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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의 기도문

작성자
매인자
작성일
2015-01-15 03:30
조회
3980
이누하님의 글을 보고 저도 좋아하는 기도문이 생각나서 올립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다시 한번 읽으니 처음 이 기도문을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던 때가 생각나네요. 뒤늦게 최춘선 목사님의 영상을 접하고 삼시를 알게 되었던 그 무렵인 것 같습니다.

이 기도문을 다시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마음에 새겨야 겠습니다.



주여!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시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 가장 행복 된 것은
구주가 제게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여!
항상 저의 약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이 가장 제게 복된 것은
크신 권능이 물밀 듯이 찾아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 이 두 가지 큰 위로가 저의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람들이 다 주님 권능만 믿고 바라게 하옵소서
이 사람들만 아니라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자들을 다 주님의 은사만 알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전체 12

  • 2022-09-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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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15 08:11

    이누하님에 이어서... 감동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정말 이 표현은 주를 경외하고 동행하는 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인듯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도 좋지만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시는 분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인것 같아 좋습니다. '이현필'이라는 분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5-01-15 09:06

    http://hwasun.grandculture.net/Contents?local=hwasun&dataType=01&contents_id=GC05601143

    한국의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라고 불리고
    기독교 수도공동체를 이끌었던
    예수의 삶과 말씀을 실천했던 분이라고 소개되어 있군요.

    죄인됨을 알 때 주님과 더욱 가까와 지고
    약함을 알 때 주님의 능력이 찾아오는

    정말 큰 위로입니다.

    죄인됨을... 약점들을... 자랑하되
    더욱 기쁜 마음으로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소서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하여 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 2015-01-15 13:57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죽고난 후 출판된 "작은 꽃들"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삶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그에게 일어난 많은 이적과 섬김의 삶을 기록한 책자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프판치스코와 비슷한 삶의 모습을 보인 20세기 초 인도의 썬다 싱의 저서를 읽었을 때 가졌던 감상과 비슷하였습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참회록이나 그가 후반기에 기독교 서적들을 읽을 때도 그와 비슷한 감상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현대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문제점에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 개혁파 지체중에 이러한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책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의 삶의 따름을 주장하지만 불교의 선종에서 언급하는 자기 성찰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막 교부들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이들의 일부는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기독론을 해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막 교부들의 전통인 "헤시카즘(Hesychasm):정적이나 침묵을 의미)에 기반한 기도나 가난한 삶의 지향의 수사들의 공동체는 현대의 지체에게 많은 도전을 제공을 할 것입니다.

    진보 교회나 개혁 교회 일부에서는 이러한 실천을 영성 운동이란 명목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통은 초대 교회의 전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관상 기도나 정적 주의가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어느 단체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가지고 정적 주의자나 관상 기도를 행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이단으로 언급을 하는데 이는 기독교 역의 시대적 흐름의 상황의 몰이해에서 나온 흑백 논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의 기독론이 이러한 관상 기도나 정적 주의의 목적으로 대치될 때 이는 분명 이단입니다.

    영성이란 신비가 아닌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 2015-01-15 15:24

      사막교부. 헤시카즘....이런 단어를 들으니

      몇 년전에 <예수는 없다> 의 저자인 오강남의 <기도>라는 책에서
      예수의 기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동방교회의 기도법으로
      짧은 단문을 반복하는 기도법인데
      불교의 염불을 외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와 같은 짧은 기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인데

      나도 한 동안 시도해 보았습니다^^
      몇 백번.. 몇 천번.. 계속 외워 보기도 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에는
      조금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그 기도를 통해 더욱 깊은 기도의 지경으로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끈질기게 해 본것은 아니지만

      이 기도 방법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조금 시도해 보다가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짧은 기도 문구로
      지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릴 때는 있습니다.

      주님 ***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기도에 대해서는 마땅한 정보가 없어서 늘 궁금했는데
      작은자님 혹시 관련하여 아시는 내용이 있으면

      귀한 나눔을 부탁드립니다^^


  • 2015-01-16 03:16

    작은자님의 분별을 위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 기도문을 올리면서 이분에 대한 소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가, 작은자님게서 지적하신 부분과 같은 이유에서 였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이분은 순결사상을 실천한다고 하여, 결혼한 아내에게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였고, 후에 부인은 개가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분명 성적 음란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지만, 성욕 자체를 악한 것 혹은 죄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셨고,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루라고 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넘어서 성을 남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결혼안에서 부부의 성관계는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따라서, 바울과 같이 특별한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경우가 아니면 무조건적인 금욕주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른 분의 글을 인용할 때 조금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네요.


    • 2015-01-16 09:59

      누구나 교리적으로 완전하지 못하지요.

      심지어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조차 온전하지 않습니다.
      찾으려면 수 많은 흠을 찾을 수 있어요.
      누구나 시대의 아들이고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고.

      이현필이라는 분에 대해서 잠시만 검색해 보았는데
      전혀 몰랐던 분입니다.
      그러나 얼핏 살펴보기에는 참 귀한 분으로 여겨지는데요.
      조금 더 이 분의 삶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이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닌거 같아요.

      천국에도
      혹시 이 땅에서의 삶에 따라
      상급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분이야 말로 천국에서 더 높은 자리에 계실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삶 아닌가요.

      때로 교리적으로 실수하고 모를 수 있지만
      예수만 바라보며 말씀대로 사는 삶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합니다.

      인용해 주신 기도문은
      사실 바울의 기도문과 같은 내용인데요...


  • 2015-01-16 08:45

    I-nu-ha님 기도에 관한 나눔에 전에도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지체께서 초대 교회의 전승에서 나타난 기도에 관한 내용을 많이 모르시고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현재 기독교 출판사에서 나오는 기도에 관한 많은 저서들이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현실에서 안타까움을 가져 봅니다.

    초대 기독교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였습니다.

    예수는 성전에 관한 개념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파격적인 해석을 하였습니다.

    모세 전통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가 가장 중요한 성전의 대표적 역할이었습니다.

    많은 목회자의 설교나 책자에서 (심지어 몇몇 주석서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의 장면에서
    환전상이나 제사용 제물을 파는 자들을 내쫒는 장면에서 예수의 이런 성전 정화 모습을 당시 성전에서 부정한 매매 행위로 비판하지만 실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성전에서 매매행위를 부정적 모습으로 예수께서 꾸짖으신 것도 있지만 그 매매 행위가 예수의 성전 정화의 주요 요인은 아닙니다.

    실제 성전에서 환전과 ( 당시의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돈은 성전에서는 거룩하지 못하기에 사용 할 수가 없어 세속적인 돈을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으로 바꿔주는 이런 환전상이 필요하였습니다) 제사용 제물 판매자도 (이러한 자도 유대인들이 먼 거리에서 제물용 동물을 가져 올 수가 없어 필요하였습니다.) 필요하였고 당시의 성전의 법규에도 필요성을 고지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정한 것 때문에 성전을 정화한 것이 아닌 예수는 새로운 계시에 의하여 성전의 제사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의 행동에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이사야 56:7 말씀인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인용하여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 이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나라의 도래를 언급한 계시였습니다.

    이는 기독론에서 그의 구속사의 역사로 성전의 제사의 예식이 필요하지 않고 제사 중심의 기능의 성전이 기도 중심의 성전 (이 성전은 예수의 사역에서 성령의 공동체로 바뀌게 됩니다.)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마태 18:20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언급하시면서 그분의 성령으로 인치인 지체가 모이면 그분이 계시는 성전이 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성전의 히브리적 사고는 신이 그곳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그 전통은 족장의 시대부터 전승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성전 정화에서 우리가 생각한 성전의 부정한 매매 행위가 아닌 그분의 메시야적 사명을 행위로 보여주신 선지자적 행동이었습니다.(선지자는 어느 경우는 그들의 행위로 주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구약의 선지서에서 이런 선지자의 예언적 행위의 모습을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기도에 관하여 성전의 제사 의식을 대체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적인 요소로 언급하였습니다.

    성경에서(특히 신약) 언급된 기도에 관한 우리들이 당시의 역사적, 종교적 상황의 종말론적 신앙의 통시적 관점을 모르고 함부로 해석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는 많이 배웠고 그것이 성경적인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앞으로 작성할 종말론적 단상에서 초기 기독교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글을 때가 되면 나누겠습니다.
    (전에 언급한 개인적 메일은 하늘 씨앗의 운영자님의 글이 공표된 후 나누겠습니다.)

    매인자님이 기도문에 관한 조심할 내용을 잘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신앙의 많은 선배들이 신비주의로 나간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소위 평양 대부흥에 사용되었다는 길선주 장로(후에 목사)는 당시 일제 치하의 한국의 독립과 계몽에 관심을 가지다 삼일 운동 후 좌절에서 그는 신비주의로 신학적 관점이 바뀌었고 급격한 종말론주의자가 되어 말세학 강의를 하며 요한 계시록을 1만번이나 읽고 또한 평양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사회나 인간의 변혁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권능으로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통적인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것은 성경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따른 것이지만 그렇지만 그와 더불어 성경의 종말론적 신학에서 강조한 아버님 역사의 떄를 기다리며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주 앞에서 그리고 공동체에 최선을 다하는 실존적 삶보다 급진적 종말론으로, 현실을 도외시한 신비 주의로 그의 신앙을 마무리 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성경의 말씀에서 우리의 실존적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2015-01-16 09:49

      작은자님의 글의 내용중...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을
      ‘성전의 부정한 매매행위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요인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을 행위로 보여주신 선지자적 행위였다는 말씀에는...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을 보여주신 행동이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디고 해도

      성전정화 사건은
      심각한 종교부패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지요.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굉장히 온유한 듯한 예수님께서
      유난히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시는 때가 있는데

      바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이나
      부패를 목도할 때였다는 것을 봅니다.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에덴에서 사람을 유혹한 것이 뱀임을 고려하면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이야기 이지요...

      종교지도자들이 듣기에는 끔찍한 말이었을 거예요

      작은자님 댓글에...

      실제 성전에서 환전과 (당시의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돈은 성전에서는 거룩하지 못하기에 사용 할 수가 없어 세속적인 돈을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으로 바꿔주는 이런 환전상이 필요하였습니다) 제사용 제물 판매자도 (이러한 자도 유대인들이 먼 거리에서 제물용 동물을 가져 올 수가 없어 필요하였습니다.) 필요하였고 당시의 성전의 법규에도 필요성을 고지하였습니다.

      물론 실제적인 필요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당시의 극악한 종교부패는
      그런 실제적인 필요를 교묘하게 노골적으로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고고학이나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한 결과로 드러난
      당시의 성전에서의 환전과 매매행위는
      실로 참람한 종교부패의 현장이었지요

      성전은 대제사장, 유대교 지도자들의 황금밭이었습니다.

      로마의 화폐는 황제의 형상이 담겨있어 성전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환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무시무시한 환율을 (심지어는 10배까지) 적용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 아닙니까...

      희생제물을 가지고 먼거리를 이동하다보면 제물이 다치기도 하는데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제물로 인정해주지 않고 (제물을 검사하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흠 없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물을 구입하게 될 때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엄청난 폭리를 취했으며
      성전에서 구입한 제물은 흠없는 제물로 무사 통과시켜주고

      성경의 제사가 의식화 되는 과정을 악용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엄청난 돈을 긁어 모으게 되는데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이먀 말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돈줄을 위협하는 일이었지요
      기득권을 버리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결국은 예수께서 죽음에 넘겨지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유난히 과격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특히 종교적 위선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맘몬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파는
      교회와 목사들에 (신자들까지) 대한 엄중한 경고라고도 보여지네요.

      어쨌든...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이
      성전에서의 부정하고 부패한 매매행위에 대한 비판이 주요내용이 아니라는
      작은자님의 설명에는 그대로 동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전정화 기록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내 집을 강도의 소굴 (공관복음), 장사하는 집 (요한복음)으로
      만들지 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폭력(?)까지 휘두르시는 모습이지요.
      예수님의 엄청난 분노(마땅한 의분이겠지만)가 느껴지는 데요.

      이렇게 성서에서 분명하게 언급한 내용은
      내용 그대로 받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요.

      물론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선지자적 행동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 할 수 있습니다.


  • 2015-01-16 12:35

    형제님의 이러한 논의는 많은 지체님들이 생각하시고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좀 자세히 언급을 하겠습니다.

    성전 환전상의 역할은 당시의 예루살렘의 경제에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성전에 관계된 사람들이 성전의 환전상의 제사용 동물을 판매하는 자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취하지만 당시에 성전에서 얻어지는 수입의 대부분은 성전에 바치는 종교세입니다. 이러한 환전상과 제사용 동물에서 얻는 이익이 많다고 하는 것은 과정된 해석입니다.
    환전상이나 제사용 동물에 관계된 장사에 연관된 사람에게서 얻은 이익이 성전에 연관된 당시의 사두게파의 절대적 수입에 비교할 때 매우 적습니다.

    환전상을 당시에 shulḥani언급을 하였고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는 단지 성전에서 환전 뿐 아니라 그들의 이러한 수입을 성전의 권위자에게 전달하여 안전하게 저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금융에 관게된 행위는 당시의 예루살렘의 경제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였다고 합니다.(현대의 은행의 금고 역할)

    유대인의 종교적 법률을 규정한 예루살렘 탈무드의 Sh'ḳalim이란 문서( 이 문서는 성전의 행정등에 관하여 율법적 설명을 작성한 문서입니다.)에서 환전상이 취하는 이익은 4-8 비율이었습니다. (참고 Shek. 1:6) 그리고 그러한 이익을 일반적으로 kolbon이라 칭하였습니다.

    당시의 성전 환전상은 단순히 성전에 필요한 돈으로 바꾸는 것만이 아닌 순례자가 가져온 큰 돈을 작은 단위의 돈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거의 현대의 은행에서 관계된 일과 비슷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성전의 도시였기에 예루살렘의 경제적 기반은 이러한 성전에 관계된 사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교회 건물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성전 환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이러한 당시의 역사적인 종교 경제 정치적 상황의 정보를 잘 모르기에 이러한 해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전을 내 집을 강도의 소굴, 장사하는 집으로 부벙적으로 언급하신 것은 당시의 종말론적 종파인 쿰란 문서에도 이러한 유사한 성전의 부정적 시각을 가진 언급이 잇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여러 종말론 종파(예수 운동도 당시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종파의 한 부분입니다.)에서는 당시의 성전의 정화가 새로운 메시야의 도래를 알리는 징후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공관 복음에서는 예수의 성전 정화를 예수의 사역에 뒷 부분에 편집한 것은 공관 복음의 신학적 특징인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야의 정체성을 복음서의 뒷 부분에 나타낸 편집사적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공관 복음에서는 초반 예수의 사역에서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의 구원사의 계시의 정체성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시는 내용으로 편집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요한 복음은 예수의 성전 정화를 그의 사역에 앞 부분에 둔 것은 요한 복음의 신학적 특징이 공관 복음과 좀 다르게 그의 사역 초기에 강조한 기독론의 강화를 위하여 앞 부분에 편집을 하였습니다.(이는 요한 복음의 1 장에서 요한 복음의 저자는 초대 원시 기독교의 기독론을 선포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기독론이 강조된 신약의 말씀은 요한 복음과 히브리서입니다.
    (구원론의 강조한 아더 핑크가 요한 복음과 히브리서를 강해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흥미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공관 복음은 예수의 구원사의 정체성을 뒷 부분에 두고 요한 복음은 처음 부터 구원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편집적인 특징이 있고 예수의 성전 정화는 이러한 신학적 편집에 맞게 공관 복음은 뒷 부분에서 요한 복음은 앞 부분에 구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편집의 형태에서도 예수의 성전 정화가 단지 부패의 문제가 아닌 종말론적 메시야의 선지자적 행동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성된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각 복음서의 저자의 신학적 흐름을 이해하면 좀 더 복음서의 편집된 흐름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언급한 성전정화 사건이 단순한 매매행위에 대한 비판이 주요내용이 아니라는 주장은 단순히 저의 견해가 아닌 현재의 대부분의 신약 성서학자들이 동의하는 의견입니다.

    단지 이 성전 정화에서 예수의 역할이 종말론적 선지자인지 논의인지 (E. P. Sanders의 예수와 유대교 저서에서 언급)혹은 왕의 주권인지(열왕기하 12장 2-17절)(J. Jeremias의 언급) 논의는 학자마다 좀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 처럼 부패 문제가 성전 정화의 큰 원인이라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일반 지체들이 목회자의 설교나 일반적인 상식에서 취득하는 정보나 판단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Robert Gundry의 저서인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Chapters 9 - 16를 참조하시면 예수 성전의 종말론적 행위에 관하여 좀 더 쉽게 이해 하실 수가 있습니다.


    • 2015-01-16 15:43

      오랜 동안 성전과 연관된 종교지도자의
      부패문제에 대한 설명을 계속 들어와서 인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은 있지만...

      작은자님의 설명을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현대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럼에도 심정적으로는
      오늘날 맘몬에 사로잡힌 교회의 현실 때문인지
      성전의 부패를 향한 예수님의 분노라고 여기고 싶은
      생각의 흐름 경향 그런 것이 내게 있는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 2015-01-18 13:27

    성전의 부패도 큰 문제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당시의 종말론 분파들은 확연하게 성전의 정화를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인식을 하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이적과 예수의 행동을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서술하였습니다.

    현대의 많은 목회자나 성서 연구자가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을 단순하게 치유, 이적, 종교적 윤리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복음서의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의 많은 부분의 해석이 단순하게 상식의 관점이나 상상으로 해석한 설교나 저술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학술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닌 성경을 단지 읽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주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혹은 지적 만족이나 감상적 만족 혹은 교회내에서 성경을 많이 알고 있음으로 종교 권세를 행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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