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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에 관한 논의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4-11-25 11:06
조회
4873
아래 글은 전에 2000년 후반에 미국의 플로리다 지역에서 소위 신사도 열풍이 불 던 때에 어느 곳에서 몇몇 지체와 나눈 글을 편집한 글입니다. (당시에 이 지역에서 토드 벤틀리란 자가 여러 놀라움과 함께 성령의 전이란 임파테이션의 능력을 보였다고 전하여지고 미국의 유명 티브에서도 이 문제를 방송하였고 한국과 세계 각 국의 많은 사역자들도 참여 하였습니다.)  이 논의에서 여러 지역의 몇몇의 복음주의 사역자들이 참여하여 신사도 운동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참여한 사역자중 몇 분은 당시에 신사도의 운동을 지지하면서 기독교 잡지들에 신사도에 관한 긍정적 글을 기재하신 분들도 있고 모 기독교 공동체의 인도자도 몇 분 있었습니다. 논의에서 사용된 개인적 아이디를 지체란 아이디로 편집하여 글을 편집함을 알려 드립니다. 매우 긴 댓글의 논의지만 여러 주제가 논의되고 각 부분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나눈 댓글입니다. 찬찬히 읽어 보시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오래 된 논의이지만 아직도 신사도에 관하여 많은 정보가 부족한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신사도 운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이 논의된 글을 편집하여 이곳에 올립니다.

초대 기독교는 단지 환상이나 신비를 중요시 하는 내세적인 신앙관을 갖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현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그분의 계시를 깨달아
주님의 백성의 바른 인도를 보이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깨닫는 신앙관을 갖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계시에 대하여
영국의 복음 주의 학자중 초대 기독교에 대한 전문가중 한 명인 제임스 던(James Dunn)은 그의 책
영의 분별-바울과 사도들의 신학에서 간과된 은사(Discernment of Spirits-A Neglected gift in the Theology of Paul and the Apostle)”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누군가 영에 이끌려 선포할 때 공동체가 아무 생각 없이 그 선포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 선포에 대한 질문을 같이 나누며 좀 더 명확하게 그 선포의 진위를 분별하였다 (원 저서의 편역)
초대 그리스도인 중 말씀 선포나 영적 현상에 대해 그 근원의 영에 대한 분별에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다.
그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어떤 예언이나 선포를 직면 할 때마다 그 예언적 영감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영감이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모든 예언적 선포는 반드시 사려 깊은 조사와 평가를 거쳐야 한다

이 신학자는 조사와 평가에 있어서 성서적 몇 가지 기준을 제공하였습니다.

1. 복음 (성경)을 통한 검사 성경 전반에 비추인 계시의 기준
2. 선지자 혹 예언자의 특성과 활동
(사랑과 섬김이냐 혹은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인간을 조정하는 것이냐 갈라디아서(5:1,13-26) 요일(4:7-12))
3. 그 선포로 공동체가 누리는 혜택

저 개인적으로 제임스 던의 이 분별의 최소 기준에 동감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시각을 고민하여서 아래 글을 작성 합니다.

개인적으로 즐겨 찾는 www.sermonindex.org 싸이트가 있습니다.
최근에 토드 벤틀리에 대한 언급이 올라왔고 논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교파에 따라 해석은 다르겠지만
이 싸이트는 초교파 지향을 하는 곳입니다.

어느 정도 균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균형을 가진 싸이트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최근 토드 벤틀리에 대한 이곳에 오신 여러 분들의 생각입니다.

http://www.sermonindex.net/modules/newbb/viewtopic.php?topic_id=23415&forum=35&16

토드에 대한 편집된 화상을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올바른 판단의 방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주의 영에 역사에 기존 교회의 권력의 무리들이 반대한 경우가 기독교 역사나 지금의 현실에서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을 내려 놓고 온전한 것을 주께 구하는 자세로 말씀안에서 성령의 알려 주심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의 열매는 옛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그분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 경험에는 각 개인의 삶이나 인성이나 여러 모습에서 다양하게 역사 하십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다양한 인도하심에서 결국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점입니다. 선한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전도나 능력 보다 본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확연하게 보여지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충성된 감독이나 집사를 선택 할 경우에 몇 가지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는 도덕적 행위의 평판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 바울이 지적한 것은
그런 윤리적 기준이 아닌 성령의 열매의 기준으로 자격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기준에는 지적 능력이나 은사의 능력이 아닌 경건의 능력이었습니다.

버울의 말씀을 읽어 보면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으셨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셨습니다. 세상이 그를 믿었고, 그는 영광 가운데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디모데 전서 3장 16)

경건은 하나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경건은 실제 열매를 가져오는 주의 능력입니다.
도덕과 다른 (외형은 유사하지만) 능력의 실재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기자는 성령안의 경건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속의 모습을 버리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태도라 말씀하십니다.

경건은 일반 도덕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 성령의 주장하에서 주의 말씀과 기도로 통해 신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 선한 주님의 성품입니다.

당시에 토드가 플로리다 지역에서 행한 소위 성령의 기름 부음이라는 장면을 동화상으로 편집한 장면입니다.



당시에 그가 설교가 기록된  동화상에서 토드는 어노인팅과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표현하며 어노인팅 (성별)에는 이런 여러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가지고 삶의 어려움(경제적 문제나 모든 문제)의 끈을 끊어 준다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런 외형적 문제(아마 문신이나..기타 문제)를 가지고 기존 교회에서 비판을 하지만 성령은 자비를 주셔서 자신을 사용한다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설교의 내용에는 문제가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 중요한 성서적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많은 기존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기에 이런 설교가 많은 지체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내용이 성경에서 언급한 내용을 말하기에 별 문제없이 보입니다.

우선 제가 그의 설교를 듣고 나서 문제를 느끼는 것은

1)어노인팅(성별)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분에 토드 벤들리는 기적의 현상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이라고 단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사와 능력을 구별 못하는 것 같앗습니다.)이 은사(카리스마)로 주신 신기한 힘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능력(두나미스)은 악한 영이나 여러 경우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성별 (어노인팅)
이 도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죄인인 우리를 그의 계시에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그리고 그 피로 구원 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바울 신학의 핵심이고 초대 교부들의 가르침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어노인팅은 그의 주권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라고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였습니다.
특히 어노인팅에 대한 성경적 해석은 구약에서 깊게 묵상하여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성령이 알려 주신 그 영적 교제로 (코이노니아)그 능력을 악한 세력과 대적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학교..
인간이 만드는 예언자 학교는 사교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어느 지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위치를 지키면서 성령에 순복하면
주께서 필요한 시기에 코이노니아를 이루신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이 것이 성경적인 영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에 사용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성경적 의미를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출애굽에서 많은 이적과 능력 그리고 가나안 정복의 첫 자리에서 주의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 보면 그가 많은 능력 안에서 (이 경우 능력은 기적) 점차 어려움을 많이 표현했습니다.

사도 행전의 경우에도 사도들의 기적이 점차 언급이 되지 않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 은사 중지론의 시작으로 말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지금도 계속 됩니다.

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첫 복음을 전하는데 거기에 악한 영의 인도자 마술사 시몬의 언급이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첫 부르심으로 1차 전도 첫 사역지인 살라미에서 거짓 예언자 바예수를 만났습니다.

사도나 바울의 경우 그들의 첫 사역지에 악한 영의 인도자들이 지배하고 있기에 영적 은사(카리스마)의 현상인 능력(두나미스)이 필요한 것입니다.

항상 처음 악한 영이 지배하는 사역지에 전도를 하면 많은 능력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이는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 그 지역의 악한 영의 지배에서 승리하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십니다.

신, 구약의 경우 이런 영적 싸움에서 이런 모습의 영적 메카니즘을 모두 보이고 있습니다.

단지 개인의 삶의 안위를 위한 이런 능력의 사용은 가나안의 악한 마술사나
사마리아와 살라미의 악한 영적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영의 지배로 해방을 시키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영국의 경우에도)역사가 많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능력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처음에 우리의 앞에서 역사 하십니다.
(그렇기에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지체들이 처음 예수를 믿는 경우나 악한 영의 사역지에서 처음 싸움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점차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시면서
주님의 형상을 닮은 놀라운 새로운 생명이 성장하여 악한 권세와 싸울 수 있게
성령의 인도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이젠 이 능력(두나미스)보다 우리안에 있는 성숙된 생명이 놀라운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말씀입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아직 이 칼을 사용하기에 힘들어 주께서 은혜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요한 일서 기자는 우리에게 깊은 말씀의 비밀로 무장하여
그 주의 말씀의 무기로 대적하기를 권면 하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의 놀라운 능력에 많은 그의 서신에서 침묵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그것이 생명이고 영적 무기이기에)
전합니다.

토드 벤들리는 성경에서 일어난 영적 현상만 인용하여
성령의 역사라 주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외형은 성령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영의 역사는 그 메카니즘이 비슷하기에 같은 현상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열매가 다르기에
본질적 개인의 삶에 생명이 없기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과 야고보는 경건을 주의 능력이라 표현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작금의 미국 교계에서
심리적 위안으로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복음을 변질시키는 죠엘 오스틴 부류나

영적인 능력으로 인간의 죄성을 욕심을 만족시키는(능력받아 어려움을 이기자!!)
토드 벤들리나 그 본질의 설교 차이가 없음을 느낌니다.

양쪽 설교의 특징은 죄의 회개에 대한 통렬한 고백이 없고
마음의 바알을(풍요) 위한 만족과 위로를 제공하는
복음을 인용한 설교입니다.

아주 미국적인 설교입니다.

복음주의에 부는 죠엘 오스틴과 토드 벤틀리의 광풍에서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고민 합니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여쭈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들을 것이다. 너희는 당황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이 민족을 거슬러 일어나고, 나라가 나라를 거슬러 일어날 것이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은 진통의 시작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 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며,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주석가들은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 부분을 유대 멸망 전에 성전에 새워진 로마 황제의 동상으로 해석하지만
오늘 날 교계에 일어나는 현상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에 인간의 욕망이 가득한 현 우리 교계의 모습..

한 쪽은 심리나 기타 인위적 전략으로 인간에게 소망과 위로를 제공하고 (본질의 변화 없는 ) 다른 한쪽은 놀라운 능력으로 그 능력을 소유하여  어노인팅의 확신과 인간의 욕심을 만족 시키는 종교적 행위로 보였습니다.

성서에 기반한 영적 해석이나 교리에서 전통적인 영적 선배들의 말씀이나 그리고 개인의 삶의 모습을 볼 때 단지 그에게는 주의 말씀의 일부 인용으로 성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모습과 인간에게 놀라움을 주는 능력만 있을 뿐 주의 생명이 없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동산에서 뱀도 인간의 만족을 위해 주의 변조된 말씀을 가지고 왔고 예수께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의 육적, 영적 만족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의 의미를 곰곰히 묵상하면
이 토드 벤틀리의 문제를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이 너무 진지한 고백으로 들립니다.



아래 댓글은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여러 지체와 사역자들이 이 논의에 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글입니다.

지체1:

작은자님의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지체2: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시는 사역위에 주께서 더 많은 어노인팅과 어쏘리티를 허락하시길 기도합니다

지체3: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고수하시려는 작은자님의 열정과 진심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여러 자료들을 통해 논증하시려는 진지한 시도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행 중인 집회와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작은자님의 표현대로 조급한 결론을 미리 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감동적인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한 분별과 결론을 객관적인 내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던 제자들의 증언 뿐만 아니라 그분을 반대하던 무리들의 발언과 또한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 (예를 들면 십자가 곁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 )의 발언도 참고로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복음서를 토대로 하나하나 짚어 가시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진실임을 명쾌하게 밝히셨습니다. Lakeland Outpouring은 제가 보기에 Revival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고 Outpouring이란 표현 그대로 치유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집회인 것 같고 (마치 캐더린 쿨만이나 베니 힌,혹은 토론토 블래싱집회와 유사한 분위기 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통해 PowerEvangelism이 확산되는 것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예언사역이나 치유사역..등 능력사역에 부작용도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성경에 기반을 둔 성숙한 사역자들에 의해 성령의 은사들이 능력있게 사용되고 또한 교회에 덕을 세우고 큰 유익을 끼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기름부어심의 Impartation 또한 작은자님이 올려놓은 영상물과는 다르게 아주 인격적이며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함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고 또한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토드 밴틀리 사역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비판적인 글들도 있고 오늘 제가 down받은 자료는 Dr.Gary S. Greig(Regent University의 전 구약학 교수이자 신학잡지의 편집장)이 쓴 55쪽 분량의 "A Theorogical Response to Criticism of the Lakeland Outpouring and Todd Bentley: BIBLICAL REASONS TO RECEIVE GOD'S GLORY AND GIVE IT AWAY IN POWER EVANGELISM"이란 글입니다. 충실하게 작성된 자료인데 지금 예수원이 바빠서 아직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작은자님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www.freshfire.com에 들어가면 많은 간증과 함께 이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잘 아시는 목사님 두분이 집회를 참석하시고 조만간 본인들의 체험기를 올리실 예정이라고 하니 또한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 또한 작은님 처럼 Pure Gospel의 진리를 고수하기를 바라지만 예수원에서는 그단어 보다 Whole Gospel이란 단어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촛불 시위에 휘청거리는 것 처럼 보이는 한국교회가 진정 성령안에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가 회복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샬 롬 !

지체4:

작은자 님의 말씀에 대부분 동감합니다. 다만, 이부분:

"선한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전도나 능력 보다 본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

좀 엉뚱한 말씀이란 생각이 듭니다. 주님이 스스로 밝히시길
자신이 보냄받은 것은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8)또 우리의 전하는 말씀은 말이 아니요 능력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도와 능력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전도와 능력이 없으면서 열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혹 보셨다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만들어낸 모양 뿐인 경건이죠...
삼백 데나리온에 기름을 팔아 가난한 자를 나눠줘야 했다고
주장한 것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주신 능력이나
성령께 순종함으로 얻는 성령의 열매나 모두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주신 것들이지만, 참 사랑인 전도함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이 있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열매를 주시는 성령이 계시다면 전도함과 능력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3님께 드리고 싶은 얘긴..
그저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성령받은 믿는 이로서의) 사명자로서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는 덜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또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도
삼키려고 덤빕니다. 마음에 하나님 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야 어떤 집회에서
어떻게 휩쓸려 가건 상관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지목하시고 저 영혼을
어두움에서 끌어내라고 명령하신다면 분명히 분별하고 참된 양식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일단 지금까지의 제 개인적인 판단은 Todd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만, 지체3님도 장황한 설명보다는 성경에
근거해서 왜 Todd가 하나님이 복음 전함을 위해 세운 재목인지 좀 더
간결하고 분명히 발겨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반론에 대해서는 저도
성경에 비추어 몇 번 썼고 작은자님도 썼습니다. 하지만 지체 3님은
그냥 주관을 말씀하셨을 뿐, 성경에 비추어 조명해 주시질 않으셨습니다.
저도 관심이 많이 갑니다 아직 자료도 많이 부족해서 완전히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분별하려는 노력은 분명 필요합니다.

지체5:

벤틀리로부터 서핑하다 나온 어느 주(酒)성령파 신자(?)의 댓글 내용입니다. 내용이 저속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기에 감히 올립니다. 참고하십시오.

You guys burn yourselves out on religious debates.....Theology- Doctrine -Etc... Did ole Calvin ever just get whacked and levitate???? Or even work miracles??? Hummmmm.....Well I guess I'll just toke the Ghost for you Guys....I'm Predestined to get sloppy drunk in the Holy Ghost and work the ole Glory realm.. I could care less what John Calvin Believed but I did think I'd stop in and leave a little drunken glory! Think ole calvin needed a good holy ghost enema to get all that God plays favorites out...LOL. Either way believe what you may just know that if doesn't propduce miracles it's probally religion...Romans 15:15-18...
Peace and holy Bongs...Stiggy glory.

지체6:

지체3님 나눔 감사합니다.

이 일이 있으면서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이 침에 진흙을 이겨 나았을 떄를
교회적으로 여러 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일에 적용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아무튼
성령의 역사에 긍정적인 자세가 먼저이든
분별로 근신하며 깨어있으면서 말씀으로 검증하려는 자세가 먼저이든

그것이 한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시각이 전부라는 것에 경성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이나 지금이나 바리새인이 있을 텐데
미혹에는 깨어있으려 하면서 바리새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신에 대해서 적용하지 못하는 자기신뢰를 봅니다.

부흥. 멀고 먼 천로역정이네요.

작은자:

지체3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제가 신뢰하는 곳이 예수원입니다.
예수원에 가보지 못했지만 많은 지체에게 예수원을 권하고 대신부님의 글을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예수원을 허락하신 것은 전 진정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에 예수원에 방문을 소망하여 봅니다.

저의 이글이 이곳에서 분파 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면 합니다.
이런 글을 작성하면 교리 주의자나 은사에 무관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어느 때는 교리 주의자란 말을 들으면 주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전 항상 생각합니다.

전에 글을 작성하였지만 교리나 말씀해석의 다른 부분에서는 항상 열려 있는 마음으로 배우고 듣습니다.
그렇지만 영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기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작지만 주님께 이런 분별의 시기에 분별의 영을 간구하면서 주변에 영적 지체들과 말씀을 가지고 그리고 그들의 계시를 가지고 조율을 합니다. 초대 교회나 예수원에서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도하는 소모임에 다양한 분들이 참석하십니다.
70.80 대 어르신들도 계십니다.
그들 대부분은 은사파이시고 전도사나 권사로 여러 지체분들을 섬기시는 분들입니다.
많은 은사의 능력을 받고 젊었을 때 주를 위해 일을 하신 분들입니다.
은서를 받아 여러 교회와 지체를 섬기신 어느 여 전도사님(70대)께서 최근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사역하였지만 말씀을 먹으면서 내 자신을 깊이 보는 것은 이제 시작이네요"
말씀이 자신을 보게 만드시는 것이겠죠.
그리고 참다운 회개를 시키고 다스리는 마음이 아닌 섬기는 마음으로 지체들을 섬기게 되겠죠.
영적 어르신들이 몇 분 계시니 어느 때는 자신들의 과거 능력의 간증으로 나눌 때가 있습니다. 초신자에게는 격려와 놀라움을 주겠지만 서로 능력을 가진 분들이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 알력을 경험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시 요한과 야고보의 영적 권위에 대한 알력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문제는 지배의 영입니다...
섬긴다는 표현으로 지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주의 사람들은 주 앞에 항상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서로 나누면 이런 지배의 영이 사라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영적인 지체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문제의 이 재배의 영의 유혹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나 예수님의 고백은 섬김의 표현이었고
최춘선 할아버지나 대천덕 신부님의 모습도 그 섬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경건이 기독교의 주지 주의자들에게 강조되어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열매로 보여지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한 경건은 그런 경건과 전혀 다른
성령의 인도로 주의 성품을 닮는 열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 하나의 삶에서 거룩과 성결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운 그 분의 능력으로 구원하셨지만 그의 백성에게
삶의 하나하나에서 예배의 형식까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철저하게 나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지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윤리나 형식의 경건이 아닌
주의 백성이 주의 인도하심에 거할 때 요구되는 주의 경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도 주의 백성이 갖는 열매는 이런 모습입니다.
바리세인들은 그 안에 악한 마음과 자신들의 의로 이 경건을 유지하였기에
에수께서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그들의 형식적인 경건에 대하여 배척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교도들의 문제도 이러한 점입니다.
그렇기에 그안에 생명이 없기에 그 경건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 경건은 뿌리가 없는 경건이기에 형식적이고 선한 열매가 없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경건은 그 생명으로 환경에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어느 환경에서도 주의 열매를 맺는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른 이가 너희에게 선하게 할 경우 너희도 그 사람에게 선하게 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다른 이가 핍박을 가할 경우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그 믿음...(제가 가장 꿈꾸는 믿음입니다.)

악한 환경에서 주의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영적 어르신중 한 전도사님께서 "이제는 은사의 능력을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보잘 것없는 나를 사용하신 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능력보다 (여기서 능력은 두나미스)주의 복음이 나를 찌르며 나를 보게 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느 환경에 대하여 소망을 갖게 하여 주시는 그분에게 감사합니다"란 고백을 들었을 때 주님의 능력에 감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고백은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말씀을 먹음으로 성령께서 그 분의 안에서 조명하시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 주의 역사였습니다.

주변 지체들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성경과 초대 교부들이 말씀하신 경건의 힘이란 이런 열매이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나미스를 행하는 자가 폭력적 프로그램이나 이상한 악한 음악을 즐기면서 세상의 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 없이 살면서..또한 몸에 이상한 행위를 하면서 (과거의 죄는 용납됩니다. 문제는 현재에도 그런 모습을 지속하거나 점차적인 죄의 각성이 없는 경우 이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주는 죄인들을 만나신다..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체님들을 진정 사랑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것이 아닌 주의 영이 사랑하시게 만듭니다
같은 영이기 때문이겠죠.

그렇지만 안타까움으로 이 글을 작성합니다.

이는 다른 눈으로 보는 문제가 아닌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말씀이기에
이 글을 작성합니다.
지체들끼리 나누면서 계시나 역사가 있을 때 제일 먼저 검증하는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이적이 저희가운데 행하여 진다고 하여도 그 말씀에
비추어 선명하게 아닌 경우 이를 과감하게 버립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고 여호와께로 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전 문자 주의자도 아니고 교리 주의자도 아니고 주지 주의자도 아니고 은사 주의자도 아닙니다.
전 성경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따르는 작은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기에 역사에서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영을 분별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셨다고 기독교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테드 헤거드 목사 문제의 경우를 보아도
아무리 놀라운 말씀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일지라도, 전하는 자안에 주의 생명이 없으면 악한 세력에 이용당합니다.

열매는 보입니다. 열매는 주변의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는 그 사람의 평상시의 생각이고 삶의 모습입니다.
환경에 초월한 늘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적인 모습입니다.

그 열매를 보고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오는 말이나 행하는 능력이 아닌
그 삶에서 모습에서 (그렇기에 제 자신이 회개합니다.)
주는 우리를 불꽃의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원에서 윤 형제 문제 때문에 많은 소리를 들으신 것으로 압니다.
이런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영의 지배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핍박이나 한 지체에게 역사하시는 주의 능력이나 역사를 몰이해 자들의 공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예수원에서 윤 형제에게 보이신 그 모습은 역시 예수원이다
란 생각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천덕 신부님께서 살아계시면 타드의 몸의 이상한 그림이나
평소 즐겨듣는 하드 락 음악이나 피를 보이는 검투사가 나오는 티브 프로그램..그리고 폭주족과 같이 어울리면서
즐기는 모습을 그가 죄인과 같이 한다고 생각하셨을 까요?

초대 교부의 글에서도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 검투사의 경기를 즐기는 자를 책망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지체는 락 음악을 좋아하다 성령의 역사로 갑자기 락 음악을 들으면 귀에 고통이 생긴다면서 락 음악 듣기를 끊고 찬송가나 클래식를 듣는 경우도 목격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귀한 지체들은 성령의 역사로 악한 모습을 끊고 선한 모습으로 돌아 선 모습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영의 지배에 들어가면 그 후유증이 얼마나 큰 것을 경험하고 목격하였기에 이 글을 작성 한 것입니다.

여러 지체들에게 제 글이 분파 주의를 일으키는 글로 보인다면 ...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글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들이기에 영의 지배가 얼마나 무서운 지 잘 아실 것입니다.
스펙트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체3님께서 소개하신 글은 읽어 보겠습니다.

지체4님의 지적에 감사합니다.
제가 작성한

"선한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전도나 능력 보다 본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전도의 경우 ..증인이 된다는 말씀이겠죠.
증인은 순교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전한다는 말이 아닌 그 복음에 은혜에 감격하여 나의 삶을 모두 주님게 드리는 모습이 전도라고 전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놀라운 병 고침이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전파하는 그 모습을 말한 것이 아닌 행전에 내 증인이 되라는 모습을 두고 말 한 것입니다.

그 증인이 되는 모습은 성령의 능력으로 본질이 변화되어(정확하게 표현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십자가위에서 돌아 가심과 그 피 흘림이 구원을 의미함을 깨닫고 그 보혜사의 인도로 우리의 삶에서 보혜사께서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변화되어 순종의 자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이 너무 놀라워 증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그 역사하심..

폴 워셔의 간증에서 자신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주님의 놀라운 인도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의 이름 때문에 어린 소녀가 게릴라의 총에 맞아 죽어 가는 모습을 경험하고
그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저 주의 말씀 가지고 오지에 갑니다' 죽을 수 있는 오지에 주의 말슴 전하기 위해 갑니다' 말을 하면 난 너에게 그래 내 사랑하는 자식아 나는 너의 죽음을 기뻐하겠다 주의 부르심을 기뻐하겠다.."

변화된 삶이 전도이고
전도가 변화된 삶에서 나온 자기 고백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단지 아직 자기 성찰이나 영적 성숙이 안 된 자들에게
삶의 영적 성숙 없이 교회들의 권력 차원에서 만들어 지는 또 다른 전도에 대해 비판한 글입니다.

제 경우 이런 문제로 후유증에 힘들어 하거나 믿음을 잃은 지체들을 보았고 그런 상처 받은 지체들에게 가까이 갈 때 많은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이런 글을 작성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작성 된 디다케를 읽어 보면 순회 설교자를 검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세기 중반과 달리 그들을 의심하는 내용과 검증하는 내용으로 작성된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준비되지 정확하게 표현하면 소명받지 못한 자가 그 당시 그런 거짓 모습을 보이고 교회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기에 점차 많은 순회 설교자들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기독교 역사에서 현재에도 있기 때문에 작성한 내용입니다.

폴 워셔의 말대로 진정 성령에 인도한 말씀으로 변화가 되면
그 증인이 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예수에 미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에 미친 자들이 바로 그의 제자이고
그 말씀으로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 빛을 보았기에
악한 세력이 다스리는 이 땅에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신 전도
변화된 삶의 고백이 바로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타드의 언급은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다.
전 할 소리를 전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지체들에게 분열을 주는 모습은 좋지 않기에 이 문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습니다

지체7:

작은자님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곳에 덧글을 통해서, 작은자님으로부터 더 깊이있는 분별의 음성을 듣도록, 아버지께 쓰임받는 형제자매님들을 사랑합니다.

가장 좋은 때 가장 어울리는(?)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체3:

작은자님, 사실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그동안 지체8님의 글과 작은자님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두 분의 깊고 진지한 글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오랫동안 성령 사역을 해오면서 능력과 은사들이 강력하게 나타나면서 그에 비해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거나 미성숙함의 문제를 직면했을 때 상당한 혼란과 분노마저 느꼈던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은사적 사역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원에 20년이상 살면서 거듭 확인된 사실 중 하나는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자라는 과정에 심각한 상처나 학대(신체적,언어적,성적..등)를 받았고 그 문제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충분한 돌봄과 회복이 되지 않은 채 은사 체험을 한 경우(저는 이런 예가 여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은사와 열매-말씀과 성령의 역사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된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는 대신부님과 재인사모님(상담과 내적치유의 기름부어심이 있고 능력있는 중보기도자입니다.)및 성숙한 여러 사역자들(이번에 노스캐롤라이나의 십자가 공동체에서도 그런 분들을 여러분 뵈었습니다.)의 삶과 사역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고 1988년과 1991년에 영국의 캔터베리와 브라이턴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 참석한 경험이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두나미스펠로쉽의 사역과 훈련도 좋은 도움이 되었죠) 문제는 우리의 열정과 은사 체험이 성숙한 관계와 공동체의 영성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기름부어심이 충만한 찬양과 예배,능력 있고 깊이가 있는 말씀의 선포와 함께 강력한 은사의 나타남을 캔터베리와 브라이튼컨퍼런스에서 보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신자들이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함께 어떻게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주제로 모인 브라이튼 컨퍼런스에서는 신학자들의 모임이 따로 있었는데 대신부님은 '가난과 정의'를 위한 위원회의 chairman을 맡기도 했습니다. 개회 예배 때 컨퍼런스기간 동안 대언말씀이 있으면 제출하라는 광고가 있었는데 그와함께 '영분별 위원회'에서 분별을 거쳐 검증된 메세지들을 폐회예배 때 발표하게다고 해서 인상적이었고 나중에 검증된 대언말씀이 프린트되어 나누어졌습니다. 두나미스펠로쉽에서도 모든 가르침과 사역을 Debriefing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분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어쩌면 체면문화와 계급정신,그리고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철저한 분별의 과정이 소홀히 되고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자님의 고민과 철저하게 말씀에 비추어 검증하시려는 시도에 다시한번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다만 작은자님의 글 중에 여러차례 은사적 능력의 나타남을 일종의 '현상'으로만 축소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령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전인격적인 체험을 수반하지만(R.A.Torrey1세의 대표적인 성령론 책의 제목이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입니다.) 때로 은사적인 능력과 열매가 분리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마7:15-23절의 말씀은 거짓선지자들을 통해서도 정확한 예언말씀이 선포되고(발람의 경우),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사역이 이루어지며 많은 기적이 있겠다고 주님께서 친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도 없으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선지자들을 '그열매를 보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열매란 투명하고 정직한 재정관리,부부관계에 충실하고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며, 말에 덕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열매있는 사람들을 교회의 집사나 감독으로 세울 것을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은사적인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열매와 경건한 삶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의 사역에 자동적으로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신자의 삶과 우리 교회를 통해 은사와 열매가 함께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균형 있게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뜻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개인적으로는 대형집회나 또한 사역을 방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Lakeland사역에 주님의 임재와 함께 강력한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최종적인 결론은 아직 유보하고 싶습니다.(집회에 직접 참석한 믿을 만한 분들의체험과 증언이 저의 제한된 의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토드 밴틀리의 삶과 내면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서는 분별하기에 이르고 증언들도 엇갈리고 있습니다. (최근 뉴 와인잡지의 진 희경자매의 인터뷰기사참고) 참으로 그의 삶이 주님을 만나기 이전이나 지금 사역자가 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의 중심을 보기 보단 그의 외면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분별이 되지 않네요. Fuller신학교교수이자 영적 전쟁및 내적 치유분야의 권위자셨던 Charles Craft박사님의 간증을 들은 뒤로 강해설교자의 관점에서 능력사역자의 메시지나 사역을 분별하려는 시도는 쉬 판단으로 흐르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작은자님의 글로인해 깊은 감사의 마음이 있고 (이곳의 중요한 필자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파주의자"라고까지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은사나 성령사역에 대한 이해가 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계속 좋은 글을 기대하겠습니다.우리의 공동의 관심은 토드 벤틀리의 사역이 아니고 이땅에 진정한 AWAKENING과 REVIVAL그리고 TRANSFORMATION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체8:

지체 3님 형제님께서 나눔에 참여해 주시니,
더욱 깊이가 더해가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런 깊이 있는 나눔에서
나눌만한 무엇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저 떠오르는 대로 몇 자씩 적고,
혹 나눔에 서로 덕을 입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작은자님의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명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뭐라 자세히
쓸 수는 없겠지만,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로 곧 그것은 성경 안에서
통합되어지고 설명되어지는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여전히 성령님과 성령님의 가르침과 은사와
계시들을 성경과 분리해서 다루고 별도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
다소간 불편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균형도 아니고, 성령님이 먼저고 성경이
나중이고의 어떤 우선순위의 문제도 아니고, 성령님과 성령님의 은사와 사역들,
그리고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과 교훈들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하느냐를 본다면
자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너무도 명백하며, 기독교가 기독교 되게 하는 근본이지요.
그러므로 성령님의 은사와 능력의 루트로도 통하고, 성경으로도 통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어지는, 별개의 것 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명확하게 증거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우리가 짚어야 할 논의의 초점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생각하는 부분은, 오염과 중첩과 혼합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금 대부분의 교회와 선교 단체와 기독교 단체들이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라는 촛점을 흐리게 하고, 흐물흐물하게 해서, 결국 망가지게 하는...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고 누누이 강조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촛점을 위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흡수하고 통합시키고 연합하며,
하나되어 나아가는 어떤 그런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촛점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가짜 옷을 입고, 온갖 시각적인 것들과 때때로 성경적이라고 보여지는 것들까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영적인 눈을 서서히 마비시키는, 결국에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영적 흐름들의 상당 부분들이 오염과 중첩과 혼합을 통해서 미혹하게 하는 것들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가 영적인 거대한 현상들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두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았으므로, 이제 예수님을 위해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복음의 본질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상들과 기사와 이적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높이는 것이어야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내세우고, 기적과 치유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은사, 성령운동, 방언, 예언 이런 것들이 주제가 되어 이슈화 되어가고 조직화되더라도 결국,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통합되고 하나되게 하는 것을 중심 축에 두지 않는다면 주종이 바뀌는 것이고 결국, 본질에서 벗어나게 될 뿐임을 교회사에서 무수히 봄을 우리는 봅니다.

열매로 안다고 했는데, 좋은 열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돌리는 것임을 인식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가 바라 볼 뿐입니다. 지금의 레이크 랜드와 미국의 흐름들 심지어 유럽까지 그 여파가 들썩여지고 있는 지금, 본질에 입각해서 우리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거대한 과제들 가운데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하고 준비할 일들을 사모하면서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지체 3님 형제님의 권면처럼, 지금의 논란에 우리가 집중하기 보다는 “우리의 공동의 관심은 토드 벤틀리의 사역이 아니고 이땅에 진정한 AWAKENING과 REVIVAL그리고 TRANSFORMATION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구하는 것이라고 저 또한 믿습니다.” 다만 서로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분별하심을 지속적으로 나누면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가르침이 있기를 계속 기대합니다.

지체3:

지체8님 다시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거나 능력과 표적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은사사역은 위험하고 조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함께 성령의 기름부어심과 은사적 능력의 나타남이 없는 메마른 지성주의나 말씀사역 또한 특히 영적 전쟁이 치열한 선교지나 사역현장에서 전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Chales Craft박사님은 휘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선교훈련을 받은 후 나이지리아로 파송되어 열심히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현지 신자들이 박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의 로마서강해는 아주 훌륭한데 지금 우리마을에는 병든 자들이 많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아요. 성경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문제는 크래프트박사님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도 어떤 실제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던 사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자들이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병자들과 어둠의 영들의 공격을 받고 있던 "신자들"(!)이 평일에는 전혀 거리낌 없이 마을의 무당을 찾아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들이 선교사의 가족과 교회를 저주하면서 여러 형태의 영적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챨스 크래프트박사님은 속수 무책이었고 결국 실패감과 좌절감을 품은채 선교지를 철수하고 말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후에 풀러신학교에서 인류학과 crosscultural communication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Jhon Wimber의 강의실에서 성령 체험을 한 후 내적치유(그분 '깊은 차원의 치유'란 표현을 선호합니다.)와 영적전쟁사역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고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해서 세미나를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탁월한 성경교사이자 가르침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강사인 동시에 능력있는 치유자였습니다. 그분의 사역을 받은 예수원의 자매의 성품과 삶이 확연하게 변화된 것을 보았고 (전에 일본선교사였다가 지금의 LA의 BIOLA에서 공부하고있음) 저도 그 모임에서 분명한 주님의 임재와 함께 내적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성경과 성령의 역사는 결코 충돌해서도 않되고 대립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흔히 미성숙한 사역자들이 그런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사단과 어둠의 영들이 훼방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말씀만 강조하게되면 '말라버리게 되고(dry up), 말씀은 소홀히 한 채 성령의 능력과 체험만 추구하게될 때 '날라 가버리거나(fly up),'터져 버리지만'(explode up)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함께 구할 때 '성장하게 된다'(grow up) 그리고 성령의임재가 나타날 때 가장 중요한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증거되고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두나미스)를 받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두나미스 훈련교재"에는 '성령님과 인격성과 삼위일체','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란 chapter가 있기도합니다. 만일 플로리다집회에서 강력한 치유역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드려지지 않고 영광이 타드 벤틀리에게 돌아가고 그가 세운 센터만 유명해진다면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고, 그 집회를 통해 많은 치유와함께 치유를 주신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지역교회들이 새로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면 참으로 성령님의 역사라고 평가받게 되겠지요. 성령님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에게 실재가 되게하시고,또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거하도록 하시며,성령님은우리로 하여금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는 통로입니다. 보혜사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지체8님과 늘 함께 하시길...

지체9:

플로리다의 타드벤트리집회가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부흥 집회에 와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회개가있고, 회복이 있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주의 백성들이 늘고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곳에 몰려드는 온갖사람들(!)이 찬양하고 회복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는데 저 한쪽에서는 타드 벤트리라는 사람을 논의
하느라 성령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는 않는지...

아주 큰 병에 그려진 바다 속 그림에서 한쪽에 그려진 거북이의 그림만 보고 바다에 물고기가 없다, 잘못된 그림이다, 문제가 있다고 논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지 않으실지...

타즈벤트리라는 사람의 외모는 눈을감고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성서적이다 아니다 논의 하기 전에 전체 그림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전체를 보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시면
그 후에 말씀으로 점검하시고 또 열매도 점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실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지체3:

지체9님 플로리다집회에서 경험하신 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주실 수 있는지요? 제가 듣기로 약40개 나라에서 많은 사역자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들었고 그들의 경험과 분별력을 존중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한 주님의 임재와 은혜는 영상으로 비춰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큰 집회가 오랫동안 진행되다 보면 여러 문제점들도 드러날 수 있겠지요. 이곳에서 논의되고 있는 글들은 성령 사역과 관련해서 상당히 의미 있는 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체10:

아주 신뢰할 만한 사역자들이 그 집회를 다녀와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복음주의자들이고 건강한 목회를 하는 분들은데, 5일 동안이나
그 집회를 참석하고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처음엔 그 스타일에 저거 뭐야? 하고 마음이 닫혔는데..점점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를 누리게 되었고..정말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으로 깨달아
졌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거의 모든
사역이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능력과 복음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역시 집회에 직접가서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았으면 자신들도 그냥 그 외적인 스타일과 부분적인 내용에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여전히 그 스타일의 '자유분방함'엔 우리의 체질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 역사만은 분명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임을 확신한다고...
너무나 강력한 주님의 임재와 영광만이 나타나는 것임을 그들은 말했습니다.

지체6:

저 요즘 많이 바쁜데 사이 사이 지체3님 형제님 글 보는게 기쁨입니다.
지난 주말에
하늘의 언어에 나오는 뉴욕을 그 때 김**감독과 함께 방문했던
김** 목사님이 플로리다에 갔다가 우리 집에 왔어요.
메릴랜드에 윤** 목사님과.
그래서 다시 한번 플로리다와 토드 얘기를 잘 듣게 됬었죠.
그곳에서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님도 보았다더군요.
지금 거기엔 YWAM의 크리스티 * 선교사님이 일정을 연기하고 더 체류하고 있다는군요, 마침 신앙계 제 글 앞 칸이 그분이세요.

전 집회보다 오전에 다른 분들이 나눈 멧세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윤 목사님도 집회 주최하는 분들의 외형에는 시험거리가 있었는데
그 오전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더군요.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김** 감독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 깊이 들어가네요.
토리 패밀리의 모임은 아쉽게도 못갔습니다.
교회 섬기는 일로.

우리교회 싸이트에서 김종필 목사님 간증을 한번 들어보세요.
8월18일엔 뉴욕과 보스톤 중간의 하트포드에서 함께 목회자들이 만나요.
그동안은 한번도 안가게 됬는데 이번에는 가야되나 봅니다.

이스라엘 시절의 단순함과 달리
여기서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체5:

존 윔버가 예수원에까지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중립을 지키는 듯 보이지만 나름 벤틀리를 지지하시는 느낌이었습니다. 피터 와그너도 지지하시는지요? 혹시라도 제삼시 또는 빈들에서 존 윔버를 지지한다면 저는 그 곳에 발을 끊어야 합니다. 참고로 존 윔버는 빈야드의 설립자이자 마이크 비클, 밥 조운스, 폴 케인 등의 캔저스시티그룹을 '구해준' 인물입니다.

지체1:

전 여기와서 눈팅만 하고 가는 작은 평신도에 불과합니다만 작은자 님의 견해에 동감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여기에 머물러 있었읍니다. 어릴적 읽었던 몇몇 책의 저자이시고 평생에 몇 번 못뵈었지만 정말 존경하는 토리신부님이 계셨던 예수원의 이름이 거론되기에 더욱 관심있게 지켜보던 바입니다. 그런데 Vineyard 의 John Wimber 의 이름이 거론되는것에 저역시 NW 님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도.. 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었일까요. 윔버.. 그럼 다음 타자는 누구입니까. 피터 웨그너, 신디 제이콥스, 밥존스, 폴케인???

타드벤틀리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큰 화두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 배후에 어떤 영적인 움직임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채 무조건 은혜스럽다면 그 집회에 다 참석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겠읍니까.

feel good 하는 모든 집회에서 자기 나름대로 은혜가 된다면 그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어도 참석해서 은혜만 받으면 되는것 인지요. 그래서 캐더린 쿨만이니 베니힌이니 토론토니 펜사콜라니 레익우드니 다 쫓아 댕기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께 구합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Real Spiritual Discernment 를...

작은자:

저의 나눔이 지체님들에게 파당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게 했다면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면서 사하심을 받고 싶습니다.

지체3님의 말씀에 사랑과 이해와 지체의 보살핌을 느낍니다.
지체님을 만나지 못하였고 우리가 서로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우린 하나임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지체님에게 주신 충성과 온순의 열매를 봅니다.

매우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의 졸고에 지체들께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거나 걸림이 되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저게 은사를 펌하하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제 자신도 조그마한 은사를 받고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안에 하루 하루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없이 짧은 어리석음으로 글을 작성한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이 오직 주님의 진리 안에서 비추어
주의 진실함만이 나타나길 기원합니다.

이곳에서 은사에 대하여 냉담하게 글을 작성하므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는 저를 신비 주의자로 생각하는 지체들이 계십니다.
신비주의자가 아닌 주지주의자도 아닌 오직 그 분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말씀만 따르는 자가 되고 싶은 모습의 저의 소망입니다

진실함과 온전함을 따르고 오직 그분이 명하신 것만 이해하고
천사의 비밀과 족보의 비밀을 ..주께서 명하시지 않는 것에
더 이상 저의 생각을 두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자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저에게 자칭 성령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주의 공의를 말씀하신 분입니다.
제 자신이 성령의 사람들이라고 불리우는 분들께서 지배의 영과 세상과의 타협을 볼때 과연 성령의 역사가 이것인가 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희망을 보여 주신 종이십니다.

경건과 은사의 조화가 없는 모습에서
온전한 성령의 역사가..
성경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역사가
주의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하신 성령의 역사가
왜 이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야 하는가 하는 안타까움속에서
광야에서 주께 아뢰고 망대에서 주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저에게 임한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 분의 십자기의 비밀이 점점 커지고
저를 항상 돌아보게 만드십니다.
말씀이 저를 치고 제 자신이 통곡하면서
거짓의 모습에서 주의 진실함을 따르는 마음의 은혜를 구할 때
그 분께서는 신기한 은사를 주시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은사는 이적(세메이온)이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너희가 모이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란 그 말씀을 보이시는 이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은사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지체3님께서 말씀하신 비슷한 일화가 한국의 제주도에서 오래 전에 일어났다고 지인으로 부터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강해 설교로 유명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어느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 귀신들린 자가 갑자기 소리지르며 그 목사님께 달려들어
"내가 너에게 세례를 주겠다"하여 그 사경회가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적이고 체계적인 말씀이었지만 인간의 말이기에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자에게 그 목회자는 창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에베소에서 유대인의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다 악한영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상처를 준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악한 영은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 안에 예수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도 앞선 글에서 작성하였지만
철저하게 말씀에 비추고 그리고 영적 지체들과 나눔으로 분별을 합니다.

앞에서 타드 벤틀리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하지 않기로 하였기에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은 더 이상 안하겠습니다

지체3님 형제님께도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시면서
상황을 두고 보시는 모습과
주님의 허락가운데에서
>이땅에 진정한 AWAKENING과 REVIVAL그리고 TRANSFORMATION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에 아멘입니다!!

단지 오늘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은 은사를 의미하는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같이 생각하고 싶기에 이 글을 작성합니다.

지체 3님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이적 신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신 신학자가 있었는데
20세기 초 벤드란드(J. Wendland)학자가 작성한 기적과 기독교란 책에서 성경의 기적의 의미를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지체들에게 권하는 고전입니다.
20세기 초 작성된 학문적인 서적이지만
현재에 읽어도 왜 주의 사역에 이적이 필연적인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한국어로는 번역된것이 없는 것 같고 작년에 미국에서 새롭게 출판되었지만
오래전에 출판되어 판권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아래의 싸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archive.org/details/miraclesandchris00wenduoft )

70인역을 보면 신약의 세메이온, 즉 요한복음에서 주의 행하심을 이적으로 해석한그 단어와 대칭되는 히브리어로 오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트란 어느 물건의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 물건에 표시나 표적을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적이란 실체를 현상학적으로 분류한다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민수기 14:22 에서 사용되었고 이집트에서 광야에서 주님께서 보이신 모든 역사의 본질을 나타냅니다.(신명기 11:3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다른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 펠레나 그브라(두나미스의 의미)모페트와 달리 구원사적 목적론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 1:14절의 계절과 날과 해의 징조로 밤과 낮을 나누셨다는 말씀에서 사용되었고
9장에서는 언약의 징표로 17장에서는 할례의 징표로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는 유월절의 문 지방의 피 바름을 두고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단어는 구원사적인 목적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와 같은 의미인 세메이온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사용한 것은 이런 구약의 영적 의미를 계승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기적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각 단어들은 단지 현상이나 능력의 기원(그브라, 헬라어로 두나미스)을 나타냈지만
주님의 구속사적인 의미의 단어로 총괄하여 오트를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표적과 기사를 같이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 구약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오토트 우모프팅이라 하여 표적과 기사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사에는 여러 기사가 있지만 주의 표적이 있는 기사만 참 주의 역사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기사만 의미하는 모페트는 신명기 13장에 보면 거짓 예언자에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에서도 테라스, 두나미스.세메이온등 여러 단어가 사용되지만
요한서 기자는 구약의 영적 전통을 사용하여 세메이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요한서가 헬라적인 사고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였지만(아마 로고스 사상)
쿰란 문서가 발견되어 비교연구한 결과 요한 복음에 놀라운 유대적 전통이 있음을 최근 연구 결과들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경우에도 구약의 영적 관용어를 사용하여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이적과 기사)를 같이 관용어로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단지 바울 서신이나 공관복음에서 주의 역사를 현상적이나 능력의 근원으로 표현할 때 두나미스나 테라스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들은 어느 한정적이지 총괄적인 구속사적인 단어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신,구약은 이적과 기사를 같이 표현하는 전통을 따름니다.

즉 기사에는 이적이 있어야 주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진 다는 것입니다.

그 이적은 바로 나세렛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 주로 고백되는 성령의 인치심이고 그 현상으로 기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를 그의 제자로 만들고 아버지의 형상을 따르게 온전함과 순결과 경건을 주십니다.

본질적인 나그네의 삶과 세상을 따르지 않는 구별됨....

맘몬 즉 육신의 정욕, 거짓과 음란인 안목의 정욕, 지배의 영인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과 그분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

그런 열매가 맺어지면서
표적과 기사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선포하면서
악한 영의 세상에 대항하여 승리의 선한 싸움을 우리가 싸우게 됩니다.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두나미스)을 보이시면서
예수로 향한 구속사의 징조를 우리에게 보이신다고 생각합니다.

대 신부님께서도 성령의 역사에서 예수가 강조되어야지
만일 성령 자체의 능력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고 그의 성령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이 모든 영적 선배들이 한 성령의 목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린 그리스도의 피의 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린 죽고, 오직 그 분만 영광!!!!

지체11:

내심 바라던 바였으나 이처럼 깊고도 진지한 더하여 열띤 나눔이 될 줄은...
무엇보다 여기 빈들을 찾아주신, 이미 적지 않은 분들이
인정하시리라 믿는 바 내게있어 탁월한 교사요 동지인 작은자님과
최초로 이 화두를 던져놓고 이제사 돌아온 빈들지기 지체6님,
오랜 친구 지체3님 형제님, 새 벗 지체8님,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하는 분들께
주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이곳에서 이러한 교제가 허락된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며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관전자로 남기를 원했으나 - 본 주제와 관련하여 끼어들 만한 이렇다 할
식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주제 넘는 일인듯 하여- 이 귀한 나눔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부담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미 이 논의의 처음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피력한 바 있었습니다만 제 생각은 매우 부정적인
(타드 뿐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더 이상
참여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지체들의 권면에 따라
개인적 선입견과 판단을 유보하고 기다리던 중 작은자님의 글을 접하면서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빛과 같이 선명한(지체8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조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에 있어 신뢰할 만한 자료와(보통의 경우
접근하기 힘든)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연유일 터입니다.
이는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분파를 만들고자 함이 아님을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갈라서는
분파주의가 아니라(작은자님 또한 이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 싶습니다.
대개 교회사적으로 분파주의는 실제 신학적 교리나 신앙의 내용보다는
다른 어떤 교권 내지 영향력(영적, 육적)등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성격을
지녀왔음을...
다행히도 빈들에 선 우리는 서로 다툴만한 그 무엇이 없으므로 각자의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것은 하나의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 부르심과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어쩌면 더욱 첨예한 논쟁이 있어야 피차간에
잘못된 부분은 깍여 나가고 어떤 부분은 더욱 날카로워지고(긍정적 의미의)
견고해져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비롯된 무엇이 아닌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용도에 합당한 도구로 또한 그 분께서 바라시는 수준과 함량에
도달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진리앞에서 자신을 객관화 (내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로 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겠으며 서로를 판단(분별이 아닌)
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하겠습니다.
설사 서로 건널 수 없는 강건너 편에 마주서게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일치와 연합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서로를 인정하여 섣부른 조정이나 합의- 그렇게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 를 도출 내지 상대방을 견인해 내려는
시도는 포기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엔 작금의 플로리다 현상이 잦아들고 그 열매가 확연히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 평가 또한 우리가 가진 분별의 기준과 근거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령 지체3님 형제님께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분별의 기준을 제시 하셨지만 같은 기준과 논리로 이 현상을
되묻게 되는....
하여 진리는, 생명에 이르는 길은 어느 면에서는 필경 배타적이며 좁은 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이전 글에 언급한대로 결국 분별과 선택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으리라는...

우리가 서로의 실존을 부둥켜 안고 때로 웃고 울 수 있어도 도무지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있어 그의 삶과 신앙이 누구도 법접할 수 없는 탁월함과
진정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말씀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나 잘못이
있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옳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무엇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 글의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한 경계할 것은
러브 모니즘, 거짓 평화(일치 연합) 더하여 적극적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
자본(맘몬)주의가 세계지배체제로 강고히 구축된 지금 우리의 삶과 사역이
어느 쪽으로 오리엔티드 되어있는가?
여전히 미래는 낙관적이며 개인적 차원의 영적 고양과 치유 성공, 번영,( 이는
분명 산상수훈과는 거리가 먼 삶의 태도입니다) 집단적 승리주의(가장 위험한)에 빠져있는가?
(물론 지체3님 형제님이 말씀하신 참된 의미의 치유와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는 필요하겠지요만)
작은자님께서 맘몬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의미
규정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딴은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지요.
맘몬 곧 돈이 없이는 그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기에.
저는 경호원이 딸린 대저택에서 살면서 집회때 마다 백지수표를 돌리고
사인하게 하는 물론 현금도 바켓으로 걷는 한 성령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성령사역사들이 흠모해 마지 않는.
이 또한 판단유보 사항인지 모르겠습니다만. ^^
또한 저는 자칭 타칭 이 시대의 예언자 선지자 사도라 불리우는 이들 중
단 한사람도 이 자본(맘몬)주의 체제와 그 질서하에 편입되도록 모든
나라들을 강제하는 이 시대의 로마요 바벨론인 미국, 그 정치적 대리자인
워싱턴의 부시(아합왕)에게 가장 사단적 체제인 자본주의를 전 세계에
강요하는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아무런 명분도 없는 단지 석유강탈을 위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이라크 침략전쟁의 부당함을 고하는 단 한사람(엘리야와도 같은, 이는 최근
스토커에 게재된 inflitrato님의 비유를 차용한것입니다 )도 알지 못합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여기서 진리에 대한 한가지 격언을 여쭙고자 합니다.
호리오차 천지격리....
모든 출발에 있어 호리라도 오차가 있으면 그 결국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의
괴리가 생긴다는....
이점에 있어 제자신 또한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주관적인 믿음과는 별개의...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 더는 믿음조차도 말씀에 비추어 잘못 된것임이
분명한 내적 외적인 사실적 증거로서 입증된다면 말할나위 없이 즉시 고쳐야
할 터입니다.

종래에, 어느 시점일지 알 수 없으나 모든 것이 분명해 질 그 때에 양쪽 모두
옳다고 인정된다면 그 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거니와 반면 어느 한쪽이라도
(누구이든지 간에)올바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야 그렇지 못한 쪽을 진리 곧
생명의 길로 안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판단자이며 심판관이신 그 분 앞에 서기전에.
그 때 우리 모두 그리스도안에 한 형제로 설 수 있기를....

지체6:

지체11님 참 기다렸는데요....
기록된 말씀의 확정된 무오한 진리 안에 선 나눔.
의견이 달라져도 그치지 않을 성도의 교제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한 몸된 교회를 이루는 코이노니아를.
주 찬양.

지체12:

집에 있는 컴퓨터에서는 되지 않아 사무실에서
그동안 밀린 글 읽느라 .....

모두 반갑네요.
특히 지체11님!
9월 가족 DTS가시게 됨을 축하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플로리다...부흥"의 글을 올려 주셨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균형있게 빈들을 지켜 주시고 이러한
교제가 있음에 감사와 대단한 축복을 받은자라 생각합니다
저의 고착화된 제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보게 하여 주심은
결국 돌이키며 잘못을 회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3대째 믿는 가정의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의
목사님은 고신파 출신이셨습니다.
그런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말씀중심으로 살았고
자라면서 YWAM, C.C.C조차 너무 성령 중심이라 생각을
하여 외면하였죠.

삶속에서 너무도 상황 남동생이 축사에 능하신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었지만 저는 거절하였습니다.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어디가서 함부로 "안수기도" 받지 말라는 말과 분별을 먼저 생각했던
제 자신의 신앙적 태도였어요.

속수무책의 현상은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어떤 여집사가 담임목사님과 부목사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예배를 방해했던 일, 송구영신 예배때 표면적으로 성실했던
대학부 청년의 돌발적 행동에 대한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대처능력!

계속해서 1년에 한번씩 교회성도들의 죽음과 새신자 등록 6개월만에
자살한 사건!
위에 지체3님께서 Chales Craft박사님과 같은 경우가 아주 적절한
예인것 같습니다.

결국 담임목사님까지 병들어 입원하는 사태까지 왔음에도.....
평소 가르침과 다른 이율배반적 행동들.....
그때 성령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었지만 막상 두렵더군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없고, 성도들에게 성령받겠다고
밖으로 다니는 성도들 주의하라는 답답한 이야기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주신것이 교회와 성령이므로
스스로 강제적으로라도 사모하겠다 했지만 쉽지 않더군요.
두려움과 혹 나를 이단으로 취급하면 어쩌나? 등등....

그러다 혹 그때 남동생이 소개해 준 축사에 능한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았더라면....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그렇게 담임 목사님 의식하고 한 행동이 과연 옳았을까?
그렇다고 담임 목사님께서 얼마큼 책임감과 사랑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였을까?

우리는 자칫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나보다 나의 담임목사님께서
나를 위하여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실 것이라는....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지않음을...피부로 느꼈다.
구원과 믿음은 각자!

지금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였다. 하나님께 성령의 기릅부으심을
구한다.
그동안 많은 말씀공부와 각각의 전도프로그램을 받았지만 사실 그때그때
하나님께 구했을때 놀랍게도 지나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러한 답변을 했는지
믿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며 성령의 인도하심이였음을 고백하며 감사한다

YWAM을 후원하면서 늘 부끄럽지만 제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작은 마음임을.

지체6님께 늘 감사 드립니다. 생각과 눈과 귀를 열리게 하여 주심을.
아울러 빈들의 식구들과의 코이노니아는 저와 의견을 달리하는 지체조차
사랑하고 축복하며 글을 읽으며 기도도 함께 하지요.

지체11님,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 예수원의 북한선교학교 입교합니다.
아직 업무인수인계가 마지막날인 8월 1일 오후시간을 대체할 사람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물색중인데 여름휴가기간이라 쉽지 않군요.

지체11:

지체6님...
제게도 같은 소원이 있습니다.
말씀 곧 진리와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 그 안에서만 가능한 참된 사귐....
예수님 당시 제자들과 이후 사도들은 어느 경우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주 안에서 하나됨과 교제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관계가 피차간의 인간적 신뢰나 사역에 있어
하나의 공동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정확무오한 말씀과
그들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되었기에
가능했겠습니다. 십자가 아래서의 그것은 더 말할나위 없겠지요.
허나 아시는 것처럼 초대교회에 있어 그리스도와 교회공동체와의 참된 교제와
공동체안에서의 지체들의 진실된 사귐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로마카톨릭으로 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헬라철학에 근거한 신학과 제국교회로서의 조직과 제도로 대체되었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대신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안에 남은자들을 두셨기에... 마지막 심판의 때 까지는....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 또한 그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대부분 국가교회
형태를 띠었으며 모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성공회는 카톨릭과의 교회일치의 문을 열었고 루터교, 감리교
또한 신학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공표했으며 일부 장로교 또한 실제적으로
일치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단적인 예로 92, 94년 ECT(evangelical & catholic together)선언문
서명한 복음주의 계열의 사역자 및 신학자의 면면을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찰스 콜슨, Pat 로버트슨, Bill 브라이트, J.I 패커, 존 화이트
마크 놀, 등....... 그리고 공공연히 연합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빌리 그래함.
자 이들의 행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쩌면 이들을 다 부정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인 듯 보입니다.
마치 복음주의가 다 무너질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진 나머지
이 들을 어떤 식으로든 변호해야 될 것 같은 또 하나의 상황 논리와 불가피성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복음주의 일각이 무너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듯싶습니다. 이미 배도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위에서 말씀드린 그들이 어떠한 업적과 신뢰를 쌓아왔으며 나아가
존경받아왔던, 또한 여전히 존경할만한 영적 지도자라 할지라도
이 부분 만큼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순절 계열의 인사들 중에도
친 카톨릭적인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존 윔버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위에 거명된 모든 이들의 행보가 카톨릭안에 있는 남은 자들을 위한
고육지책이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더는 할 수만 있으면 돌이킬 수 있기를........
이 또한 분파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 누군가 말한다면 그 기준에 의한다면
저는 분파주의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입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시대를 분별함에 있어 지금은 우리 자신의 의도와 목적이 이끄는 혼합과
배도에 가까운 연합 혹은 일치가 아니라(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엇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리해야 할 터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심판의 때라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미구에 닥쳐올 환란과 핍박은 공중권세로부터
위임받은 세상권세 뿐 아니라 저들과 타협하거나 그 배후에 있는 타락한
교회로 부터의 핍박이 될 것이라는........

마지막 부흥은,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물붓듯이 부으실 진정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그 어떤 무엇보다 이 고난을 통과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진실로 깨어 근신해야 할 때라 여겨집니다. 이미 감사하게도 작은자님을
비롯한 여러분께서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에 근거한 신학 및 체험적
신앙에 의한 분별에 대해 여러 차례 다루어 주셨기에 저는 각론 보다는
총론에 가까운 부분을 다시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이 논의에서 다루어진 어떤 현상이나 구체적 논점보다 제가 바라보는 것은
그것들이 가진 근본적 배경과 방향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생각 또한 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혹 서로의 의견이 다를지라도 진리안에서 귀한 성도의 교제가 계속
되어지길 기도합니다.
설령 나중에 서로 강 건너 편에 마주보고 서 있게 된다 할지라도
어느 때에 주께로 부터 옳다하심을 인정받은 누군가가 배를 뛰어보내
줄 수 있도록.
이제야 말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주님의 마음이 절실한 때 인 듯 싶습니다.
누구시든지 제게(진리의 반대편에 있다면) 배를 띄워 주시겠지요?

지체12님...
일전에 이스라엘문회원에서 잠깐 뵙고 다시 여기 빈들에서 조우하게 되었군요.
오히려 여기서의 교제가 더욱 풍성합니다. ^^
졸고에 늘 격려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갈수록 주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시는 모습이 귀합니다.
순조로운 입교가 되길 바랍니다.
샬롬!

작은자:

지체11님의 글을 읽고 댓글을 작성합니다.

지체님들과 서로 상견을 한 적은 없진만
그리고 익명성의 웹에서 어느 정도 신뢰성의 문제가 있지만
제가 이글을 작성함은 인간의 마음에 두고 작성하는 것이 아닌
거룩한 그 분의 눈앞에서 글을 작성합니다.
오직 이 글에 저의 진실과 최선으로 글을 작성합니다.
저의 심경을 고백합니다.

지체11님의 깊은 격려 감사합니다.
지체님의 말씀에 마치 로이드 존스 목사의 뚜렷한 분별성의
영감을 접하는 것 같습니다.
작금과 같은 혼란의 모습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오랜 기간동안 망대에서 기다림....

우리는 만일 지금까지 자신의 신앙 생활에서 믿어 온 절대 가치를 초월하는 새로운 능력을 만나면 자신을 지금까지 지탱한 모든 사고를 부정하거나
반발적으로 강한 저항감을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보수 복음주의 지체들께서 은사 체험을 하면 이런 모습을 많이 보이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현재 보수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리 문제 또한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거나
혹은 불가지론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사의 능력에 말씀을 비추어 해석하거나
합리성을 찾고자 무리한 성경 해석을 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은사에 의한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월적인 입장에서 논지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의 경험을 조금 나누고 싶습니다.
(간증을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간증이 우선되는 것을 많이 경험하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저의 삶에 그분의 개입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계속 예지를 하셨지만 저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러한 신비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반이성주의자가 되고 싶지 아니해 심리적 상황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주변에 믿음의 지체들께서 저에게 주신 그 예지와 같은 예언을 하시고
점점 실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석할 수 상황의 연속적인 사건 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떨면서 상황의 결과를 주시했습니다.
선명하게 하나 하나 보여주시면서 은사의 깊은 경험을 하게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진보신학에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을 해석하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는데
확실하게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중지시키시고 말씀의 연구를 시키셨습니다.
전에는 여러 신학적 관점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에서 말씀 선생으로 연구시키셨는데 전혀 다른 관점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제가 기존에 배우지 못한 관점에서 성경을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전에 성령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성경을 읽으면 성령님의 역사가 새롭게 제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긴장하면서..
일반적으로 전에는 진보주의 신학자의 전문 신학 서적을 읽었는데
광야 생활에서 복음 주의 신학자의 글과 영적 선배들의 글을 읽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생각과 그들의 영적 공감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우선 성경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신학적, 역사적 기반으로 그리고 영적 선배들의 고백을 가지고 점검하면서 은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 가운데 특이한 것은 몬타니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몬타니즘은 단지 초대 기독교사에서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몬타니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현재 은사주의에 대한 해석을 다시 할수 지혜를 얻었습니다.
영의 역사의 경우 일반적으로 영적인 지체를 서로 만나게 되고 연결이 됩니다.
저 또한 은사주의 지체들을 만나면서 분별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명하게 결과를 보여 주셨습니다.

왜 말씀이 역사성을 가지면서 필요한지...
구별이었고 영의 상황에서 (우린 영의 상황의 일부만 이해합니다.)
우리가 미혹의 다른길로 가지않기 위한 영적 교과서였습니다.
아..생명이구나...

지체11님이 위에서 말씀하신 복음주의자들
로이드 죤스 목사가 씨에스 루이스를 만나고 그의 신앙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입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성경적으로, 기독교 전승사의 관점, 영적 선배들의 고백이나 저의 영적 자각에서 문제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왜 리즈 하워즈와 로이드 죤스 목사가 카톨릭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지..
놀랍게 교리의 문제보다 거짓 영의 지배에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의 현재 영성 운동..

놀랍게 미국의 예수 세미나(예수 세미나의 대중적 명성은 아주 유명합니다. 한국에서까지 감리교 출신의 신학자 김준우님이 주축이 된 한국 기독교 연구소는 이 예수 세미나의 서적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는유명한 기독교 출판사 하퍼콜린스 출판사의 도움으로 전문 출판사인 하퍼센프란시스코 (지금은 하퍼온으로 바뀌었 ..)에서 몇몇 영적 서적이라 하면서 나오는데
진보 신학의 이 예수 세미나의 하퍼센프란시스코에서 리차드 포스트를 주축으로 레노바레 성경을 출판하였고 레노바레운동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유명 복음주의 목회자께서 이 운동에 많이 지지를 한다고 하는데..
카톨릭이나 복음주의의 (비은사주의 계통)에서 영성 운동으로 부흥이라는 깃발아래 함께 모인 운동입니다.
그들의 방법은 계시가 아닌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나 전통적 카톨릭의 신비주의의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초대 기독교 영지주의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파들은 여러 다른 은사주의자들의 통합과 확장을 통해
초기 기독교 시절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엄청난 역사를 보이고
로마에 까지 그의 세력이 확장되어 초기 기독교의 이단의 뿌리를 제공한 것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또한 2세기 중엽에 일어난 몬타니즘과 비슷한 모양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몬타니즘에 대한 자료와 현대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최근에 조금 씩 있지만
단행본으로 나온 자료가 별로 없기에 나중에 추천드리겠습니다.)
진정한 성경말씀으로 많은 신비경험을 하거나 인도한 지체들이
진정 우리가 그분의 자녀됨이 무엇인지 말씀의 생명에서
우리의 본질들이 변함을 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다카시형제의 영적 운동외에 그리 공감하는 은사단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계시와 영적 지체들과 계시의 나눔에서
일본과 이스라엘은 매우 중요하다고 받고 있습니다.
그전에 동남아와 러시아 일부에 지금 영의 역사가 준비작업으로 강하게 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지체와 동남아 지체를 섬기시게 하십니다.

물론 현재 저 자신도 초대 교회의 다양성과 각 학파의 특성을 고민하여 봅니다.

인위적인 부흥이나 교세 확장은 전 반대합니다.
예수께서 그리고 초대 사도나 교부들의 모습에서 그들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들이 받은 복음을 지켰습니다.
그 가운데 성령께서 각 시대에 다양하게 역사하였지만
종교의 이름을 가장한 또 하나의 바벨탑을 만들어
성공과 부흥이라는 말이 주의 뜻이라고 가르치며
권력을 사용해왔습니다.
각자에게 임하신 성령의 계시로 그분의 방법과 때에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상의 것을 우리가 계획하거나 주장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영의 역사의 경우에는
날카로운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께서 각 역사에서 허락하신 그 분의 뜻을 생각하며
오직 진실한 마음과 매일 십자가에서 죽는 자기 고백을 하면서
종말론적 마음을 가지고 주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왕은 그의 마음이 앞서 주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주를 위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성령 훼방죄는 믿지 못한 지체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믿는 지체들의 물질적, 종교적 욕망에서 범하는 죄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할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망대에서 그 분의 역사를 꿈꾸며
그분의 계시의 소망을 꿈을 꾸고 삽니다.

지체8:

지난여름 웨일즈 집회때 저는 천막안에 살았었습니다.
푸른색의 개인천막을 가지고 갔었지요.

우연히 제 옆 천막에는 인도에서 잉글랜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 잉글랜드에서 은퇴목사로, 교도소사역을 하시고, 인도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신다는
연세 있는 목사님이 기거하시게 되어서, 저녁시간마다 다양한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개인교습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는데, 그는 대학에서 강사로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David Minton 인데, 마틴 로이드-죤스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던 얘기들도 해주셨죠. 같은 말씀을 계속 가르치셨다는, 몇주 지나서도 같은 본문 가지고 강해하시고 있으셨다는...
경험 있는 그리고 잘 다듬어진 연륜있는 분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저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요!

그 때 저는 저녁마다 대화의 주제를 미리 선정해서, 가르침 받을 부분을
준비해서 대화에 임하였고, 그는 매우 열린 자세로 저의 이야기를 경청하시면서도, 진솔한 가르침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제 수준에서 난제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 질문을 드렸습니다.
지난 해 4월 독일인 선교사가 무슬림 청년에게 학살된 것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해야 무슬림 선교를 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재발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할수 있겠는지를 여쭈었지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순교적 차원의 의미를 포함한 질문은 아니었음), 뜻밖게 답은 간단하게 하셨는데,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성경의 구절로 답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종말론으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팔복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는데, 무슬림과 미국이 싸운 후에 결국, 온유한 자 (그리스도인)가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그림을 주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분별은 복음의 확장이라는 측면보다는 보호라는 측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둘다 필수적인 것이지요. 씨를 뿌리더라도 보호되지 않으면, 부작용이 확산되니까 말이죠.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논의가 결코 무익한 논쟁이 아니며, 의미있는 나눔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지체11님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몇 가지 중에 저의 생각을 조금 적고자 하는 것은,
패커 선생님을 포함해서 카톨릭과의 연합노선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제가 이 문제에 대해 보는 것은 두가지 입니다.

이 연합운동의 해석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뿌리에서 볼때, 그 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과,
이런 운동들에서 주장하고 있는 부분들의 일치점에 대한 동의가 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복음의 뿌리의 순수함에서 나온 결과)

카톨릭의 문제점에 대해 이 분들이 파악하지 못할수는 없었을 것이며, 이 운동의 실제적인 지향점에 대한 부분들은 놓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이미 이 쪽 흐름과 연결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싸잡아 가지고 잘못가고 있다고 할수는 없을 것같고,
이런 예들이 혼합과 중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실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패커 선생님으로부터 저는 많이 배우고 있고,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패커 선생님도, 복음의 혼합과 중첩에 대한 부분에 대한 이해는 어떤 면에서 부족할수도 있을거라 짐작합니다. 그 원인은 가짜들도 복음의 본질을 깊게 인식하고 도구로 매우 세련되게 잘 사용하고 있고, 이것이 그분의 지성적인 측면에서 수용되어진 결과가 아닌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이상한 성령운동과 종교연합운동들 가운데, 혹 복음주의자들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흔하게 보여지는 것 같고, 그중에는 그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실제적으로는 속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요?...

아래에는 리와 스트롬의 글인데, 두 분의 글 모두에서 지금 우리가 논의를
이어가는 데 있어, 교훈이 있다 믿어짐으로 붙여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을 담아...
=================
A CHRISTIAN CIVIL WAR??
-Andrew Strom.

This week the editor of Charisma Magazine, Lee Grady, published
an article on a topic that I have very much been wanting to comment
on myself for some time. His article is called "Can We Avoid a
Charismatic Civil War?" Below are some large extracts from the
article - with my comments at the end. Friends, this is a topic that
truly concerns us all:

Lee Grady writes:
"Some leaders say the controversial Lakeland Revival is forcing us
to choose sides. But I don't believe God wants to split our movement.

"It's been more than 10 years since charismatic prophet Rick Joyner
predicted in his popular book The Final Quest that believers would
experience a Civil War in the church. Joyner's book, based on a
series of visions he says God showed him, describes in graphic
detail a turbulent conflict that redefines Christianity as we know it.

"Other charismatic leaders have echoed this theme since Joyner's
book was published in 1996. They have predicted that our move-
ment will be divided between "Blues" (those who constantly live
in the supernatural realm of dreams, visions and miracles) and
"Grays" (those who rely more on their intellect), and that the Blues
will win and usher in true revival as champions of the Holy Spirit's
power.

"Even in early 2008, before the Lakeland Revival erupted in Florida
in April, some charismatic prophets were declaring that a great
rift would divide those who believe in "the glory realm" and those
who have a more conservative, left-brained approach to their faith.
When God TV began its nightly broadcasts of evangelist Todd
Bentley's healing meetings in Lakeland, the Civil War prophecies
reappeared overnight on hundreds of blogs and e-mail blasts.

"I'll admit I was not paying too much attention to these Civil War
predictions 10 years ago. But I was jolted into reality in May after
I wrote an online column in which I raised honest questions about
some of Bentley's teachings and techniques. Even though I
celebrated his passion and zeal, and praised God for the healings
that were reported in Lakeland, I was immediately branded a revival
critic and banished to the Gray camp.

"I became the bad guy because, by asking questions, I was
'relying on my intellect.' To those in the Blue camp, my skepticism
made me an enemy of the Holy Spirit and all things supernatural -
even though I believe that all the supernatural gifts of the Holy
Spirit are for today!

"I tried to laugh this off at first. Surely, I imagined, my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do not really think it is wrong for a
Spirit-filled
believer to test the spirits (which we are instructed to do in 1 John
4:1), discern truth (see 2 Pet. 3:17) or evaluate prophecies and
angelic encounters (see 1 Cor. 14:29, Gal. 1:6-8).

"But now I realize that some people really want a war. They want
the charismatic movement to split right down the middle. They
imply that all those who do not embrace 100 percent of the current
movement in Lakeland are "old wineskins" that cannot be used by
God in the coming revival.

"I can't even describe how much this hurts because I love people
on both sides of this conflict. I love the Blues and the Grays, along
with every other color in the body of Christ. I refuse to believe that
God is trying to split us. Division is the devil's work.

"I want to plead with everyone in our movement to reconsider the
whole Civil War scenario. Instead of rattling sabers and stockpiling
gunpowder, maybe we need to take steps in the opposite direction:

1. Let's accept one another...

2. Let's admonish one another....
[B]ecause I embrace Todd Bentley as my brother in Christ, I must
take a higher road even if I don't agree with his prayer methods or
his claims regarding angels. Anything I say, even if it is corrective,
must be said in love (see Eph. 4:15).

3. Let's pray for one another (see James 5:16). Jesus prayed that
we would be one. There is no record of Him praying that we would
split over doctrine. So why in the world would any of us hope for
a Civil War?

"Please pray for Bentley - and for the leaders who are speaking
into his life during this season. And pray that the church will not
only experience genuine spiritual revival but also true unity. Let's
work out our differences, support one another's ministries and
focus all our efforts on one common goal: To tell a lost world about
the love of Jesus." [~Source: www.fireinmybones.com]

Andrew Strom replies:
I am just as strongly against a "Christian Civil War" as Lee Grady,
but there are certain things in his approach that I just cannot
agree with. Back in 1996, when Rick Joyner came out with his
Civil War prophecy I even wrote an article on it entitled "WHY I
OPPOSE the CIVIL WAR". (-A pretty outdated article now, but I
am just as opposed today as I was then). I have never believed
in such a thing - especially when it was essentially a call for the
Prophetic/Toronto camp to try and "drive out" those who oppose
them - right out of the church. It always seemed an utterly ill-
advised and disastrous course to me - to put out a call like that
just because people are opposing or questioning the "manifestations"
that you are involved with. Is that any excuse for trying to "drive"
them out? -I felt quite sad and shocked by it.

But Lee is right. There is a lot of "aggression" around right now -
and it always happens when these kinds of movements come
along. People get aggressive and nasty on both sides. I noticed
it with Toronto and I am noticing it now. Suddenly everyone wants
to "bash" each other. They want to make it "personal". I am not
into this either - not at all.

There is nothing wrong with asking questions or "testing the
spirits". In fact we are COMMANDED to do this in Scripture - "for
many false prophets are gone out into the world." (ie. Because
they did not 'test' the spirits - 1 John 4:1). But I believe we can
do this without becoming harsh or demeaning or 'personal' about
it. We can simply bring out the facts and let them speak for
themselves. We don't have to get "nasty" at all. This is one of the
biggest problems I have with the 'heresy hunters' that are all over
the Internet. There is often such a harsh, sarcastic, "personal"
tone to much that they write - and they seem almost eager to
dredge up every little piece of "dirt" that they can. It becomes
literally a "mud-slinging" contest - harsh and ugly - without any
of the fruit of the Spirit demonstrated at all.

Do I want to be attacking Lakeland or Todd Bentley in that way?
No - I want no part of it at all. I believe we can raise the issues
and bring forth the facts and "test the spirits" without resorting to
any of these tactics. And our battle is not with flesh and blood
anyway - it is with spiritual deception in "high places". So I am
not at "war" with Todd Bentley. I will be as polite and reasonable
as I can - while still putting forth the TRUTH about what I regard
as dangerous heresy.

And here is where Lee Grady and I begin to differ. You see, in the
Bible, heresy and deception and "seducing spirits" were always
treated as deeply serious and horrific things. With serious deception
it was never a case of being "lovey-dovey" or making mild 'back-
room' corrections. You will notice that in Scripture they always
corrected large-scale public deception IN PUBLIC. Sometimes
Paul would even name names in public - or issue public rebukes.
If there was a private offense or a personal issue between brothers -
that was different. If at all possible, you deal with personal offense
privately. (Matt 18). But when there is large-scale deception that is
spreading, you have to speak out boldly, publicly and strongly -
because the health of the entire body is at stake. This is clearly
what we see in Scripture. And "lovey-dovey-ness" was out the
window! Paul and the apostles and Jesus Himself were very strong
in publicly rebuking these kinds of people and their practices -
whether they were believers or not. They did it for the health of the
whole Body.

Sadly I get the feeling that Lee Grady may be whimping out a
little bit on some of this. It sounds so loving and "tolerant" to
speak of unity and say things like 'Can't we all just get along?"
But this is not true biblical unity - which is based on TRUTH.

The fact is, Jesus said, "I have come not to bring peace but a
sword." There is sometimes a division or separating that occurs
over major issues which is unavoidable - and in fact can be totally
necessary. There are some things that God does not WANT
connected with His body! A separation is not always bad. It
happened with Jesus all the time. He came to bring a "sword"
after all - and He promised that such things would happen.

So I can well believe that there may come some kind of separation
in the Charismatic movement. But let it not be because we
ourselves are trying to "drive" people out or slinging mud - or
engaging people in ways that are harsh or bitter. Let us preach
the truth in love, and if there is to be a separation, let God Himself
bring it about - not us through strife or bitter contention. My
friends,
there is a way to conduct ourselves in these things that should
speak volumes to all - even the opposers. Let the spirit in which
we do things be truly godly. Amen?

This issue is being discussed at-
http://www.revivalschool.com

God bless you all.

Andrew St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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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ATOR:
Andrew Strom,
PO Box 21-904,
Henderson,
West Auckland 0650,
New Zealand. 08-07-10

지체9:

플로리다의 성령집회의 다른 이름은 ‘변화’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

이번 플로리다 성령집회는 갑자기 어느날 일어난것이 아니라
김** 감독님이 쓰신 ‘부흥의 여정’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일어난 것입니다.
지식은 풍부하나 변화와 능력없는 교회들과 온갓 우상들을 섬기는 현시대,
그리고 마지막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타드 벤트리라는 특별한
사역자와 이적과 기적이 있어야만이 되기에 시작하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착해서 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여러가지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 내용을 지금은 다 올릴수가 없는데 간단히 이곳 일정만 알려드려도
도움이 되실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원하시면 지체3님 싸이트나
이멜을 주시면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일어난 일들을 알려드릴수 있을것 같습니다.

오전 10시에 이번 성령운동이 시작된 ‘Ignited church’에서 여러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교체로 인도하는 집회가 1시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1시 부터 ‘City taker’미니스트리에서 인도하는 특별전도 집회가 있고
그후에 3-4명이 조를 만들어 전도를 나갑니다.
저녁 집회는 물론 이지만 특별 전도훈련과 전도과정에서도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집회는 7시 부터 보통 12시넘게 까지 진행됩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질서 그리고 말씀안에서의
진정한 신사도행전의 모습이 있습니다.

플로리다 부흥의 모든 촛점은 ‘예수그리스도, 말씀, 영혼구원, 능력, 부흥의 씨앗을 각자 가지고 돌아가 불을 지피는것등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병치료도 하고, 기적도 있고 , 천사도 가끔얘기하고, 예언도 하는데 여러 기적들과 이적들은
그분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임을 이곳의 사역자나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레바논, 독일, 영국, 중국, 말레지아, 케냐, 사우스 아프리카…
전 세계에서 와 있는 선교사, 사역자, 평신도들…
차나 텐트에서 잠을 자면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
처음만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을 오픈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들…
온갓 병 낫기를 소원하며 믿음 하나로 이곳에 와 병이 치료되고
새로와진 사람들, 치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알코올, 약물중독과 여러가지에서 해방되고 인생이 바꾼사람들…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사람들…
‘타트 벤트리’가 아닌 다른 분이 인도 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
그리고 구경꾼과 자신의 유익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는 치유되고 변화 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김** 감독님이 플로리다의 부흥의 여정에 대해서 다큐먼트리를 하실 날이 혹시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혼자 해봅니다...

지체3:

작은자님과 지체11형제님 두분 모두 복음의 본질을 고수하며 일절 타협하지 않으려는 신앙에 대해 다시한 번 존경심을 보냅니다. 그리고 작은자님의 철저한 말씀 중심의 접근이 저에게 늘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 주의나 성령운동을 사도행전8장의 마술사 시몬이나 몬타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이 시작된 배경은 제도화되고 종교화 되어버려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에 초대교회의 오순절의 역사가 오늘날 다시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한 분들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역사이고 그것이 주류 교단과 복음주의 개혁교단에 까지 영향을 주고 교회를 갱신(Renewal)하며 선교에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제도에 틀에 갇힌 나머지 얼어 붙은 교회에 새롭게 불을 붙이고 생수의 강을 힘차게 흐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령님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한 일들이 오늘 나와 우리에게 '실제'가되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술사시몬은 내면의 악독함(bitterness)이 충만하고 불의에 매인 채 (회개함이 없이)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인물로 샤마니즘적인 사역자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사도행전8장에서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할 인물은 집사 빌립이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의 기쁜소식을 전하면서 표적과 큰 기적을 잇따라 행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술사 시몬을 굴복시켰습니다.(저는 이내용을 볼 때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되고 성령의 권능으로 기름부음받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김 금화씨와 같은 무당들을 전도할수 있고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미혹된 사마리아와 같은 태백지역을 흔들고 주의 복음과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작은자님은 때로 '발람의 길을 좇는' 부패한 사역자들의 사역과 은사주의 혹은 오순절주의적 사역을 동일시하는 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물론 부패한 인간의 죄성과 미성숙함으로 인해 능력사역에 위험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믿음이 있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헌신이 있으면 우리의 사역에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고 혹 때로 우리가 실족할 때가 있을지라도 연단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 성숙한 사역자로 빚으실 것입니다. 카톨릭과 복음주의및 은사주의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서 연합과 일치를 구하지 않을 때 조심해야 하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 (정치적,제도적)연합을 도모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카톨릭 성령운동그룹안에 있는 분들 중 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성숙한 신자들을 여러분 만나고 교제한적이 있습니다. 찰스 콜슨은 지역사회에서 반낙태운동(pro-Life Movement)이나 기독교적 가치관을 의한 사역을 할 때 초교파적인 연합과 동역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카톨릭과도 함께 동역할 것을 언급한 칼럼을 읽고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과 영국및 북아일랜드의 공동체들을 방문하면서 영국과 유럽의 역사에서 신,구교 간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것에 대한 신자들의 회개와 화해의 움직임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떼제공동체나 특히 북아일랜드에 카톨릭,성공회, 장로교 간의 서로 존중하며 성령안에 화해를 추구하는 신실한 영적 지도자들과 공동체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권주의나 통제와 지배의 영(spirit of dominion&control)은 은사주의 뿐 아니라 모든 교파의 문제이고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심각한 기도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체6님의 "내 신앙 가운데..."란 글의 댓글에 Bigbear님이 인용한 로렌 커닝햄목사님의 좋은 글이 있군요. 그리고 klaudia님의 글도 참 좋습니다. j지체9님 귀한 체험기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개인 사이트는 없고 E-mail: ***@***** 혹은 ****@gmail.com으로 소식주시면 됩니다. 지체8님의 글과 함께 소개해주신 Lee와 Strom의글 깊이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자:

지체3님 형제님의 나눔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은사주의와 성령운동에 대한 저의 논지에 대하여 저의 표현 부족으로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이 글을 남김니다.

저는 은사 주의와 성령 운동을 같은 자리로는 보지 않습니다.
성령운동에 은사주의가 포람될 수 있지만 은사주의가 다 성령운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 사실은 잘 증명하여 준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개인이야기를 위에 적은 이유는 저의 글의 문체에서 성령의 운동에 의한 말씀 해석을 무시하고 교리 주의나 이성에 의한 성경 해석을 강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또한 이런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지체님들에게 저의 신앙의 기저를 알리는 마음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그 내용은 사도행전의 바울에게 임한 역사와 달리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의 서신서에서 보이는 바울의 신앙의 색과 행전에서 서술된 바울의 모습에서 많은 차이점을 느끼기에 바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의 사역을 해석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바울이 인용한 성경 말씀에 대해 구약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아니 한 점이 많이 있고 구약에 없는 말씀도 인용하기도 하였기에 더욱 바울 특유의 논지의 해석을 사용한다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특히 그가 사용한 많은 인용은 당대의 헬라 철학에서 사용된 어구나 전승된 이야기를 그의 복음 변증에 많이 사용하였음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이런 유기적 다양성을 주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변증을 위해 상황에 따라 그의 백성들이 사용하시게 하십니다.
당시의 헬라 페러다임에서 바울의 변증은 당시의 사고의 시대상을 반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모든 변증의 중심의 인자는 성령의 가르침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께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다는 그 가르침은 단지 기억의 회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각자 증인의 삶에서 삶의 다양성에서 주님은 그들의 기질을 인정하시고 각자의 다양성에서 성령의 통일성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시게 하셨습니다.

저의 말씀에 대한 해석의 방법 또한 저의 삶의 모습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마술사 시몬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의 일차 전도에서 살라미에서 만난 거짓 예언자 바예수의 이야기와 성경 말씀에서 구조적인 대칭적인 관계를 가지는 말씀입니다.
이는 누가의 마리아의 찬가와 사가랴의 예언에 대한 누가의 신학적 의미의 저술 구도입니다.
악한 세력과의 투쟁의 선포의 사건의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많은 교부들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에서 교부들의 시몬에 대한 해석을 생각하는 장이 아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그에 전승사는 우리가 생각한 이상 매우 놀라운 역사를 한 자입니다.
단지 샤머니즘을 행하는 자로 국한 시키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의 선포나 기적 행위에 대하여 많은 교부들은 그를 초기 히브리 영지주의 (사마리아 출신)인도자로 묘사합니다.
단지 샤마니즘 행위자가 아닌 영지주의 뿌리의 대부로 그를 지명합니다.
그의 세력은 많은 제자들과 학파를 만들고 (그렇기에 그는 후에 스스로를 메시야로 자신을 표현 합니다.)
그가 이런 세력을 만들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임한 강한 능력과 그가 선포하는 내용에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행전의 7명의 선택자중 한 명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에 대하여 경고 합니다.
그는 후에 니골라당의 창시자가 됩니다.
행전에서는 니골라의 선택에 대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런 니골라가 왜 악한 세력이 되었을까요?
니골라의 어원적 의미와 초대 교부들의 말씀을 읽어 보면 그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니골라는 “다스림이나 정복을 의미”하는 니카오와 일반 교인을 의미하는(원래 일반 백성의 의미)의 라오스의 합성어입니다.
즉 그 의미는 “신자들을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주의 사람에게 주께서 권위를 주심니다. 그렇지만 그 권위는 정복의 의미가 아닌 섬김의 의미입니다.
현재 은사운동자들의 모습이나 주장을 보면 이는 성경의 권위와 다른 의미입니다.
이는 니골라와 시몬의 생각과 주장과 비슷합니다.

시몬에 대한 행전에서 가르침을 읽어 봅니다.
행전 8장 19절에 왜 시몬이 권능을 받고자하는 모습을 증거합니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여기서 권능이란 단어는 헬라어 엑소우시아 (현재 축사를 말하는 엑소시즘의 어원)
입니다 . 정확한 의미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라는 의미입니다.
시몬이 성령을 받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지배의 영이 모든 교파의 문제라고 언급하셨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죄입니다.
주님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요한 일서에서 모든 영의 시험을 강조한 말씀은
영적인 가르침과 또한 이런 지배의 모습을 (분파가 아닙니다.) 주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을 받고자한다는 말은
돈이란 단어 그레마는 마가에서 풍부함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는 맘몬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맘몬의 세력을 가지고 주의 능력의 역사를 해석을 하려는 모습”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현재 미국의 은사운동에 대해서 이런 맘몬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많은 은사를 구하는 그들의 중심은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요구하신 물 세례(이는 말씀에 의한 죄의 고백으로 인한 성결 의식)가 아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이 아닐까요?

은사운동의 많은 선포에서 맘몬의 추구함과 이생의 자랑을 주님의 은혜의 결과로 선포하는 것을 너무 나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빈곤이 선한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빈곤이나 풍부함을 초월하는 힘..바울이 말한 주의 능력입니다.
즉 환경의 영향을 초월하는 힘..리힘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의 본질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

이 모토…복음주의나 은사주의에 너무나 깊이 침투한 이 모토…
결국 변질의 맘몬입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말한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질책에서

악독은 히브리서 12장 15절의 쓴 뿌리의 “쓴”이란 의미의 피크리아입니다.
악독이 가득하다”란 의미는 쓴 열매를 말합니다.
섬김의 모습이 아닌 지배의 악한 모습의 근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
의에 반대되는 것…
주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이 불의에 대한 영적 ,사회적 해석을 아모스와 호세아는 각기 성령에 의해 외쳤습니다.

맘몬과(바알)과 섞임의 음행..그리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모략에 대한 공의의 질책..이 모든 것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은사 주의자들의 많은 말씀 선포가 선지자들의 이 눈물의 외침에 얼마나 접근하는 지요?

시몬이 후에 많은 신자들을 오도한 것은 기적의 역사로 풍부함을 제공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에는 자신의 영적 지배에 대한 악독이 그 깊숙하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 같이 예수의 복음을 외치지만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몬타니즘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하기에 여기에 단지 몇 줄로 언급할 수 있을 수 없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몬타니즘은 초기 기독교의 영적 운동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운동에 대한 고민은 현재의 영적 운동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몬타니즘의 그 근본의 문제 역시
지배였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의 시험은 지배를 물리치시고
오직 주의 뜻만 실행하신 순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그 시험은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떨어지는 자의 몸을 천사가 구해주면
그가 메시야란 전설이 일반 대중에게 많이 퍼져있었습니다.
에수께서 당신이 메시야심을 선포하시지만 초기에는 비밀로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탄이 시험한 것은 바로 주님의 때를 거슬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너는 메시야가 맞다! 그 증거를 보여라! 그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널 따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때를 주님의 손에 두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오직 철저하게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 사탄은 유혹을 하였지만 그분은 주님의 계시에 순복하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분입니다.

순종에 의해서….
그렇기에 바울은 그 십자가…
구원과 순종의 징표인 그 십자가를 증거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느 기적이 임할지라도 그 안에는 그 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비밀은
물과 성령의 세례만으로 알수 있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물의 세례(회개)와 성령의 세례
이 두 세례가 없이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저는 성령 운동을 주장하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령 운동은 구약이나 신약의 말씀 또한 초기 교부들과 신앙의 참 선배들의 증거에서 검증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성령께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체6:

저는 성령운동을 주장하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령 운동은 구약이나 신약의 말씀 또한 초기 교부들과 신앙의 참 선배들의 증거에서 검증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성령께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은자님은 아직 지체3님 형제님이 왜 또 다시 쓰고 있는지의 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부수시기 원하는 자아를 제가 보기 전까지 저도
그것이 전부인 줄 일았습니다.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검증하는 역사성.

그런데 그것이 안전하고 확정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형제님은 받지 못할 겁니다.

주님은 내게 세례 요한의 당시에 내가 살았다면 요단강의 요한을 따라갔을 이유룰 대보라고 물으신 기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전 말씀에 붙잡혀 주를 바라볼 때였습니다.
어쩌면 청년 사울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기록된 구약의 말씀과 족장(교부)들의 역사성이 전부라고 여기는 이가
바로 내 자신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리아 산 위에 세워진 성전이 아니라,
(적어도 문자 그대로는)
요단강에서 죄사함을 주는 세례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데반을 죽일 때 옆에 있었던 청년 사울의 신앙처럼,
내가 믿는 족장들의 전통을 따라,, 무엇보다도 기록된 구약의 정경을 따라
세례 요한에게 돌을 던질 자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 요단강에 나아가 청년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자가 아니라
광야에서 그에게 임했다는 레마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구약성경으로 대적할 자였습니다.

작은자님은 아마 완전무오한 정경 밖의 일이라고 생각할지요..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요단강에 나아가서 자기 죄를 자복한 자들은
성경을 안다고 여기던 이들도 아니고
조상의 하나님을 따르는 이라고 스스로 여기던 이들이라기 보다
그들은 성경을 들어도 들어도
스스로 알 수 없다고 여기던 낮은 자들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성경만을 따라 성령의 역사를 따르던 이였습니다.
왜 신복음주의라고 부르던 존 스토트와 결별해야만 해던 로이드존스의 후예라고 생각하던 스스로 복음주의자 사울이였습니다.

지금 내가 기록되어 역사에 확정된 말씀을 넘어서서
Signs and Wonders를 따르는 이라고 보인다면
정말 오해하는 것인 줄 알 수 있을까요.

이 글 자체마져도 작은자님의 관점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참 슬프네요.
결국
사울에게의 다메섹 체험이
야곱에게의 얍복강 체험이 없다면
우린 여전히 십자가로 손상받지 않은 옛 아담의 지성으로
성경을 탐구하는 지성의 순례일 뿐입니다

지체11:

작은자님...
저 또한 오랜 기다림 가운데 있었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을 지나 좁은 문으로....
허나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즐거운 일인지요.

다음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지체들과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절대 진리(결코 포기될 수 없는)와 상대적 자아(포기되어져야 하는)
와의 긴장과 갈등은 한 개인의 실존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각 지체들 간의 관계성 안에서와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개인적 차원의 그것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위에서 쓴 것처럼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과
부활의 증인이 생존했을 당시의 초대교회 안에서는 각자의 출신 배경과
관심사 및 강조점에 따른 서로간의 시각과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 됨에 있어 큰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과의 참된 생명의 사귐 가운데 있기만 하다면.
허나 가룟 유다와도 같은 이해 할 수 없으리만치 매우 독특한
예외적인 경우(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조차)뿐 아니라 당시에도
갖가지 이단이 존재했고 작은자님께서 언급하신 몬타니스트들도
그중의 하나였지요. (저들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 듯도 합니다만. 기실 카톨릭교회의
교권체제가 확립되기 전의 신실한 교부들에 의한 것이 아닌
로마 카톨릭에 의한 이단 시비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교부라는 말자체가 카톨릭적 용어이며 당시 카톨릭교회에 반대했던
로마교회(바울이 개척한)의 지도자들은 대다수 사막으로 가거나(사막교부)
다시금 지하교회로 들어간 듯 보입니다. 일부 변절한 지도자들이
로마제국의 회유 또는 강압에 의해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임으로
로마교회 중간에 카톨릭(바벨론 종교의 영으로서의 보편적-절대적이 아닌-
이라는 의미의 이는 카톨릭이 다원주의를 거의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듯이
오늘날 영지주의인 뉴에이지와도 연관이 있습니다)이라는 개념을
을 끼워 넣음으로써 지금의 로마카톨릭교회가 성립된 것으로 봅니다.

결국 의견이나 생각(신학 혹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영에 속한 따라서 생명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2)

그런데 성도들간의 코이노니아 곧 교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공동체성이
증발된 로마카톨릭교회 이후 개혁교회(시작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에서의 문제는 주로 의견과 생각(교권, 영향력등의 단지 신학이나 교리만의
문제가 아닌)의 차이(초대 교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분리의 이유였으며 근래에 와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진정성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엄존하고 있고 더하여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아니지만 영의영역은 분별이 쉽지 않은 다시 말해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이 서로 뒤섞여 전체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교묘한 혼합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체8님이 언급한 오염과 중첩과 혼합이라는 심화 과정을 거친
결과이지요. 혹 그 과정을 염두에 두신 것인지 모르겠으나 퍽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처한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영적 환경에 기인한다고
여겨집니다. 로마가톨릭은 여전히 모교회이자 지체3님 형제님 표현대로
주류 교회로(이글을 쓰던 중에 지체3님 형제님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귀한 권면의 말씀 감사합니다.)서의 절대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잠시 불화하여 집을 나온 개혁교회는 다시 회개하고? 영적어미의
품으로 속속 귀환하고 있는 중입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개혁이란 다만 부패한 교황권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교회 자체의 부정이 아닌 이른바 태생적 한계로 인한 당연한 귀결로 보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유용한 영분별의 표지가 하나 있다면
누군가의 카톨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이 어떠한가라는 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처음부터 카톨릭교회에 편입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후예들로서의
재세례파와 개혁교회 안에서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참고로 로이드 존스는 로마카톨릭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음녀 바벨론임을
또한 이 음녀교회는 한 번도 회개하거나 변화된 적이 없다고 그의 설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카톨릭을 변호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저들로부터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성도들,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초대 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일갈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리 그래험 과 존 스토트의 동역제의가 있었으나 카톨릭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함께 할 수 없음을 단호한
입장 표명과 함께 거절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자
(근자에 회자되고 있는 복음내지 신복음주의가 아닌)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제가 언급한 포기될 수 없는 절대진리와 상대적 영적자아의
일치의 드문 예라 하겠습니다. 왜 그토록 드문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역시 좁은길, 좁은문으로....
문제는 우리의 영적자아가 다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배경, 개인적 성향에 따른 입장과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지체6님,목사님의 경우처럼(저 또한) 변화 혹은 성숙의 과정 안에 있기도 하겠지요.
지체3님형제님 말씀대로 카톨릭안에 또한 성령 운동그룹안에도 신실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든 남은자들이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명백히 반성경적인 카톨릭의 교리, 가령 교황 무오설이라든지
다원주의적 경향, 마리아 무염시태, 몽소승천설등의 마리아 숭배사상을
여전히 따르면서 동시에 신실하기도 하다면 ‘남은자’라는 호칭은 부절절한
무엇이 되겠지요. 그럼에도 진정한 남은자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연합이나 일치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러나 바티칸을 중심으로 한 교권 세력들과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하고
매우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하리라 봅니다.
초대 지하교회에서는 누군가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길게는
3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그 신앙과 삶의 진정성이 공동체안에서 확인 된
후라야 받아들여졌습니다. 삶으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뢰나 호감등은
자칫 피상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남습니다. 또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지체8님이 말씀하신 영을 다 믿지 말라는 가르침도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저들로 하여금 그 음녀교회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터입니다.
그러면 바깥에서 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 또한 쉽지 않은 난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위에 언급한 ECT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체8님이 말씀하신대로
한 시대를 이끌어온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카톨릭의 문제를 모를리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면 교리나 신앙외적인
무언가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아니면 초대 로마교회의 일단의 지도자 그룹처럼 변절 했을 가능성도...
그것도 아니라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위에서 말씀드린 거기에 남은 자들을 위한 고육지책으로서의 결단이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난삽한 상황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 진리라는
‘오메가 포인트’(늘 그 지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문제는 그다지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있겠습니다.
진리는, 참 생명은 오염되어서도 섞여있어서도 안되겠기에.
우리 각자의 여전히 뿌리 깊은 죄성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성령의 문제도 같은 원리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어떻게
다를 수 있으며 반목 할 수 있을는지요. 성령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한다 하셨으니 말씀에
즐겨 순복하는 영이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다만 말 할 수 없는 은혜로 말씀과 성령을 받은 우리가 이를 혼잡케 하고
더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마치 자신의 전유물인양 독점, 오용 및
남용해온 것이 부끄러운 교회사의 한 부분이었음을 또한 인정해야겠습니다.
지금의 우리라고 해서 예외 일 수 없겠지요. 말씀을 맡은 자들과
성령의 은사를 덧 입었음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터입니다.
오늘 강단(적절한 용어가 아니지만)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과
작금 일어나고 있는 소위 영적 현상들이 말씀과 성령 두 분께로부터
옳다 하심을 인정받을 수 있을는지.... 특히 어느 땐가부터 이 시대의 선지자,
예언자, 사도를 자처하는 이들의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저는
긍금하고 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신학교가 그러하듯이.
작은자님께서 누차 언급하신 맘몬, 이 지배의영이 세계지배체제의
머리로서 뿐 아니라 그 아래 하부구조로 편입된 교회와 사역자
(복음주의권 및 은사주의를 포함한 모든)들에게 까지 주인노릇
하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과연 그들은 이 맘몬의
체제하에 산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가?
(이는 저 자신을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 사탄의 체제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기는 한가?
아니 오히려 이 체제로부터의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교회.... 거기서도 상층부에 있는 지도자들...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의 통로?로서의.
지금 은사주의 일각에서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시기에 사역사들을 통해서 소위 ‘부의 이동’이란
미명하에 엄청난 돈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한 돈이 걷히기 위해서는 예의 이적과 가사가 필요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내부에서 조차 수뇌부의 투명성이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하나님께서
돈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가진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맥락에서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이 모두 맘몬에 오리엔티드된것은 아닌지....
너무 길어진 듯 하여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지금껏 크고 작은 수많은 부흥운동이 있어왔습니다만 큰 그림에서 보면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는 성경적 현상입니다.
승리주의자(카톨릭, 캘빈주의자들을 포함한)들이 볼 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작금의 플로리다현상이 나중에 부흥 운동으로 인정받게 될지
그저 하나의 현상, 혹은 미혹의 무엇이 될는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겠습니다만.
그 안에 참된 진리와 생명이 없다면 모든 것(교파를 초월한 일치와 연합,
막대한 재정, 전도의 열매, 치유, 영적지위...)을 얻는다 하더라도 다 잃게 되는
것일 수 있음을........

지체8:

제가 조금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의 논의가 무식한 변론따위가 아님을 믿습니다.
이 부분은 여기에 동참하며, 글을 쓰고, 읽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우리의 나눔 가운데 빚어지는 시각의 차이점은,
어디까지는 접근방법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것이지,
복음의 본질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이 또한 우리 모두가 깊이 동의하는 부분이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의아해 하고, 또한 나눔들 가운데, 발생하는
접근 방법의 차이점은, 지식의 수준과 신앙의 깊이에서 기인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을 훈련해 오신 가운데 빚어진, 독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레이크 랜드의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레이크 랜드를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동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여정이며 과정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이 다소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므로, 저는 우리의 논의 가운데,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개인적인 체험들을
겸허하게 나누되, 이것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거나, 절대시화하려는 오류들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감히 적는다면, 위의 댓글 모두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어느 것 하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는 줄 쉬 파악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순례의 한 여정에 동참하는 동역자로서 그 노정의 다른 지점에
있을 뿐이지, 우리가 앞서 있다거나, 더 많이 알고 있다거나,
내 생각이 전부라고 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진정 이 논의들은 배설물이며,
우리는 논의를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겸허히 배우고,
나눔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나눔들은
우리 각자와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풍성함을 부여할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글을 마무리 하면서, 네 가지를 적는 것은
1. 글로써 나누는 부분에서 생기는 한계를 생각해야 하고, 저와 같이 익명으로
글을 나누는 분들이 더욱 조심스럽게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2. 우리가 논의과정 중에, 우리의 마음이 닫혀지고, 상처입은 부분들이
성령님의 은혜로 다스려지기를 기도하며,
3. 우리의 논의의 촛점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통합되고(향하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4. 저와 같이 레이크 랜드의 일들을 여전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현장의 소식들의 객관성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 현장을 경험하며,
성령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깊이 품어주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체5:

지체 6,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습니다만..
성경에 없는 것과 성경과 배치되는 것은 다르지요.
그리고 성경에 배치되지 않더라도 성경에 없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결별했던 존 스토트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윗 댓글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에도 잠깐 언급하셨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잘못된 것은 존 스토트가 아니라 로이드 존스였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해서요..

지체3:

지체8님, 이길고 긴 논의에서 자칫 긴장이 커질 수 있는데 진지한 글과 귀한 자료와 함께 Peacemaker역할까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스콧틀랜드에서의 학업에 보람과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체12님 제가 뵌 적은 없지만 이번 여름 삼수령목장의 노동학교에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저도 "공동체와 북한선교"란 강의를 맡게되어 가면 인사드리겠습니다. (오실 때 긴 팔옷과 튼튼한 신발이 꼭 필요합니다.밤과 새벽에 제법 추울 때(!)가 있습니다.) 작은자님 다시 귀한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성경말씀과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시고 강조하시는 것은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만 은사 사역과 영성에 대한 작은자님의 이해는 저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말씀선포와 함께 치유와 축사사역이 동반되었고 주님은 이능력(두나미스)과 권세(엑수시아:exousia)를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impartation) cf.눅9:1 오순절이후 사도들과 "믿는 자"들의 사역에도 이능력과 권세는 계속되었고 이일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 열방이 주님께로 돌아오기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강조하고 이어 2장1-5절에서 이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할 때 사람의 지혜나 훌륭한 말로 하지않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막16:17이하에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겠다고 .."말씀하셨고 20절에 "제자들이 나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여러가지 표적이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지혜도 능력도 부족한 우리들을 위해서 지금도 주님은 이권능을 우리에게 주셔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성령운동 안에 오순절운동도 있고,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도 있으며 "제3의 물결"에 속한 흐름도 있지만 동일한 성령의 운동이고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있지만 계속 대화와 협력을 통해 입장차이를 줄일려는 노력을 계속 하는 줄 압니다.(Brighton Conference는 그런 시도 중 하나였죠. 마술사 시몬, 발람의 길을 좇느자들, 이단들을 항상 깨어 경계해야되겠지만 은사사역 자체를 영지 주의나 이단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치고 성령 사역에 대한 이해를 왜곡내지 축소시킬 위험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노바레운동"에 속한 리챠드 포스트나 달라스 윌라드..등은 기독교의 풍성한 영성을 깊이 연구해서 특히 복음주의권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는데 (리챠드 포스트의 '영적훈련과 성장'은 예수원에서도 많이 읽고 적용했을 때 좋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영지주의나 유대교신비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상당히 저를 놀라게 합니다. 성령운동이나 은사사역에 인성의 연약함과 사단의 방해로 인해 늘 부작용과 상처가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깊이 reaserch해보고 실제 사역을 해보면 주님의 임재와 함께 순기능적인 면이 훨씬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숙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역자들을 여러분 뵈었고 그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은사 사역의 역기능적인 면이 때로 드러나더라도 그로인해 은사사역이나 능력사역 자체를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정서적 결함이나 용서치않은 가운데 성령이 임할 때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리고 저도 "권세(엑수시아)"란 단어를 전에 연구해본 적이 있는데 이 단어는 많은 경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적용된 단어입니다.(대상29:12,눅4:36,/9:1,마7:28,29...)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겨우도 있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두나미스'가 육체의 힘을 의미하는 반면에 '엑수시아'는 법적으로 인정하는 힘을 의미하며, 실제로 소유된 힘의 합법성이나 합법적으로 소유된 힘의 실제에 대해 강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왜곡과 남용의 문제는 우리가 극복해야할 (맘모니즘과 함께) 큰 문제 중 하나이고 함께 기도할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해와 일치를 위해 카톨릭과 대화하고 연합하는 움직임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카톨릭의 교권이나 그들의 교리에 굴복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무하형제님이 언급한 여러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과 신학을 고수하는 가운데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는데 있어 함께 대화하고 연합하려는 것이고 서구역사에 있어 재산과 권력을 두고 (항상 표면적으로는 신학과 교리를 앞세웠지만) 피흘리며 싸운 것에 대한 회개와 화해의 입장 또한있는 줄 압니다. 순수한 복음과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갱신하려는 열정은 재세례파나 개혁주의 뿐 아니라 어느 주류교단 안에도 끊임없이 존재하고 특히 성령운동을 "RENEWAL MOVEMENT"라고도 부르는 것은 은사 운동에 속한 신자들이 무엇보다 성령 안에 교회를 새롭게하는 가운데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New Wine, New Wineskin이란 말이 많이 언급되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카톨릭을 적그리스도세력으로 해석하거나 프리메이슨,세계정부 음모론과 관련된 글들은 (제생각에는) 영지주의나 이단들에 대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위조지폐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나중에는 진품마저 의심하게되는 위험이 있을 수 있게습니다. 사실 위조지폐나 모조품 감별전문가들은 모조품을 가지고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진품을 가지고 훈련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연구, 그리고 풍성한 성도의 교제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동역하는 삶을 살아가면 말세에 미혹하는 여러 시험 가운데 참과 거짓을 보다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음모론이나 이단 연구에 빠질 경우 (제경험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소명과 기름부으심이 없는 경우 '중독성'이 있다고 봅니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게되고 영적으로는 메마르게되어 때로 "이단사냥꾼"처럼 될 위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플로리다 사역의 경우 이전의 김 **장로님이나 지체9님 하**선교사님,*부장님의 체험기를 참고해볼 때 대체로 직접 집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그곳에서 주님의 임재와 함께 강력한 치유와 표적과 기사들을 경험하신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타드 밴틀리와 팀들이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구하고 성령님 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그분과 협력하는 사역이 계속되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7월 한달 동안 속초와 중국,그리고 삼수령목장과 예수원(토지학교)에서 강의일정이 잡혀있어 나중에 글로 다시 뵙겠습니다. 지체3님 목사님의 순발력과 열정, 작은자님과 지체11님 형제님의 깊이 지체8님의 온유함과 진지함, Bigbear님의 넓은 가슴...그외 이사이트의 여러분이 함께 동역하게되면 멋진 팀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지체12님의 격려와 지원사격이 빠졌군요^^) 샬롬!!

서투른 독수리타법으로 더듬거리면서 치다보니 여전히 오타가 눈에 띄어 죄송합니다.^^ 위의 글중 reaserch는 research를 잘못 친것입니다.

작은자:

지체3님의 독수리 타법으로 사용하신 나눔의 글 잘 읽었습니다.
비록 서로의 해석의 입장(특히 리챠드 포스트의 글이 예수원에서 읽혀진다는 사실에 대해 개인적으로 좀 당황하였습니다.) 다르지만 무엇보다 지체3님의 따뜻한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제 자신도 지체3님 형제님도 우리의 의견을 각 의견을 충분히 말한 것 같습니다.
지체8님 말처럼 제 자신이 이곳에서 더 이상 논하는 것도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이 논의는 여기에서 중지했으면 합니다.
전에 지체 11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위해 나중에 좀 더 구별이 된 후에도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그리스도 은혜안에서 지속되었으면합니다.
지체3님형제님과 비록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익명으로 글을 남겼지만 성실하게 논하여 주신 모습 존경합니다.
차후에 때가 되어 얼굴을 대고 서로 만나면 깊은 안녕의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자 드림

지체11:

지체3 형제님....
저 또한 타자에 있어서는 같은 처지인지라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혹 위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이 몇분 계시면 독수리 오형제를
결성할 수 있을런지도... 각기 나름대로 진리(지구가 아닌)를 지키고자...
아닌게 아니라 본 논의가 사뭇 심각해지는 듯 하여.....^^
그러고 보니 이 논의에 한한 한 평소 때 보다 이 가상 공간에서
더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듯 합니다.
카톨릭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늘 서로 간에 일정한 간격이 있었지요.
여기에는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차
인정해야 할 듯도 싶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한 부분 또한 같은 연장선상에서의 무엇이 될 듯 하군요.
역시나 저로서는 대단히 아쉬운 대목입니다만.
그리고 염려해주신 두어가지 위험에 대하여는 먼저 감사드리고 크게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좋으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스로 사냥꾼으로서의 자질이 별반 없다고 여기는 터이라.^^

다만 다시 대꾸를 좀 하자면 신구교간의 대화와 화해에 대해 지난 교회 역사상
늘 신학과 교리를 앞세웠으나 실상은 재산과 권력 다툼을 일삼았던 그로 인해
엄청난 피를 흘린것에 대한 회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인즉 그러하거니와
이것이 이 두 종교 세력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자체가 신학 내지 신앙적 이유보다는(그것-개혁의 단초로서의-은
타락한 교황권에 대한 루터 개인의 항의 및 신앙고백의 차원에 불과했고 기실
그는 언제나 카톨릭교회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했지요. 만일 교황이 그의
상소를 받아들였다면 종교개혁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런지 모릅니다) 당시의 교회와 관련된 정치 경제적
상황이 보다 근본적인 동인이 되었음을....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지요. 이젠 종교세력이 전면에 나서서
헤게모니 쟁탈을 하는 시대는 지나간 듯 보입니다. (여전히 그 배후에 있지만)
그리고 서구 세계는 식민지 쟁탈 및 세력확장을 위한 힘겨루기에 열중한
나머지 전 인류적 재앙인 1,2차 세계대전을 겪습니다.(이 전쟁의 배후에도
결코 교회(교권세력들을 의미)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동서 냉전시대를 거쳐 (그 와중에 6.25라는 대리전쟁으로서의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적 대가를 치루어야 했던) 이제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자본(맘몬)주의는 명실상부한 세계 지배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서방세계-자본 및 자유민주주의체제로서의 - 와
동일시 되어온 교회는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간주했고 자본주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선으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이제 사단의 매우 유용한 도구였던 공산주의는 용도폐기 된지 오래입니다
(허나 아직 종전이 아닌 휴전중인 이 땅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카드...)
이제 이슬람정도가 남았겠군요. 자유민주세계 곧 교회의 공적으로서의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미국의 아프칸, 이라크 침공은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이제 신,구 교회는 맘몬 체제의 우산 아래 더이상 서로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금 한 뿌리로서의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카톨릭이해와 상관관계는 전혀 다릅니다.
역사상 참된 말씀의 담지자라는 이유로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오천만에
가까운 미증유의 일방적 희생을 치러야 했던 그들, 종교개혁에 함께 했지만
이 일로 오히려 카톨릭보다 루터의 개혁파들로 부터 폭도, 더하여
분리주의자라는 누명을 쓴채 더 많은 죽임을 당했던 그리하여 주류교회사
저편으로 사라졌던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처음부터 카톨릭교회에
편입되지 않았던 하여 주류 사회로 부터의 모든 혜택과 권리를 포기해야
했던 참된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있었던 저들에게 과연 카톨릭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화해하고 일치해야 할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용서와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전제 되어야 할 것은 진리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임을....
그렇지 않더라도 용서는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카톨릭의 복음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 아시는 터이고 여기서 새로이 신학적 논의를 추가
할 순 없겠지만 먼저 구원론에 있어 결정적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행위
구원뿐 아니라 구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유일성에 대한 명백한
훼손과 나아가 부정(다원주의)은 도저히 용납하거나 묵과 할 수 없는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던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무효화하는 가장 치명적 오류(의도적인)이며 크낙한
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누차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만 카톨릭 교회안에 이러한 교리나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 남은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 제도와 바티칸
체제와는 무관한 또한 그러한 치명적이며 결정적 오류들을 - 찬성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 포기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진정한 남은 자들과의 연합과 일치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뿐만아니라 카톨릭과의 공식적 차원의 화해와 일치 또한 가능하거니와
이 또한 잘못된 교리와 전통이라는 이름의 오류를 버릴 때에 만
가능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전혀 가능한 일이 될 수 없으리라는...
다시 ECT이야기 입니다만 어떻게( 새삼 열거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한
반성경적인 그것도 결정적인 오류들을 용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함께 하는데
결정적인 방해가 될만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할
수 있는지.... 거꾸로 보면 일치와 연합이 우선 과제였으므로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닐는지....
이러한 사실은 개혁교회와 복음주의권안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들 또한 거의 알지 못합니다.
알아도 요즘 같으면 큰 이슈거리가 되지 못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교내에서도 최근 몇 년사이 카톨릭에 대한 입장이 매우 호의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저들은 한번도 회개하거나 변화한적이
없으며 잘못된 오류들을 철회한 적이 없음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불과 십여년전만 해도 개혁교회내의 어지간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있어
카톨릭은 이단시 되어왔습니다, 더욱 복잡다단한 포스트 모던
(fusion- 모든 가치와 양식을 섞어버리는 융해, 연합. 이는 결국 confusion-
혼돈으로... )시대를 살면서 진리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진것인지 아니면
포용력이 넓어진 것인지....
ECT에 대한 저의 여전한 의구심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요 지도자들서
연합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즉 일차적 전제로서의 결정적 오류들을 해석,
해명해야만 했으리라라는 ....

다음은 ECT선언문의 극히 작은 일부입니다만....
이 진술은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각 공동체에 따라 책임성 있게 말하도록 의도되었다.
[출처] Evangelicals & Catholics Together (? )|작성자 greatimpact

무슨 정치협상도 아닐터인데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딴은 저의 이해부족과 그만한 사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후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책임 있는 해명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저같은 사람들이 접근하기엔 너무 먼...
어찌보면 상층부의 밀실에서의 회합같은 인상마저 주는....
후문에 의하면 이 선언문에 다섯 사람이 서명 거부를 했음인데
모두 침례교 목사였다는 사실입니다. 신뢰 할만한 정보이며 아마도
재세례파의 후예들로서의 용기있는 결단이었으리라는 평가와 함께.

이번엔 간단히 쓰고자 했으나 또 글이 길어졌군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얼마간의 간격을 느끼지만
언제 만나서 더 자세한, 또 다른 유쾌한 이야기들을 나누지요.

미처 작은자 님의 글을 읽지 못하고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본논의가 이 공간에서는 이쯤이면 됐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못내 아쉬움을 갖게도 되는 군요. 이 논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다른 경로를 통해서 몬타니즘에 대한 글은 한번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p.s (아래에 제 메일로 보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간 작은자님께로 부터 받은 가르침이 적지않고 직접 대면하여 얼굴을 뵙지
못했지만 그처럼 깊고도 폭넓은 식견과 올곧은 믿음을 지니신 분과 조우하게 된 것이 실로 제게 크나큰은혜였음을.... 영적 혈액형이 비슷하다는 것 또한.
계속 이곳 빈들에서 뿐 아니라 어디서라도 뵙게 되기를 바라고
말씀하신 대로 언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더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허락된다면 함께 하시는 모임에도 참석하고도 싶습니다.

혹 컨 템퍼러리한 노래를 그다지 즐기지 않으시는 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앨범을 보내드리고 싶군요.

작은자:

지체11님의 옥고에 제가 더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고민한 문제가 결코 저 혼자의 문제가 아님을 발견하고 일심 기쁘고 주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제 자신도 무지하고 아직 서투른 칼날에 많은 지체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특히 지체3님과는 주님께서 하락하시면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한 고민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한번 나누고 싶습니다.

지체11님은 말씀처럼 저와 비슷한 영적 혈액형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지체님을 만난것은 저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고 서로가 모르지만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습니다.
전에 초청에 제가 아직 연락을 못 드린것은 아직 제 자신이 부족하여 좀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논의를 보면서 제 나름대로 기도와 고민을 하였습니다.
지체11님께 개인 멧세지를 전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망대에서 하늘을 보고 그분의 역사를 기다리면서 숨죽이며
감추인 비밀의 계시를 저희들에게 확연하게 보이시길 기원하였는데
지금도 단지 그 분의 앞선 인도만 바랄 뿐입니다.
몬타니즘에 대한 글을 개인적으로나 이곳에 한번 발제를 해 보고싶습니다.

지체8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잘 읽었습니다.
조심스럽고 작년에 같이 함께 한 기도의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귀한 사역에 주님께서 은혜를 함께 하시 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체6님목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걱정의 마음으로 그 글을 작성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체에 대한 걱정의 마음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하시는 사역에 주님의 역사가 같이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영문 이니셜로 이름을 남기신 지체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곳이 우리가 논의와 더 깊은 고민을 나누는 자리이고 지체님의 단상을 나누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제글 아닌 발제글을 이곳에 남겨 여러 지체의 의견이 오고 갔지만
그 마음속에 항상 우월 의식이 아닌 진정 진리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나누는 장임을 고백합니다.
혹시 이곳에 방문한 지체들께서 이런 고민의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런 고민의 나눔은 사도 바울 선생시대에도 있어왔고
그렇지만 그 가운데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논의가 결코 의미없는 논의가 아닌 지체님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다른 눈으로 주의 일을 볼 수 있고 그 가운데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고백하는 자리로 발전되었으면 합니다.

작은자 드림

지체8:

무시가 아니라, 쓴 글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이무하 전도사님이 증인일 겁니다.

언젠가 제 자신이 먼저 그렇게 글을 쓰게 될 겁니다.

요즘 '때, 시기"에 대해서 배우는 중입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지체12:

저는 신학적 이론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오직 평신도로서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제가 알고 있는 수준(?)의 말씀에 비추어 늘 깨어있고자 하는 자세로
살아 왔습니다.
저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하기에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늘 이곳의 빈들의 "토드 벤틀리에 대한 글"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해 아래 완전한 것은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모든 부분적인 것들이 완전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버드나무 기도회와 인도네시아의 멜-테리 목사님의 그 곳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실 말씀에 기대하기 보다는 현상에 집착 또는
주목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주님께 집중하려고해도 자꾸 주변의 현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게 되는 제 자신을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웃을 수 밖에 없더군요.
제3시 "야생사과"를 방문하면 정말 은사주의자들 같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는
댓글들, 현장에 가면 너무도 말씀에 근거한 교제, 어떻게 이렇게 상반되게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또 다시 제3시 "야생사과"를 방문하면 여전히 은사를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멜-테리 목사님의 한국집회에 2번 갔었는데 거기서도 말씀에 바탕을 둔
성령의 나타나심을 이야기 하시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은
어떠한 성령의 나타나심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매로 알 수 있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 맞습니다.
그러나 열매로 간주하는 것조차도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신등을 열매로, 단순히 이적과 기사를 열매로 보는 인간의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어떠한 경우라도 많은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면 그것 또한 열매로
보고 인정할 수 밖에요. 어떤 경우에는 자아의 포기없이도 가능한 것도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는 자신에게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고통일 수 밖에 없는 경우라면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주님의 뜻이라면 내려놓아야 함을......
여기서 고통을 감내할 능력이 없다면 자아의 포기도 어렵겠죠.
작은자 님의 이야기처럼 열매는 보이죠. 열매는 주변의 사람들도 알 수 있지만
본인 스스로도 알 수있다는 것이 저의 기본 생각입니다. 전제는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나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다는 것이죠. 문제는 교만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에 대한 생각 또한 우리의 염려는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더불어 내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을 통하여 변화되어지는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들을 기다려주며 사실 중보기도함이 오히려 더 성경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혹 토드 벤틀리가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었는데 현상을 보면서 나타나는 말들로 인하여 그렇게 되어지는 그것이 사탄이 노리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위의 글에서 어느 지체님께서 "토드 벤들리는 성경에서 일어난 영적 현상만 인용하여 성령의 역사라 주장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교제가 글의
한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말을 한 지체 또한 그것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 Revival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고 Outpouring
PowerEvangelism이 확산되는 것이 아닐까 예상합니다"의 지체글에 마음이
끌립니다.

지체3형제님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믿음이 있고 자기권리를 포기하는 헌신이 있으면 우리의 사역에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고 혹 때로 우리가 실족할 때가 있을지라도 연단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 성숙한 사역자로 빚으실 것입니다."는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체11전도사님!
전도사님을 통하여 초대교회와 카톨릭에 대하여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순되게도 저는 카톨릭에 대한 관점이 전도사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을 통하여 카톨릭에 대하여 눈이 열렸음에도......

카톨릭이 부패하고 남은자들을 위하여 ...말씀하셨지만 제가 깨닫는 것은
카톨릭의 부패에 뒤지지 않는 것이 요즘 현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옛말에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 실감합니다.
저는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로 지은바 되었으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원초적 회귀적 본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의 회심을 그들에게 기대를 합니다.

저는 빈들의 지체들의 글을 보면서 분파주의나 또는 ...주의를 단정하며
읽지 않았습니다. 열린마음으로 읽었고 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접근
하였습니다.
작은 자 님! 고맙게 생각합니다. 자주 뵙죠. 앞으로도.....

지체12:

더불어 한가지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통하여 제가 주님께 빚진자로서 삶의 일주일중 하루를 전도를
하겠다하고 화요일날 매일 전도를 나갑니다. 15년쯤되었나 봅니다.
저번 주에 담임목사님께서 전도를 잘 하는 법등에 대하여 강의를 하신다고 하면서 3시간을 붙들어 놓았죠. 황금같은 시간을.....얼마나 아까운지요.

그동안 전도폭발, 고구마 전도법 등 "전도"에 관한 세미나나 강의가 있을 때
열심히 다녔지만 현장에서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것을 깨닫고 느낀 것은
스스로 속았다는 것입니다. 뭔가 좀 알아야 할 수 있고 뭔가 배워야 할 수 있고
뭔가 체계적으로 해야 할 수 있다는 .....
저는 이것 또한 전도를 막는 전략중의 사탄의 전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께 "맨날 프로그램, 전도폭발" 이제 그만하고 싶고
주님의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일방적 정복의 권위에 무시당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도폭발에 대하여 강의를
하라는 혹을 하나 달아 주셨습니다.

그날이 오늘이였는데 준비한 전도폭발 무시하고 담임 목사님께서 준비한 것을
강의 듣게 되었습니다.
전도자로서의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죠.
해야할 것 중에 "당신의 옷차림과 맵시에 유의하라"가 있었습니다.
저는 부언설명이 있기전까지 그저 단정하게 입으라는 그러니까 보통 아줌마들이
집에서 입던 옷 입고 나오는 식을 지양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죠.

그런데 부언 설명은 달랐습니다. 전도부원중에 한 여집사님(오늘 불참)을 지칭
하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집사님의 옷이 너무 화려하고 화장도 야하게 했는데
눈화장의 아이라인을 하지 말고, 옷도 평범하게 입고 나오게 하라는 거예요.
저는 그랬죠.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인데 모순되지 않느냐고?
그 집사님께 상처를 주면서까지 그렇게 해야될 이유가 없고 멋쟁이 집사님을 보고 오히려 접근이 용이할 수 있다고.
저에게 그럽니다. 담임목사님왈 "이것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교회사에서 그동안 전도하면서 통계적으로 나온 것"이라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도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요. 지금의 우리의 논의처럼 "자기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모습과 복음은 "누구든지" 인데 .....
그것이 결국 발목은 잡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함을 저는 압니다. 사실 그 반대편에 있는 그러니까 아주 평범이하로 옷을 입는 자들도 인정할 능력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함을.
또다시 담임목사님과 충돌하는 아픔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찌해야 될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체6:

지체12 님
공감이 됩니다. 야생사과의 글과 제3시 기도회의 시각차이.
참 좋은 예네요.!

15년은 매주 한날 전도했다니...
개인전도에서 나오는 시각. 목회자인 저로서 배움과 대화의 기회
감사합니다.

지체11:

지체12님의 진솔한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저와 관련해서 쓰신 내용중 한가지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를 통해서 초대교회와 카톨릭에 대해 눈이 열리셨다니 감사하고 송구합니다.
그럼에도 저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은 전혀 모순되는 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아서는 저와 다른점을 전혀 발견 할 수 없군요.
카톨릭의 부패에 못지 않은 현대교회... 이 또한 제가 말씀드린 바이고
이곳을 통해서도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한 것이 그중 하나이지요.
맘몬의 체제하에 편입된 교회라거나....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니 닮아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옛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허나 개혁교회로서 카톨릭의 전철을 밟지 않고 회복된 말씀을
붙잡고 이 거대한 배도의 물결앞에 몸부림치는 귀한 교회들도 있지요)
헌데 현대교회가 부패했다는 사실이 배도한 카톨릭을 옹호할 이유가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체12님이 그러하다는 말씀은 아니고
뭐 묻은 개가 .....나무란다는 속담을 떠 올려보긴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저와 관점이 다른지 아니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지 비판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인지...
저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바에 따라 나름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 되도록 애를 씁니다만.
더러 과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권면의 말씀으로 받겠습니다. 그리고 할 수 만 있으면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울 수 있기를 저 또한 소망합니다.

목회자 와의 갈등과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를 지키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는 지체12님의 수고를 주님께서 잊지 않으시리라는 말씀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체12:

 

지체11전도사님,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카톨릭을 이단으로 규명하여 설교를 하셨고
그 당시는 저랑 직접적 상관이 없어 스쳤죠. 전도사님을 통하여
접하게 되면서 느끼는 것은 카톨릭의 무염시태, 교황무오설, 마리아 숭배사상등
이 분명 잘못되었음은 인정하고 됩니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것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이단이라함에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또한 실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하이퍼 리얼리티"에
속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하여 유대교와 개신교가 그냥 존재하듯 카톨릭 또한 그렇게
존재하며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카톨릭이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지요. 물론 그렇다고 맞다고
할 수 없는 한계도 있지만요.

그리고 위에 언급한 부분에서 옛말을 적용한 것은 전도사님을 마음에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닌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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