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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선-존재와 요한 공동체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5-01-27 10:07
조회
3956
아래 글은 전에 어느 지체와 개인적 나눔의 글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하늘 씨앗의 삼위일체의 단상이란 글에서 매인자께서 예수의 선-존재의  관한 나눔의 글을 여러 지체와 나눔을 가질 것을 부탁을 하셨기에 늦게 이 나눔의 글을 편집하여 작성합니다. 예수의 선 존재의 글과 함께 역시 개인적인 나눔의 글인 요한 공동체에 관한 나눔의 글을 같이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이번 주에 "개독교, 예수, 그리고 주님의 자녀"의 2 편인 예수에 관하여 글을 작성을 할 예정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를 작성한 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나눔에서는 유대 전통에서 그리고 복음서에서 언급된 당시의 시대에서 논의된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글을 작성 예정입니다.

예수는 부활 전에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부활 후에는 단지 소수의 제자에게 그분의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복음서에서 기술한 이 부활 전의 예수와 부활 후의 예수의 목격자에 관하여 영적 교훈을 깊이 고민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고민을 다음 글에서 작성할 예정입니다.



소위 신구약 중간기 중 회당 중심의 초기 유대교의 모습이 형성 되면서 구약에 관하여 새로운 신학적 해석이 시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주후 90년 경 본격적인 랍비 중심의 유대교가 여러 분파로 형성된 유대교를 대표하게 되었고 그들은 구약의 정경성에 관하여 몇 가지 문제를 논의를 하였습니다. 사실 구약의 정경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기원 전 2-3 세기의 70인역의 번역에서 어느 정도 선별되었습니다.( 이는 신역의 정경의 발전에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주후 90년 경의 랍비 중심의 유대교가 얌니아 지역에서 논의한 것은 구약 정경의 선별이 아닌 초기 기독교와 확연한 구별을 위한 당시에 히브리 성경에서 초기 기독교에서 선호한 말씀이나 랍비 신학의 관점이나 역사적 정황에서 문제가 있는 말씀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에루살렘 성전의 파괴 후 랍비 중심의 유대교가 주류 유대교가 되기 전에는 유대 지역이나 사마리아, 갈리리 지역에서는 각 지역의 전통에 의하여 히브리 성경에 관한 여러 해석이나 선호도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이해에 있어서 이러한 좀 복잡한 당시의 유대 종파의 신학적 관점이나 각 지역의 신앙의 흐름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몇몇 유대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신구약 중간기에 (초대 유대교 시대) 당시의 국제 정치적 상황이나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의 고민과 함께 히브리 성경의 깊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히브리 신학의 유일신 관점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신적 인격체의 형태로 언급된 말씀과 지혜가 언급된 부분을 (이 부분은 전에 언급을 하였습니다.) 더욱 발전 전개시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발전된 형태의 우리가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구약 외경서에서 발견이 됩니다.
(이러한 외경은 당시에 정경 외경의 구분이 없었기에 각 지역 공동체에 따라 성경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가 주류가 됨으로 이러한 신적 인격체가 언급된 일부 외경은 히브리 성경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70인역의 말씀 중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선호를 한 집회서와 지혜서에서 말씀과 지혜가 더욱 발전된 모습의 인격적 형태로 서술됩니다.(이 부분에 관하여 간략하게 전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구약을 읽으면 매우 많은 부분에서 메시야의 표상이 언급됩니다(시편 72편에서도 이러한 메시야의 표상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메시야의 표상의 이해와 함께 좀 더 구체적인 메시야의 모습이 선지서를 통하여 해석되고 느헤미야 성전의 건축 후 선지서에 계시된 메시야의 출현을 유대인들을 매우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의 정치, 종교적 상황이 더욱 힘들어 갈수록 그들의 이스라엘의 회복의 열망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다니엘서의 인자 개념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강한 소망에서 해석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의 회복이 아닌 신적 권세를 가진 자가 나라를 형성하고 이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물론 이 나라를 그들은 자신의 영적 고토인 이스라엘로 보았습니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 인자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말씀과 지혜의 신적 권위성을 가진 개념과 함께 연관되어 초기 기독교에서 해석이 되었습니다.(그렇기에 말씀의 예수 지혜의 예수는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말씀과 지혜의 의미가 아닌 신적 권위성을 가진 이런 구약의 해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초기 기독교나 초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성경의 해석이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구약의 종말론적 성경 해석의 증거는 탈굼에서도 발견이 됩니다.(전에 이 부분에 관하여 언급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Bruce Chilton 저명한 학자는 ( 이 학자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를 연관하여 많은 연구를 한 학자입니다.) 예수 당시에 예수도 이런 탈굼의 해석으로 회당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연구했을 것이라고 합니다.(The Missing Jesus: Rabbinic Judaism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Bruce David Chilton, Craig Alan Evans, Jacob Neusner p.p 145-146)

특히 예수가 당신이 자신을 언급하실 때 사용하신 인자란 단어가 많은 유대인에게 알려진 이유는 (신약에서 인자란 단어에 관하여 특별한 설명이 없는 이유는 당시에 화자가 이 인자란 단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추론합니다.) 에녹1서에 언급된 구체적 인자의 개념이 당시에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에녹1서의 인자의 개념은 전에 인자에 관하여 나눌 때 갈릴리 지역에서 발전되었다고 언급을 하였습니다.

갈릴리 지역과 예수의 사역(지리학적 관점)의 연구는 1940년 에 겨우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고고학적 연구와 당시의 문헌 연구를 통하여 갈릴리 지역의 정체성을 학자들은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제가 참고한 책이 Jesus, a Jewish Galilean: A New Reading of the Jesus Story By Sean Freyne 입니다. 갈릴리 지역의 예수의 사역이나 당시의 이 지역의 사람들의 유다 지역의 유대인과 다른 신학적 정체성과 신약에서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이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을 무시하는 환경과 신학적 배경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갈릴리 지역에서 다른 유대 지역과 달리 인자의 개념이 확장 발전된 것은 그 지역의 정치적 신학적 지리적 배경이 큰 요소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의 사역에 중점을 두신 것은 (공관 복음 관점) 이곳의 신학적 정체성과 연관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인자의 개념은 다니엘 7장과 에스라 4서 그리고 에녹 1서에서 표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에스라 4서는 간략하게 바다에서 인자가 나온 후에 구름을 타는 묵시적 표현의 구원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다니엘 7장에서 언급된 묵시적 표현의 인자와 같은 표현입니다. 에녹 1서에서는 구름을 타는 이라는 묵시적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46장과 48장에서 에서 다니엘 서와 같은 심판자와 창세 전의 선존재로 묘사됩니다. 공관복음의 인자는 고난에서 영광을 받는 인자의 개념이 강조되었고 요한복음의 인자는 창세 전의 존재로 강조되었습니다만 에녹 1서에 이러한 모든 인자의 특징이 서술되었습니다.)

유일신 개념에서 신적 인격자의 선존재의 개념이 신구약 중간기에 발전되고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이러한 해석이 다른 지역보다 발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는 자신의 사역의 선포에서 협의적으로 죄인은 복음에서 의인과 구별된 율법을 이행하지 않는 자로 표현되지만 광의적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와 달리 갈릴리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냐란 나다나엘의 질문은 이러한 당시의 갈릴리 지역의 종교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갈릴리 지역에서 이러한 인자 개념의 신학적 개념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한 것은 예수의 복음 사역의 전초 기지로 갈릴리 지역이 선택된 것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19세기에 이르러 랍비 말빔(Malbim)에 의하여 창세기 18장 주석에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신의 개념이 나왔다고 합니다.(참조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 By D.H. Stern)

요한복음 1장 1절에 표현된 로고스란 헬라어와 동치된 히브리어는 70인역에서 davar 이고 이는 말씀뿐 아니라 thing 나 matter를 의미합니다.
(참조 http://www.ancient-hebrew.org/27_wilderness.html)

이는 실제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단어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적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를 미드라시적 해석으로 요한복음 1장 1절을 해석하면 In the beginning was the Real Thing 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참조 Jewish New Testament Commentary By D.H. Stern)

이는 말씀이 단지 관념적인 해석이 아닌 실재적 존재를 의미하고 선재적 존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에덴동산이나 성전이나 영광의 성좌, 메시야 이름등 등 7가지가 창세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왔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본체이면서 종의 형체를 하셨다는 바울의 서신 내용과 연관되는 해석을 가집니다.

예수의 인자와 같은 선존재로 성경에서 표현된 부분을 찾아보면

요한복음에서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중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베드로 전서 1장 20절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요한 1서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히브리서 1장 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골로새서 1장 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계시록 3장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참고로 여기에서 아멘은 히브리어 암몬의 변형형태인 아몬(amon)의 잘못된 해석으로 보입니다. 아몬은 잠언 8장 30절에 사용된 창조자(장인)의 의미입니다.)
로마서 16장 25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렇게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의 선존재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이러한 중간기에 계시된 종말론적 인자의 개념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목도하고 그 증인이 된 표현입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에게 비밀을 보이신 것 입니다.

여기에 관하여 할말이 많으나 후에 때가 되면 나누고 싶습니다.

단순하게 예수의 신적 권위성은 당시의 역사적 환경에서 주님께서 만들어주셨고 그 예수를 보내시어 그분의 계시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렇기에 유일신 개념의 고대 이스라엘의 신적 관점에서 독생자 예수의 신적 존재가 형성되었습니다.)

어제 글에서 탈굼에서 말씀을 멤라라고 하였고 로고스는 이에 관한 역동적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어는 당시의 관점에서 God's expression of Himself라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The Theological Review, Volume 7 By Charles Beard p.9)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신 (역사) 말씀이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히 성경 말씀이 아닌 역동적인 살아있는 실재를 의미하고 그 실재를 목도한 증인들이 주님의 백성입니다.

단순하게 큐티나 감상적인 성경 공부가 아닌 혹은 학문적 연구로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닌 그분의 은혜로 그분 자신이 자신을 표현한 것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또한 빛이 되어 어둠에서 빛을 발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어도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패한 모습을 보시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를 스데반은 성령의 훼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역사를 목격하여도 목이 곧고 (불순종)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신명기 30:6) 순종하는 것 (신명기 10:16) 여기서는 영적인 인침을 의미합니다 (롬2장 29절))

이들은 끝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신성의 가르침에 스데반을 신성 모독으로 죽입니다.(유대인은 스데반의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그 말에 흥분하고 젊은 사울은 스데반의 신성 모독으로 처형됨에 마땅하게 여긴다고 행전은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히브리서 10장 12절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베드로 전서 3장 22절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사도신경에서 " 하나님 우편에"의 고백은 이런 영적 고백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신성을 그의 기적이 아닌 그분의 부활 후 목도하고 스데반은 성령 충만으로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고백하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는 이러한 신성을 의미하고 말씀이자 빛이신 인자 예수의 영광의 증인으로 하는 고백입니다.

신약에서 예수의 창세 전 선존재로 나타낸 것은 이러한 영광의 증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약의 모든 기자는 그들의 저서에서 이렇게 예수의 선존재를 증언합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스스로 자신을 보이시는 하나님...말씀...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생수입니다.
(전에 언급을 하였지만 유대인은 정결의식에 사용된 물을 생수로 사용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는 성장하고 영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스스로 보이신 결과입니다.

그 증인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한 우리 신앙의 선배와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 선배의 모습입니다.

지체님의 사역에 이 비밀과 영광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마라나타...
아멘

작은자 드림



오늘 글은 제가 전에 삼위일체에 관하여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어야 한다는 언급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전 글에서 마니교와 요한복음에 관한 언급을 간단하게 한 것은
마니교가 영지주의의 교리를 갖기 위하여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기독교에 기반한 교리는 (물론 그 후에 마니교가 다른 종교와 혼합하므로 그들의 교리를 더 발전하였습니다. ) 현재의 종교 다원주의와 유사한 영적인 특색을 보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 힙포의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심취한 것은 단지 우리가 단순하게 알고 있는 타락의 모습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 (많은 교회나 일반 기독교 서적에서 언급하는 어거스틴의 삶에 관하여 이렇게 단순하게 취급을 합니다만..전혀 사실과 다르게 말입니다.) 그의 종교적 깊은 사색에서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현재의 진보 교회의 영적 가르침에서 마니교의 교리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에큐메니아 영적운동이나 콥틱에서 시작한 사막교부들의 영적 교훈등은 마니교의 교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후에 때가 된다면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사실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이 (주로 초기 영지주의나 은사주의자) 자주 인용한 말씀이어서 2세기 동안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조심스렇게 인용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과 구별하는 의미로 소위 4 복음으로 언급이 됩니다.
요한복음의 깊은 신학적 의미을 나타내는 뚜렷한 편집의 구도는 좀 더 조심스러운 요한복음의 해석에 접근과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일반 주석서에 요한복음과 공관 복음의 차이에 관하여 설명이 나왔기에 여기에서는 저의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특히 요한 공동체와 연관성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와 좀 다르게 강조하거나 표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의 시간적 흐름에서 그의 가르침과 사역을 표현을 하였고 그분의 가르침은 당시의 랍비들의 가르침과 구별이 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같은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이에 관하여 공관복음서와 초기 유대교의 비교 연구에 관한 연구 서적이 매우 많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관한 저의 인상은 그분의 사역을 일상의 삶과 주변과의 관계를 인용하거나 예증을 가지면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의 사랑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이웃 사랑의 연관하여 (삶의 일상의 삶과 주변을 인용하여) 그분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하나님 왕국의 도래를 표현합니다.)

여기에 반하여 요한복음은 구약의 성전 중심의 제사 의식의 종말론적 해석으로 예수의 기독론이 매우 강하에 강조 되는 것 같습니다.(그렇기에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 좀 다르게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그의 사역을 자주 표현 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의 삶과 주변 (이웃)과의 연관성보다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피조물의 구원에 종말론적 해석에 강조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 소위 "영적 " 말씀이라는 인상이 남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상때문에 초기 영지주의자나 신비주의자가 자주 요한 복음을 인용하였습니다.

우선 세례 요한에 관하여 전 글에서 간단하게 언급을 하였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초대 기독교에서 매우 큰 영향을 가져 왔습니다.
(바울이 기독교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은 1세기 말 부터 바울에 전도에 기초한 이방 교회가 초대 교회의 전승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약에서 세례 요한의 영향력에 관하여 언급한 흔적이 많이 나옵니다.
요세푸스가 그의 유대 고대사에 세례 요한을 언급한 것은 그의 영향력이 당시에 유대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서에서 다 같이 요한의 출현을 언급한 것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그의 사역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에서 요한의 제자의 언급과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다는 간략한 언급은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초기 기독교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간략하게 표현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에 제가 초기 사마리아 전도를 언급을 하면서 사마리아 지역의 세례 요한에 관한 영향을 언급하였습니다.(사마리아 지역에 세례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초기 기독교 전승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쳤음의 고고학적 발굴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탄생 전에 직접 이름을 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삭의 경우와 선지자 호세아의 자식들의 경우 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탄생 전에 이름을 주신 경우는 그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하여 준비하신 경우라고 합니다.(호세아의 자식의 경우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그의 긍휼의 구속사를 표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삭의 경우는 족장 시대에 예수의 예표적 인물로 많이 표현합니다.)

하여간 세례 요한과 초기 기독교의 관계는 너무 깊기에 여기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 까지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가지겠습니다.

이 말씀에 뒤이어 요한이 말씀의 증인으로 언급이 됩니다.

말씀이 로고스로 번역이 된 것에 관하여 많은 해석이 있고 지체님께서도 아시기에 이 로고스에 관하여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소위 신구약 중간기에 유일신 해석의 유대교에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일신 개념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전과 다른 해석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말씀과 지혜에 관한 단어에서 신적 인격적 표현의 해석을 가지고 좀 더 발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잠언 8장 22절 이하에서 31절 가지 지혜가 신적 인격자 (인자의 개념처럼 )의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33장 6-8절에서 말씀으로 세상의 창조를 표현하면서 이사야 55장 11절에서 말씀의 신적 인격적 표현이 나옵니다.
이사야 2장 3절이나 미가서 4장 2절에서도 이런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몇몇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타자아(Alter ego of God)라고 하기도 합니다.(A Bible Approach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by G.A.F Knight P. 16)

전에 탈굼에 관하여 간단하게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탈굼은 예수 시대의 회당에서 히브리 성경의 의역의 해석을 경전으로 당시의 성경 해석 방법이나 성경의 신학적 발전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탈굼은 동방과 서방 탈금으로 분류되었다고 전에 언급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방 탈굼(소위 팔레스타인 탈굼)의 원형의 모습을 가졌다는 네오피터스 탈굼에서 말씀을 아람어 멤라(memra)라고 해석을 하였고 구약의 고고학 분야에서 유명한 미국의 W. F. Albreight 은 이 네오피터스 탈굼에서 말씀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표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한 예를 들면 출애굽기 19장 17절의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라는 말씀을 탈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맞으려고 " 라는 표현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출애굽기 33장 22절이나 이사야 6장 1절 에스겔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출현을 소위 에두른 표현으로 기록하였습니다.(이를 circumlocution for the divine name 이라 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말씀이란 단어란 의미보다 이런 당시의 신학적 이해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기원 2세기 초에 작성된 70인역으로 번역된 집회서 24장을 읽으면 이 말씀이 이런 신적 인격적 표현으로 생생하게 작성된 것을 알 수가 있고 솔로몬 지혜서 8장에서는 지혜가 이런 신적 인격적 존재로 표현 됩니다.(http://www.usccb.org/bible/sirach/24, http://www.usccb.org/bible/wisdom/8)

학자들은 신, 구약 중간기에 이러한 circumlocution for the divine name 표현이 인격적 특성을 가지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구약 해석의 특징을 간직한 탈굼에서도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우리가 언급하는 말씀으로 해석하지 않고 당시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작합니다. (이는 인자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인자는 여기에서 심판의 개념까지 확장이 됩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말씀(멤라)이란 아람어적 해석을 헬라어의 로고스로 역동적 해석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장 2절에 말씀의 목격자되고 일군이 된다란 표현과 행전에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예수를 설교하는 것이 동일하게 표현되었고 (행 8장 4절 및 11장 20절)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요한복음과 비슷한 표현으로 예수의 선존재를 나타내고 1장 25절-2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로 표현하면서 그리스도로 귀결을 맺습니다.

이를 감추인 비밀로 그는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많은 곳에서 기록되었습니다.(요일 1장 1절, 게시록 9장 13절, 골로새서 1장 15절등)

이렇게 인자의 개념과 (갈릴리 지역에서 인자의 개념의 전개와 발전)비슷하게 신적 인격적 존재의 개념들이 성경에서 해석되고 특히 신구약 중간기에서 이런 기록들이 많이 작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삼위 일체의 개념이 해석을 되어여 함에도 3세기, 4세기의 헬라의 신학적 관점에서 현재 우리의 삼위 일체 개념이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당시에 이러한 초기 기독교나 유대적 상황이 무시되거나 혹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관하여 좀 더 나눔은 매우 많은 시간을 소요하므로 후에 때가 허락하면 좀 더 나누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례 요한이 증인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요한 공동체는 세례 요한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을 계시의 비밀의 증인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공관복음보다 요한의 위치를 매우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요한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단지 옥에 갇힘을 간단하게 언급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나 집단의 강한 종말론적 특성과 요한 공동체의 종말론적 특성의 유사성을 표현합니다.(여기에 관하여는 매우 전문 신학적인 기술이 필요하기에 생략합니다.)

성령의 해석에 관하여 간략하게 논의하겠습니다.

성령에 관하여는 당시에 유대의 각 분파별로 다르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당시의 유대 신학을 대표하는 바리새인 중심의 초기 랍비 유대교는 학개 말라기 에스겔 선지자 이 후에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으셨다고 해석을 하였고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니고데모의 방문은 이런 성령의 부재의 시기에 예수께서 보이신 이적에서 성령의 임재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궁금증을 가지고 방문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현재의 인격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예언의 능력으로 자주 해석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쿰란 공동체는 종말론적 환경에서 성령을 해석하였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그들의 종말론의 실현으로 보았고 단순하게 이적이나 기적보다 이러한 종말론의 약속을 실현을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지체님이 질문하신 성령에 관하여 현재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각 종파의 신학적 입장에서 해석을 한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 자신이 성령으로 말씀을 비밀을 깨달았다고 언급했으며 요세푸스는 자신이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등극을 예언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예언을 마치 사울 왕이 예언한 것과 비교하면서 이는 구약의 선지자의 성령의 예언과 자신의 예언과 차별을 하였습니다. (바리새 종파의 성령 해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필로의 성령 해석은 유대적이지 않고 헬라화된 입장에서 구약의 성령을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관한 관계 서적은 생략합니다.)

예수를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질문은 그는 이러한 당시에 종말론적 환경에서 자신의 영적 인격적 자리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알았지만 예수를 모른다고 요한복음 1장 31절에 언급을 합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세례에 관하여 성령의 임재를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목격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도 저신도 목도함으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관하여 요한 공동체와 세례 요한과 깊은 연관성으로 이런 신학적 해석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성령의 임재를 자신도 목도하고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알게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은 후에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지 대한 궁금증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공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위상이 요한 복음과 좀 다르게 취급되었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의 종말론 신앙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준비로 그의 삶이 준비되었고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계시로 명명되었고
그의 삶에서 예수의 오심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었고 (그렇지만 이러한 종말론족 환경은 당시의 유대 전반적인 지역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햐석되기 시작하였으며 유일신 개념의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인격적 신적 표현으로 (인자나 말씀 지혜등..)발전되었고 고대 성전의 제사의식으로 만들어 진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전혀 새롭게 인간으로 나타난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만들어졌고 이러한 전혀 새로운 시대가 바로 종말론의 시대의 나타남으로 성경은 기록하였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종말론의 완성을 위한 인도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의 신적인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 예수의 사역에 관한 온전한 이해는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자신만 자신의 온전한 사명을 알고 (또한 사탄도 역시 예수의 사명을 알고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의 완성을 위해 순종을 하였다고 보입니다.

지체분의 질문인 예수를 요한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되었다고 당시의 성령은 종파마다 해석이 조금씩 달랐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은 온전하게 말씀에서 기반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의 삶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심이 성경 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특성입니다.

작은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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