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상담, 질문과 답변, 토론, 자료 추천 등이 이루어지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주기도문의 일용한 양식과 삼위일체의 단상

나눔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4-09-02 12:12
조회
4844
하늘 씨앗의 게시판에 처음으로 주제를 가지고 나눔의 글을 작성합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에 관한 문헌적 연구와 종말론적 관점에서 나눔을 갖고자 합니다.

이 글은 후에 작성할 주기도문에 관한 나눔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 이 나눔에서는 주기도문의 본격적 고찰보다 단지 일용한 양식이란 말씀만 가지고 나눔을 가지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주기도문의 말씀에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우리의 삶의 양식이나 필요를 의미하고 혹은 생명의 말씀이란 해석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분들은 하루의 주님과의 나눔에서 경건의 시간 (QT)을 이 일용할 양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우선 주기도문은 예수 당시에 하루 3번 암송하는 초대 유대교의 기도문인 소위 18 기도문(Shemoneh Esreh)과 같은 일상의 예식적인 기도문의 형태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은 당시에 각 종파별  각기 다른 내용과 형태로 전승 발전되었습니다.(한 예로 신약에서도 누가 복음 9장 1절에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는 요청을 하고 예수는 그들에게 주기도문을 알려 주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사용된 일용한 양식이란 단어로 해석된 원어는 epiousios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소위 hapax legomenon이라는 분류를 갖는 단어입니다.

이 의미는 당시의 많은 문헌이나 문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언급하면 예수 당시의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가 거의 발견되지 아니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조어 가능성이 많은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아람어에서 차용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 단어를 가지고 13개의 뜻이 있다고 언급도 하였고 혹은 이 논의에 반대 의견도 많은 것이 이 단어의 언어학 연구의 현실입니다.

2세기 말의 교부인 오리겐은 자신의 시대에 이 형용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는 복음주의자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언급을 합니다.

4세기 중반의 유명한 학자이자 교부인 제롬은 당시의 외경인 히브리인의 복음서에 사용된 단어(mabar(내일)이란 의미))와 비교 연구하여 "내일을 위한 양식" 이라고 해석을 하면서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마태 6장에서 언급된 내일을 위한 걱정에 비판적인 교훈과 위반된다면서 내일이란 단어를 유대인의 생활 양식과 비교하면서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이 단어가 오늘이란 뜻으로 해석된다고 하였습니다.(이 논의는 복잡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간략하게 언급하면 유대인들의 시간의 구별이 현재 우리와 사용되는 구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은 고민을 하면 당시의 랍비 문서에서 이러한 가르침이 작성되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시고 각 사람의 원하는 것을 제공하여 주소서..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당시의 랍비 문헌과 비교 연구하면서 일용한 양식이란 단어로 해석된 원어는 epiousios는 우리가 부족한 것에 관한 충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러한 유대인들의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 단어를 현대 학자들은 충분한 양(sufficiency) 혹은 일시적임, 일시성, 덧없음(temporality) 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가 당신의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의 관점의 전통에서 자신의 사역을 구원 사역의 완성으로 해석한 종말론 관점에서는 이를 출애굽의 성령의 인도하심 과정에서 그의 백성에게 제공하신 만나와 신학적 관점이 매우 유사합니다.

이를 하나님 말씀이나 생명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유대 종말론 관점에서 해석한 주기도문에서는 맞지 아니한 해석입니다.

후에 복음주의자들의 좀 더 적극적 해석의 상상력으로 주기도문을 해석한 부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성령에 위격에 관한 아주 간략한 논의를 하겠습니다.

성령에 관하여 양태성(신의 현존 방법의 하나로 해석)에 관한 논의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

지금도 신사도 운동이나 오순절파의 성령의 해석을 두고 양태론적 이단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교파도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와 2세기 중엽의 몬타니즘의 운동에 관한 비판으로 교부들이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4세기의 니케아 공의회때 지역교회의 교리적,헤게모니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으로 유명해진 논쟁의 주제이기도 합니다.(고린도 후서 13장의 말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함이란 말씀을 가지고 이 양태성의 논쟁이 본격적로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역사성에 관한 논점은 너무 복잡하고 어느 정도 헬라 철학에 관한 이해가 있어야 이해를 하기에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구약에서 영은 루아흐란 히브리 언어로 표현되고 셈족의 어원적 의미에서 이는 공기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바람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호흡으로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예수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성령을 바람의 예로 설명을 하십니다. 이는 성령을 구약의 전통에서 본 바람과  지혜서에서 언급된  예측할 수 없다는 바람의 교훈을 가지고 요한 복음의 구문의 특징인 단어의 이중성을 가지고 표현하십니다.)

사실 구약 학자 대부분은 구약에서 사용된 루아흐란 단어의 사용에서 삼위일체의 위격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위격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복음주의 학자 중 소수는 (지금은 이러한 견해가 거의 인정되지 아니함)창세기 1장 26-27에 언급된 하나님이 복수성 언급에서 삼위일체를 주장하지만 이는 셈족의 언어에서 신성한 단어의 표현으로 복수성을 의미하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19세기 말의 미국의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자인 워필드(B.B. Warfield)는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은 구약에서 계시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은 구약에 계시고 근거가 되며 구약 여기 저기에 숨어있다" 라고 우회적으로 구약의 삼위일체 개념의 부재를 언급하였습니다.

20세기의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교리학자인 칼 바르트도 위격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없기에 양태론자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좀 더 개략적으로 설명하면 삼위일체의 위격의 전승 발전 해석은 주로 바울 서신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롬 14:17-18,고후 1:21-22, 갈 3:11-14, 엡 2:20-22, 빌 3:3등 많은 부분이 바울 서신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된 교리입니다.)

거기에 반하여 영지 주의자나 몬타니즘들 은사운동파에서 자주 언급한 요한 공동체의 말씀(요한복음과 계시록등)을 가지고 양태론적 주장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태론도 잘못되었고 위격의 해석 또한 너무 헬라 철학에 기반한 교리적 해석으로 이해가 됩니다. (만일 이들의 논쟁의 일차 자료를 읽고 이해하면 이러한 관점은 매우 명확하게 부각됩니다.)

복음서는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언급을 관계성과 종말론적 계시적 관점에서 해석을 하였습니다.(예를 들면 요한복음 7장 39절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았다란 언급과 베드로가 행전에서 선포한 오순절의 역사를 가지고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모든 육체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언급한 것은 이런 종말론적 새언약의 우주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에스겔서 36장 24-32에 언급된 종말론적 계시와 같은 우주적 새언약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복음서에서는 성령에 관하여 이렇게 종말론적 사역의 시작의 표현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소위 영적 희년의 이러한 은혜의 종말론적 시대에서 성령의 사역은 필수이고 증거입니다.



작은자 드림
전체 5

  • 2014-09-06 08:02

    좋은 주제인데 논의하는 분들이 없군요.
    매인자님께서 언급하신 개인사와 연관된 주제이기에 매인자님은 더욱 안타까움으로 이 질의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전 학습을 할 때에 이렇게 삼위일체에 관한 공부를 조금 하고 질의를 받습니다.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에 관한 지식은 이렇게 학습때나 후에 개인적 궁금증으로 공부를 좀 한 후 약간의 지식을 갖지만 대체적으로 삼위일체이 어떤 교리인지 어떻게 생성되었고 성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아시는 분은 일반 지체들은 저의 경험으로 100 명 중 100 명 정도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신자들의 100 프로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들었고 약간의 학습을 하였지만 그 의미를 좀 명확하게 파악하신 분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의 경우도 거의 대부분이 잘 모릅니다. 단지 간략한 교리적 내용만 암기할 정도가 현실입니다.
    어느 정도 교리학이나 조직신학에 좀 관심을 가진 목회자가 어느 정도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의 무지한 삼위일체 교리지만 이단이나 이상한 교단의 구별시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가장 잘 모르는 교리의 내용으로 이단을 구별한다는 사실이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삼위일체의 내용에 관하여 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선 질의자가 일반적인 삼위일체의 역사적 발전이나 그 내용을 거의 모르기에 언급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교회에서 생성된 것이 아닌 2세기 중반기부터 태동되어 발전된 교리이기 때문에 역사적 전개 과정이 매우 중요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삼위일체에서 언급된 단어에 관한 헬라 철학의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동일본질(homousios), 위격, 단자, 유사 본질론, 로고스 등 생소한 단어가 이 논의 전반에 걸쳐 사용되기에 전문적인 교리학 공부를 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삼위일체 개념은 초기 기독교의 성서의 관점에서 전승된 것이 아닌 변증적 관점에서 후세에 발전된 철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교리적 관점에서 해석한 개념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개념으로 이단을 판단하거나 혹은 몇몇 이단은 삼위일체의 개념의 자의적 해석으로 지방교회나 구원파등이 회개가 필요없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조직신학자나 교리학자가 아닌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신약학 학자들은 이러한 교리 문제에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인용되는 몇몇 성경 구절이 사실 성서 해석학 관점에서 좀 무리한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심지어 사본학에서는 삼위일체 개념의 강조로 후대에 요한 일서의 말씀을 변조하는 경우도 발견되었기에 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선택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적 발굴과 초기 유대교와 비교 연구에서 초대 기독교에 관하여 많은 연구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연구에서 예수 당시의 유대의 종말론에 관한 문헌과 사회, 종교 전반에 종말론이 어떤 영향이 미쳤는가를 어느 정도 파악되었습니다.

    삼위일체에 인용된 신약 성서의 말씀이 좀 더 명확하게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관점의 상황에서밝혀졌습니다.

    현재까지 삼위일체에 관한 연구에서 초대 유대교와 문헌과 당시의 종교 역사적 상황에서 언급된 논문은 제가 일가로는 아직 한 건도 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 삼위일체 개념이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시대적 상황에서 논의되지 아니한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최근 2007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 세미나가 열렸고 이 세미나 결과물론 한 권의 책자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자에서 당시 예수와 사도들의 히브리 성경(구약)의 성경적 정경의 인식에 관한 연구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연구에서 예수와 당시의 사도들은 현재 우리가 구약의 정경에서 가진 그러한 개념보다 좀 더 확장된 정경 개념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와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말씀과 그들의 말씀이 당시의 히브리 성경과 여러 종말론적 문헌의 관점에서 언급되었다고 합니다.(참조 Jesus Research New Methodologies and Perceptions 에서 The Scriptures of Jesus:Did He have a Biblical Canon By L.M. McDonald)

    매인자님께 제가 개인적으로 보낸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였습니다.
    " 우선 간략하게 설명하면 복음서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은 삼위일체의 개념이 아닌 종말론적 개념입니다.

    우선 예수 당시의 유대 문서와 랍비 문서에 이 단어는 종말론적 메시야와 관계가 되었고 쿰란 문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이란 단어가 명확하게 이 종말론적 메시야와 연관된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랍비들의 가르침에서도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종말론적 역사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자를 언급하신 흔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4세기의 니케아 공회의에서 완성되어간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이 초기 기독교와 매우 상이한 전개를 가졌다고 언급하면서 신적인 아들의 자격(Divine Sonship)에서 우리가 현재 교리적인 해석의 아들이란 개념은 초기 기독교 개념과 전개가 매우 다르고 현재는 헬라의 영향권의 교부들의 전개로 된 부분이 일반적인 교리의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된다고 언급합니다.(The Son of God in the Roman World: Divine Sonship in its Social and Political Context By Michael Peppard의 제 1장 니케아 전의 신적인 다을의 권위 참조) 영국의 신약학자인 Richard Bauckham의 그의 말을 빌면 "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종말론적 관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였다." 라고 언급합니다. 이를 가지고 학자들의 그의 해석은 "예수의 하나님의 신적 아들의
    권위를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아들과 딸들에게 권세를 준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의 신적 권위의 아들이란 개념을 1 세기 초에 그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헬라적 원개념적인 신의 아들이란 개념이 아닌 종말론적 개념으로 이해하였다고 학자들은 언급합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를 좀 깊이 고민하면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움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4세기의 니케아 공의회 이후 교리의 발전이 헬라철학의 전개의 발전으로 완성된 삼위일체의 개념이 이렇게 발전되어 현재 삼위일체의 기독교의 교리의 구조를 완성되었습니다.

    쿰란 공동체의 문헌과 유대 종말론에 관하여 언급된 문서들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예수 또한 이러한 개념에서 그의 메시야적 사역을 설명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제한 조건과 (삼위일체의 교리에 관한 역사적 발전 관계의이해 부족)함께 20세기 들어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진 초대 유대, 기독교 종말론 관점에서 삼위일체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의 관계의 관점에서 삼위일체에 관하여 논의하여 보겠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앞서 어느 정도 잘 간략하게 서술된 역사적 삼위일체 자료를 씨앗창고에 올리겠습니다.(한국의 장로교 신학교의 석사논문인데 아주 잘 간략하게 역사적 삼위일체에 관하여 언급되어진 자료입니다.) 이 논문을 지체들께서 읽으시고 삼위일체에 관한 초대 유대, 기독교 상황에서 논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 2014-09-11 22:39

      이단 판정의 기준으로 삼위일체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막상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대충 넘어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인 듯 합니다.

      소개해주신 논문 감사합니다. 지금 다 읽지는 못하고 서두를 짧게 읽어 보았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이 이론-->경험-->실천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이론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삼위일체론은 가장 체험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삼위일체는 모호한 관념으로 다가 올 뿐이고, 체험적이거나 실천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지나치게 교리화가 되어서 일까요? 삼위일체의 실천적 이해... 삼위일체의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라는 것을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드는군요.


  • 2014-09-12 03:31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매우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은 확연하게 성자의 개념이 없고 성령의 개념도 신약과 매우 다르게 표현됩니다.
    (아주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성자의 개념을 추론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역사(예언등)나 현존을 표현할 때 성령의 언급이 있습니다만 신약에서 언급된 성령의 사역과 좀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은 하나님의 현존이나 역사의 표현에서 언급되는 것 같이 같은 위격의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에서 분명 성령과 성부와 성령의 개념들이 좀 뚜렷하게 언급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개념에서 처럼 각 개념들의 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양태론적 해석이나 군주신론등이 후대에 각 공동체의 신학적 해석에 따라 언급됩니다. 니케아 공회의 이전에 각 지역의 공동체에 따라 발전된 신조( 사도신조나 예루살렘 신조등)에서도 그 관계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고 단지 성경에서 언급된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의 성서적 표현만 간략하게 언급하였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연속적이지 않은 이 세 개념의 이해를 위하여 소위 포로 후 중간기에 전승 발전된 유대의 사상적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여기에서 본격적 종말론이 발전되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20 세기 이후 쿰란 문서나 초기 유대교의 연구에서 어느 정도 이러한 관점들이 당시의 일부 유대 종말론을 추종하는 공동체에서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급격한 종말론적 유대 공동체는 흥미롭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말씀 선포도 갈릴리 지역에서 그의 종말론적 선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유대 지역에서는 성전 전통의 예배에 도전적인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전에 엄급하였지만 인자의 개념도 학자들의 연구로 갈릴리 지역에서 발전되었다고 판명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 선포를 각 지역에서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도 흥미롭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에서 예수의 말씀 선포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복음의 내용이 그의 사역의 치밀성에서 나온 것을 알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불연속적인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개념이 예수 당시에 어떻게 태동되었고 신약에서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깊이 고민해야 삼위일체의 한계를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역사적 전승에서 언급된 것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의 해석은 초기 기독교의 언급과 달리 교리화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펀치넬로님이 언급하셨지만 제가 올린 논문에서 삼위의 관계를 체험적 실천적 관계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단지 성부 성자 성령이 신약의 언급이 체험적이고 실천적 관계이지 삼위 일체에서 언급된 그 세 개념의 관계성은 초대 교부들에 의하여 각 공동체의 신학적 지향성에서 발전되었습니다.

    많은 지체들께서 논문을 읽으시고 최소한의 역사적 관계에서 삼위일체를 이해하시고 나서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 당시의 삼위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 되었고 신약에서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2014-09-17 09:01

    삼위일체의 역사적 고찰에 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도 펀치넬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서 안에 있는 삼위에 대한 기록은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사회와 개인의 삶의 구조가 만들어 졌으며 이러한 과정이 있은 다음에 그 실상을 의식적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 세 위격이 함께 사역하신다고 하는 이론이 정립되었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론은 가장 체험적이고,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이론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는 부분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후에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굉장히 사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작용했던 것 같고요.

    요즘 이 주제에 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조금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복음주의 학자들도 공관복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신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속과 계시의 메시아로서의 호칭이라고 보더군요. (독생자로서의 고유한 권한이 마태 11:27, 마가 12:6, 13:32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성령의 권능을 입은 해방자로서 (누가 4:18-21)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현재에 임하게 하신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TRINITY”, New Bible Dictionary, 1209.)

    그외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작은자님께서 이전에 "선존재성"과 관련하여 보내주셨던 글에서 말씀하셨던 것 처럼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 신구약 중간기에 발전된 유대적인 사상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보통 그리스도교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혹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고스라는 개념을 차용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유대학자들은 요한복음 1:1-5이 잠언 8:22-31을 해석의 틀로 한 창세기 1:1-5의 전형적인 미드라쉬적 해석이라고 보더군요 (이미지와 언어가 해석하는 텍스트와 다른 곳에서 차용되어진).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유대적인 로고스의 미드라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적용되어 졌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서론은 완전히 유대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요한 공동체의 기독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LOGOS, A JEWISH WORD: JOHN’S PROLOGUE AS MIDRASH", The Jewish Annotated New Testament)

    "선존재성"과 관한 나눔의 글을 이곳에도 올려 주시면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고민한 바로는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을 직접 경험/체험하고 증인으로서 하는 고백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저도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증인으로 살기를... 아들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 2014-09-17 10:49

    매인자님과 나눔이 점점 깊이를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논하는 것을 잘 정리하여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에 관하여 역사적 고찰이나 고민 없이 무슨 초등학교 시절에 암기 사항처럼 단지 무조건 암기하고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면 이단이나 신앙이 없다는 식으로 교회에서 취급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상호간에 삼위일체의 몰 이해로 이러한 삼위일체에 관한 깊은 나눔이나 역사적 고찰을 나눌 여력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인자님과 같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나눔에서 좀 더 자유롭게 논의하면서 그 눈을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이 나눔이 정리되면 성경에서 언급된 성부 성자 성령의 개념이 어떻게 초대 기독교에서 태동되었고 (사실 신학적 이유는 이 문제 때문에 초기 유대교에서 기독교는 분리가 시작됩니다.) 현재 삼위일체의 관점을 예수 시대에 초기 유대 공동체의 관점에서 조명한 한계를 언급하겠습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매인자님이 언급하신 성자의 선존재성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이 사실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해석되어 교부들의 삼위일체의 관계성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이지 않고 매우 사변적인 개념입니다.

    선존재의 개념은 유대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이 되어야 하고 사실 신약에서 언급된 삼위의 관계성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요한 복음서를 가지고 20세기 초에는 헬라화의 영향을 받은 문서로 학자들은 보았는데 예수 시대의 원시 기독교의 역사적 연구와 함께 초기 유대교의 연구와 쿰란 문서등 다른 여러 고고학적 자료의 발굴과 재해석으로 일부 학자들은 당시에 급진적 종말론 공동체인 쿰란 공동체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고민으로는 전에 삼시에서 종종 간략하게 언급을 하였지만 요한 공동체는 세례 요한의 공동체와 어느 정도 관계성을 가지고 그 연장선에서 쿰란 공동체와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매인자님의 해석이 제가 이곳에서 삼위일체의 어떤 한계성에 관하여 나누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하여 주신 것 같습니다.

    선 존재의 글을 나중에 이곳에 올려 보겠습니다.


전체 105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온라인 서점 배본 (26)
웹섬김이 | 2018.03.27 | 추천 1 | 조회 3372
웹섬김이 2018.03.27 1 3372
14
종말론의 단상을 다시 시작하면서 (6)
작은자 | 2014.10.28 | 추천 | 조회 3189
작은자 2014.10.28 3189
13
복음이 필요한 자를 위한 성경공부 (5)
peace | 2014.10.22 | 추천 | 조회 2550
peace 2014.10.22 2550
12
청년들의 질문 (8)
펀치넬로 | 2014.10.21 | 추천 | 조회 3140
펀치넬로 2014.10.21 3140
11
하나님의 사람들(동화상) (1)
작은자 | 2014.10.10 | 추천 | 조회 3265
작은자 2014.10.10 3265
10
베드로서신을 읽다가 (6)
펀치넬로 | 2014.10.08 | 추천 | 조회 2627
펀치넬로 2014.10.08 2627
9
주님을 보게 하소서 (8)
매인자 | 2014.09.30 | 추천 | 조회 3511
매인자 2014.09.30 3511
8
작은자의 인사 (23)
작은자 | 2014.09.23 | 추천 | 조회 3461
작은자 2014.09.23 3461
7
은혜 아니면 (8)
매인자 | 2014.09.18 | 추천 | 조회 3595
매인자 2014.09.18 3595
6
마가 복음 1,2장 그리고 기도
작은자 | 2014.09.17 | 추천 | 조회 5782
작은자 2014.09.17 5782
5
고린도 서신 이야기 2
작은자 | 2014.09.17 | 추천 0 | 조회 3460
작은자 2014.09.17 0 3460
4
고린도 서신 이야기1
작은자 | 2014.09.17 | 추천 1 | 조회 3963
작은자 2014.09.17 1 3963
3
영어 성경 선택에 관한 조언 (6)
작은자 | 2014.09.16 | 추천 2 | 조회 23141
작은자 2014.09.16 2 23141
2
송상절의 전기, John Sung by Leslie T. Lyall을 읽고 (1)
매인자 | 2014.09.03 | 추천 4 | 조회 6725
매인자 2014.09.03 4 6725
1
주기도문의 일용한 양식과 삼위일체의 단상 (5)
작은자 | 2014.09.02 | 추천 | 조회 4844
작은자 2014.09.02 4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