인 에밀리 로즈의 경우 그의 뇌파가 간질 현상의 뇌파 현상이 없는데 간질 현상을 보인 것입니다.

지체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체가 어떠한 절대적인 객관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3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저희가 저희의 관점에서 영적인 현상을 바라보기에) 옳고 그르다는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일반적으로 지체들께서 이해하는 “영적 현상”을 의미하는 “신비함”이 일반적이 사실(Fact)가 아니고 어떤 영의 개입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지체들께서  소위 신비한 현상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로 확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부언설명하면,
기적이란 단어의 의미에 많은 지체들은, 어거스틴의 기적의 정의처럼 처럼
“알려진(Known) 자연 현상의 초월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시대가 따라 지나서 과학이 발달하여 전에 신비함이 우리가 모르는 과학적 사실의 일부라면
그 기적이란 의미는 없어질 것입니다.

많은 분야에서 학문의 발달로 전에는 신비로운 사실들이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밝혀진 경우가 많습니다.(하버드 신학자 한비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란 책에서 동료 물리학자와 의학자와의 어느 현상의 나눔에서 깨달은 사실을 가지고 초기 기독교의 기적에 대한 입장을 고민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기적을 위와 같이 정의하면 점점 학문의 발달로 신비한 현상의 뒤에 감추인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지면 기적을 기반으로 생긴 신앙은 점점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기적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성경에서 의미하는 기적의 의미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매우 신학적입니다. 그들의 영적 전통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헬라적 영적 페러다임을 유대적 영적 페러다임으로 바꿔야 합니다.

지체님께서 말씀하신(아니 우리 거의가 의미하는 )
영적 현상과(비록 이 영적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신비함을 강조하는 헬라적인 표현이지만 )
일반적 과학적 사실과의 확연한 구분을 나타내는 의견은 없지만
(미국 정신과 지침서인 DSM 에서 현재의 신경 정신과 이론으로 해석이 되지 아니한 소수의 사례에 대해서
특이한 사례로 구분하였습니다. 최근의 캐나다 신경 학자가 작성한 ”영적인 두뇌(The Spiritual Brain: A Neuroscientist's Case for the Existence of the Soul)”에서 기존 신경학자 (대부분의 뇌 신경학자들은 유물론 주의자들입니다.)와 다른 각도에서 연구한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 연구가가 조사한 내용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이 주장이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위 심령 예배란 곳에 가면 심리적 영향이 대부분의 현상에 영향을 미친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대 교부들의 글에 의하면 지금과 같은 소위 영적 예배 형식에서 일어난 이상한 현상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어난 현상을 구분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영적 예배을 좀 이해하면 현재의 영적 예배는 당시의 초대 이단들의 예배와 너무 유사합니다.)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에 몇 권의 책들 소개와 같이 나누겠습니다.

***, ** 지체님의 말씀처럼 초대 교회의 영적 전통을 가지고
미혹의 영과 성령의 영적 구별과 그로 인한 영적 풍성한 은혜를 같이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단지 저의 작은 나눔의 내용에 대하여 저도 지체님들과 같이 고민하고 검증을 받아야 하기에 문제점에 대해 같이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지 문자적 혹은 영적 교리주의자들의 열린 고민아닌 닫힌 주장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지체 2:

작은자 님께서 바로 위의 글에 쓰신 내용은 저에게도 굉장히 고민을 안겨 주는 문제 입니다. 최근 몇년간 제가 경험한 일들이 , 그리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 그런 고민을 하게 하는군요 . 현재 여러성령집회에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일어나는 특이한 신체적 현상들이 사실은 하나도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체적 혹은 심리적인 현상이라면? 아니면 더 나아가서 혹시 악한영의 역사라면? 그런 의미에서 또한 작은자님의 20세게 성령운동과 초대교회 성령운동의 비교에 관한 글이 기다려 집니다. 그리고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뇌를 연구하면 할수록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지체 3:

자연적 혹은 영적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일어난것인지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 즉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들만 설명이 가능할 뿐, 설명이 안되는 부분은 언급조처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과학적 사실이라는 말자체가 사실은 연구된 내용만으로 결과를 유추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이며 단편적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정보가 제공되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편협"된 사고를 할 수도 있고, "유연"한 사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보를 전달하는 자와 받는 자의 자세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전달하는 자가 받는 자의 상태를 판단하여 지혜롭게 (지혜롭게 라는 표현도 객관적이지 않은 매우 애매모호한 표현입니다) 전해야겠죠.

영적인 현상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룩한" 것은 영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즉 "성령" "Holy Spirit" 은 Spiritual 하지만, "영" "Spirit" = Holy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영적인 현상"을 "성령님의 역사"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현상들과 성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심리학적인 사고와 과학적 검증, 역사적 고찰과 성경적 지식으로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정도..." 라는 겁니다. "지혜롭게"가 애매모호... 하다면 어느정도는 "매우 애매모호" 합니다.

"어느정도..."를 쉽게 말하면 "절대적이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그 평안은 영적 평안입니까? 심적 평안입니까? 그것이 영적 평안이라하면 그것이 성령이 주신것인지 악령(속이는 영)으로 부터 온것인지 어떻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영적평안을 "혼"으로 느낄 수 없다면 영적평안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으며, 영적으로 평안한데 심적으로는 불안할 수 있는지요?

또한, 심적인 평안이라 할 때 이것이 내 의지적 노력에의해(불교의 무소유적 사고) 평안(해탈)하게 된 것 입니까? 아니면, 내 혼적사고가 무감각해져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해탈과 무감각으로 인해 생긴 "평안"은 영적인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영과 혼의 나눠짐없이, "영혼"이라 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영적으로도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울적하면, 내 영적 상태도 울적한 것으로... 내가 끼쁘면 내 영적 상태도 기쁜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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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서 어떤 분비물을 분출하고 뇌파상태가 어떻게 변화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이유"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자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연구를 통해 발견한 "사실들"(Fact)이 진리(Truth)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지, 그들인 발견한 사실들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작은자:

과학과 영적인 문제에 대한 **님과 **님의 진지한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과학이 영적인 것을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이 부분에서 영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많은 지체들이 생각하는 신체적 이상 현상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이상 현상들을 해석할 때 그 현상에 대한 정보의 무지로 인하여 신기하게 생각하여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적인 것의 해석은 불가지론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이 밝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적인 것을 주장하는 지체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교리화 한다는 점입니다.

종교 개혁때 신교가 일어난 한 원인중 하나는 근대 사상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을 가지고 전에 주장된 담론들을 재해석 했다는 점입니다.

지체3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사실에 대한 개념은 그 영역이 다르기에 정의가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입장에서 진리가 과학의 입장에서 진리라고 주창하는 것은 무리가 옵니다.
과학은 논리로 구성된 이론과 그 이론으로 증명될 수 있는 현상이나 실체를 진리라고 보고 신앙은 주관적인 (기독교 관점에서는 주의 은혜로 깨달음) 것이기에 각자의 관점에서 그 정의를 가지고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실제적으로 많은 과학자중 영적인 것을 믿는 경우는 어느 사실에 대한 과학적 증명 때문이 아닌 개인의 실존에서 주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이 경험했다는 말은 믿음 즉, 주관적 입장이고 객관적 해석에서는 후험적(a posteriori)인 인식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논의는 형이상학 개념으로 해석이 되고 교부 시대로 부터 시작하여 스콜라 시대에 많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것과 과학적인 문제중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예를 하나들면 윌리암 사강이란 심리학자가 작성한 "정신 세계의 전쟁"(Battle for mind)이란 책의 논의 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각 종파의 지체들을 대상으로 회심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그리고 다른 대상군을 가지고 비교하여 기독교의 회심이란 심리학의 충격 요법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반발을 하였지만(그리고 이 책의 영향력이 당시에 꽤 컸습니다.)이 책에서 논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비판을 하지 못했습니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 주장에 대하여 일부분을 수용하면서 현대 기독교의 심리적 요소를 경계하였고 또한 모든 현상이 단지 심리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논리성을 가진 복음적인 관점으로 잘 설명하였습니다.

다음 글에 본격적인 나눔을 가지겠지만
많은 영적인 사건이 일어난
웨일즈 부흥과 1905년 인도네시아 부흥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에서 보고한 영적인 문제점을 나눌 예정입니다.
(특히 이런 부흥 운동에 대한 보고한 책자들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지체들에게 부흥의 긍정적인 요소만 강조하기 위해 사실의 왜곡한 과장 비성서적 해석이 많습니다.)
한 예를 들면 웨일즈 부흥 운동에 대한 여러 보고서가 있지만 마친 로이드 죤스 목사가 추천서를 작성한 Eifion Evans의 Welsh Revival of 1904 란 책이 가장 긍정적인 보고서란 평을 받고 있고 인도네시아 부흥의 경우 Kurt. Koch의
Revival in Indonesia이란 책이 가장 객관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잘 작성된 보고서라고 평가합니다.
인도네시아 부흥의 경우 삼시에서 알려지고 한국에서 번역된 멜 타리의 Like a Mighty Wind는 단지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하였에 객관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부흥을 작성한 코흐는 독일의 진보주의 신학의 한 지류인 튜빙겐 학파를 만든 튜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이지만 부흥과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복음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오컬트 전문 학자입니다.(특히 악한 영의 축사에 신학적이고 깊은 영적인 관점을 가진 학자입니다.

각 부흥 운동에 대한 일차 자료와 후에 나온 보고서를 종합하여 이 나눔을 가질 예정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도 각 지역의 유대 기독교인들, 다이스포라 기독교인, 이방 기독교에 따라 양식이 다양했습니다.(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각 지역 공동체의 예배 형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독일의 마틴 헹겔이라는 저명한 신학자가 많은 자료를 종합하여 어느 정도 윤곽을 밝혔습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은혜로 예전에 알려지지 아니한 많은 고급 정보가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도자들이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사살입니다. 우리도 모르면 배우고 깨닫고 더 날카로운 변증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스승인 힐렐이 세운 그의 학파는 유대와 헬라의 지식을 기반으로 성서를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그의 신학을 변증하기 위해 자주 인용한 스토이즘 철학과 구약외 당시의 여러 문서와 학문의 연구는 그가 영적인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계시를 여러 면에서 깊게 검증한 자세를 우리에게 보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한 결과 일반 기독교 지도자들보다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많은 신학적 지식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이를 인용하여 그들의 신학적 이해를 더욱 넓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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