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상담, 질문과 답변, 토론, 자료 추천 등이 이루어지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믿음과 행함

작성자
I-nu-ha
작성일
2014-12-02 12:46
조회
3387
믿음? 행함?

 

믿음이 중요한가 행함이 중요한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가 행함으로 구원 받는가

너무 오래되어 조금 식상한 소재이기도 하고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고 툭하면 심한 논쟁으로 치닫는...

 

그러나 지금도 아니 오히려 더 적실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1.

20대 초반 (그러니까 30년 정도 지난 이야기네요...)

교회에서 저녁 예배 후에 전체 교우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토론행사가 있었는데

믿음이 중요한가  행함이 중요한가 라는 주제였습니다.

 

믿음파 행함파로 나뉘어 각자의 주장을 펼쳤는데

그 때 나는 행함이 중요하다고 열띠게 주장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도 어린 나의 눈에 오랜 세월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하는

교인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보면서 나름 고민했던 모양입니다.

 

그 토론회의 마지막에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만족스러운 결론을 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어쩌면 제대로 결론을 이야기 해 줄 역량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네요.

 

2.

산상수훈 (마태복음 5-7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살고 싶습니까?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삶은 너무 거룩해,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더구나...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불가능해

그렇지만...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이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결국 구원은 받을 거야...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다.

 

예수님은 허언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경고를 흘려들을 수 없습니다.

 

3.

종교개혁의 오직믿음이라는 구호는 유명하지요.

알게 모르게 <이신칭의>는 한국기독교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어 왔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정경안의 정경’으로 추앙받고 있지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홀대했던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루터도 진정한 복음의 비밀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누구나 그 시대의 아들이지요.

루터에게는 루터의 사명이 있었겠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야고보서도 분명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 두가지의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을 때의 그 믿음은

생각하고, 여기고, 인정하는 사변적인 정신활동으로서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겠지요.

 

야고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고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성경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야고보는 무시하고 바울쪽에만 서고 싶습니까...

솔직히 야고보가 바울보다 더 예수님의 말씀에 가깝게 들리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바울의 이야기가 오히려 예수의 말씀보다 더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나만의 오해인가요?)

‘급진적 바울주의’라는 입장도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의 왕입니까. (바울사도에게 조금 미안합니다만...)

예수가 우리의 왕입니까.

 

그러나 사실 바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바울을 오해하는 것에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는 믿음은 결코 사변적인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식으로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행함과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욕심으로 왜곡되고 일그러진 엉뚱한 해석을 맏들어내고

그런 부족한 내용을 받아들이고 핑계하고 싶은 것이지요.

 

산 믿음은 언제나  행함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사실 믿음이 없으면 행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행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 있을 때에만 위로부터 부어지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제대로 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산 믿음이 없으면 온전히 행할 수가 없습니다.

산 믿음만이 행함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지요

 

 

4.

그렇다면 믿음인가 행함인가라는 토론 제목은 잘못 선정된 주제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중요한가 행함이 중요한가 라는 질문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토론주제가 별 문제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면

믿음과 행함이 구분되어 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합니다.

 

즉 여기에서의 믿음이란

의식적으로 어떤 사실이나 말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정신적인 행위라는 정의를 따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때 믿음이냐 행위냐의 토론에서

모범답안은 당연히 후자인 ‘행함’이 될 것입니다.

 

왜?

행함 없는 (행위와는 별개의)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행함이 있다는 것은 그 행함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에

죽은 믿음보다, 살아있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게 된 행함이 더욱 중요한 것 아닐까요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  기독교는 삶의 종교입니다.

조금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즉각적으로 행위구원론이라고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선입견 없이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신칭의’의 안경을 잠깐만 벗어두고 읽으면

기독교는 삶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을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영생을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롭다.

 

사실 더 분명하게는 예수께서 말씀하셨지요

산상보훈을 말씀 하시면서 마지막에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내용을 믿거나 동의하거나 인정하거나...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내용을 행하지 않으면 모래위의 집이라고 (멸망이라는 말이지요.)

 

5.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대로 사느냐 마느냐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자꾸 말하지만 다름아닌 바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 경고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키고 살기에 너무 엄중하고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연약하므로

우리가 예수의 말씀대로 즉 산상수훈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기에 구원을 받을 거야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 오랜시간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쳐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복음입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속아온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6.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지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누구라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엄연한 실존

 

그러나

이제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어지고

우리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부활한) 우리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하나님나라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 이미 부활의 능력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란 말이 거슬리면 산상수훈의 삶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비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 안에 주어진 새로운 예수의 생명으로

산상수훈의 그 엄격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방식이

 

이제는 충분히 가능한 삶의 양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산상수훈의 삶을 마음으로 기뻐하며 즐겁게 소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믿음이 우리의 행함과 제자의 삶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의 행함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따라 예수처럼 살아갑니다.

 

왜 산상수훈의 삶이 불가능하다 말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의 삶은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내용이라 믿습니다.

 

7.

기독교는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 그 넘어 윤리보다 더 깊은 그 무엇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더 철저하게 윤리적입니다.

 

그 마음 깊은 동기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어찌 세상의 윤리기준 따위와 비교 하겠습니까

세상의 윤리는 겉 모습으로만 지켜도 인정됩니다.

기독교의 삶은 겉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속 동기까지 사랑에서 기인됩니다.

 

믿음입니까 행함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허황되고 허탄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사랑으로 살아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 (=기독교적 행함)을 살았는가 하는 것으로

심판의 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낼 가능성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능력)으로 인하여

기어이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능력이지요.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전체 5

  • 2014-12-04 09:05

    믿음과 구원의 고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 할 것입니다.

    우선 형제님의 글에서 \"바울의 이야기가 오히려 예수의 말씀보다 더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교리학의 발전이 바울 서신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사실 2세기 초 신약이 처음 정경으로 형성 되기 시작할 때 바울 문서를 중점으로 복음서가 편집이 된 것이 신약 정경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교부 시대에 교리의 발전 단계에서 바울의 저서들이 복음서 보다 많이 인용되었기에 (바울 문서가 신약에서 가장 많기에..당연합니다만..) 무엇보다 초대 기독교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이방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심으로 발전되었기에 그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바울 서신서 문집이 많은 부분에서 초대 교회에서 인용되고 해석되었기에 당연한 모습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의 말씀을 집대성한 사 복음서가 교회의 중심의 말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점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면 유대교는 바른 행위(orthopraxy)를 기반으로 하기에 어떻게 보면 믿음을 강조한 기독교와 대립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유대교의 관한 정보의 무지와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된 믿음이란 단어에 관한 몰이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지체들은 초기 기독교가 어떠한 환경에서 형성되었고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의 신앙의 흐름에 관하여 거의 들어보지 못하기에 이런 맹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목회자들도 이러한 신학,역사, 교리적 흐름에 관하여 통시적 시각을 배우지 못하여 단지 현대에서 개념화된 단어의 의미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대부분 현실입니다.

    어떻게 종말론적 유대신앙에서 기독교가 탄생되었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고 어떻게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해석을 하였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앞으로 저의 종말론 관점의 성경 나눔에서 이러한 통시적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위와 믿음을 이해 하였는가를 나눌 예정입니다.

    현재 대부분 이분법적 믿음과 행위의 생각은 기독교 교리의 발전사에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교리 논쟁에서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 기독교에서 나온 교리의 논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후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로 발전 되었지요.

    한국에서는 장로교 중심의 칼뱅주의가 교계의 흐름을 주장하기에 이러한 고민이 더욱 클 것입니다.

    웨슬리 중심의 감리교는 칼뱅 중심의 장로교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칼빈 주의는 소위 5대 강령인 TURIP 을 강조하는 교리 구조입니다.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인성전악설)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제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칼뱅주의 교리의 기본 강령은 이렇게 TURIP 구조입니다.

    거기에 반하여 웨슬리 중심의 감리교의 강령은 ACURA 입니다

    (A)ll are sinful. 만인 죄인설
    (C)onditional election 조건적 선택
    (U)nlimited atonement 무제한적 속제
    (R)esistible grace 가항력적 은혜
    (A)ssurance of salvation 구원의 확신

    사실 이렇게 칼뱅의 강령에 기반한 장로교와 웨슬리의 강령에 기반한 감리교는 어느 면에서는 서로 대립적 강령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서의 연구에서는 칼뱅의 강령보다 웨슬리의 강령이 성서에 더 기반을 둔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Calvin vs. Wesley: Bringing Belief in Line with Practice By Don Thorsen의 부록인
    More ACURA than TURIP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적 고민은 이러한 교리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지 통시적 성서적인 관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생각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좀 더 깊은 말씀의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형제님뿐 아니라 많은 지체들께서 이러한 고민을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 2014-12-05 02:56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21)

    믿음과 순종(행함)은 저도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성경 각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맞추어 공식화 하는 것을 넘어서, 성령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 전체를 관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 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핵심인 것 같습니다.

    저의 부족한 이해도 이누하님 말씀처럼...진짜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 증거될 수 밖에 없고, 또한 하나님게서 기뻐하시는 순종(행함)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복음서 말씀을 묵상하는데 유독 예수님께서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부분들에 마음이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 14:30-3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23-24)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1:21)

    우리가...아니 제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종종 생각해 봅니다.

    바로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저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그 분을 100%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길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전에 읽은 리즈 하월즈의 전기에서 다음 구절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어떤 위대한 사건이라도, 심지어 성경에서 미리 예언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과 순종의 통로로 쓰실 인간을 찾으시지 않는 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언은
    미리 말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드러날 때까지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바로 이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라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1)

    주님, 제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 2014-12-05 06:03

    최근 한국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지탄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 사실입니다.
    먹사...개독...
    가끔은 억울하게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세상의 비난이 충분히 이유있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답답하고 가슴 아픈 현실이지요.

    이렇게 된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믿음과 행함이 따로 노는 기독교인들의 (일부러 성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습이 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진정한 의미의 성도보다
    성도가 아닌 교인들이 더 (어쩌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선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가 세상에 능력있게 전파되었다고 하지요.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었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에 대한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답답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고...

    이렇게 된 이유중에 하나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세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믿음과 삶은 언제나 나란히 움직이는 것인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이신칭의
    예...분명한 진리이지요.
    우리는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아전인수(?)생각이 문제이지요.

    이미 이야기 했지만
    행함(=기독교적 사랑의 삶)에 대한
    우리 주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어디에선가 분명 잘못된 것이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기에
    의로운 삶을 완전하게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공로를 의지해서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분이 많더군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의미에는
    이 지점에서 더 깊숙히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행함을 순종을 삶을 대체하고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전에는 도무지 불가능했던
    온전한 순종이 가능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전에는 불가능했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율법 스스로는 제공하지 못했던
    율법을 지키는 삶을 가능하게 되었다

    분명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는 삶의 열매를 맺게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

    폴 워셔의 설교 마지막 부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지옥을 가는 이유는 행함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행함이 없음으로 증명된 그들의 믿음의 부족때문입니다.

    *****

    참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셔서
    이전에는 도무지 불가능했던
    예수따라의 삶이 비로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요...

    믿음이 순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믿음이 행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전한 행함이 가능하게 되었다.


  • 2014-12-05 06:18

    작은자님의 종말론적 통시적 관점에서 믿음과 행함 기대가 되네요^^

    나는 어릴때 부터 40대가 될때까지 예장 통합의 교회를 다니다가
    40대 중반에 예장 합동의 교회를 몇년 섬기다가
    최근에는 감리교 (선한목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장로교 칼빈주의 개혁주의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나름 일천한 독서의 경험이지만
    기독교 서적들을 두루 읽어보고 검토하다 보니
    칼빈보다는 웨슬레쪽으로 내 생각의 흐름이 조금 기울더군요

    삶의 열매를 보아도...
    칼빈의 삶에는 비판할만한 면모가 많았지만.
    웨슬레는 결국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누군가 휫필드에게 웨슬리가 천국에 갈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휫필드는 개혁주의적입장이라 웨슬리와 논쟁도 하고 했던 모양입니다)
    휫필드 왈 웨슬리는 천국에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는 일화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 2014-12-05 22:12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에서 오늘 동일한 주제로 토론이 있었네요.
    한번 같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체 105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온라인 서점 배본 (26)
웹섬김이 | 2018.03.27 | 추천 1 | 조회 3441
웹섬김이 2018.03.27 1 3441
29
개독교, 예수, 그리고 주님의 자녀 (4)
작은자 | 2015.01.09 | 추천 | 조회 3265
작은자 2015.01.09 3265
28
이 싸이트의 첫 토론이 생긴듯합니다. (2)
swsinj | 2015.01.08 | 추천 | 조회 2819
swsinj 2015.01.08 2819
27
이 공간에 대한 바램 (3)
I-nu-ha | 2015.01.08 | 추천 | 조회 2814
I-nu-ha 2015.01.08 2814
26
자막을 붙여 올리고 싶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10)
peace | 2015.01.07 | 추천 | 조회 2659
peace 2015.01.07 2659
25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5)
펀치넬로 | 2015.01.07 | 추천 1 | 조회 2555
펀치넬로 2015.01.07 1 2555
24
아들이야기 2 (16)
I-nu-ha | 2015.01.05 | 추천 | 조회 2427
I-nu-ha 2015.01.05 2427
23
아들이야기 1 (3)
I-nu-ha | 2015.01.02 | 추천 | 조회 2531
I-nu-ha 2015.01.02 2531
22
예수를 더욱 바라보자 (3)
I-nu-ha | 2015.01.02 | 추천 | 조회 2026
I-nu-ha 2015.01.02 2026
21
하나님 앞에서 울다 (9)
I-nu-ha | 2014.12.26 | 추천 | 조회 2978
I-nu-ha 2014.12.26 2978
20
성경읽기표(ESV Study Bible 편) (25)
peace | 2014.12.20 | 추천 1 | 조회 6196
peace 2014.12.20 1 6196
19
십계명중 세 번째 계명 (9)
I-nu-ha | 2014.12.05 | 추천 | 조회 2877
I-nu-ha 2014.12.05 2877
18
믿음과 행함 (5)
I-nu-ha | 2014.12.02 | 추천 | 조회 3387
I-nu-ha 2014.12.02 3387
웨슬레안과 칼비니즘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 - 이인규
매인자 | 2014.12.06 | 추천 | 조회 2673
매인자 2014.12.06 2673
17
신사도에 관한 논의 (1)
작은자 | 2014.11.25 | 추천 | 조회 4880
작은자 2014.11.25 4880
16
천국과 지옥 (8)
작은자 | 2014.11.25 | 추천 | 조회 3277
작은자 2014.11.25 3277
15
디모데 후서3장8절과 탈굼 (2)
작은자 | 2014.11.23 | 추천 1 | 조회 5198
작은자 2014.11.23 1 5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