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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독교, 예수, 그리고 주님의 자녀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5-01-09 13:34
조회
3262
개독교, 예수, 그리고 주님의 자녀 

1. 개독교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1서 2장 29절)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요한1서 4장 5절)

현재 한국에서는 많은 비기독교인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나 예수의 가르침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행전 24장 24절에서는 초기 기독교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 라고 언급을 하였고,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방에서 발견된 초기 필사본의 파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작성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가장 많은 회당이 존재하였다.)

“ 배교자(meshummadin)에게 우리 시대에 소망이 없게 하시고, 그들의 오만한 왕국이 신속히 뿌리가 뽑히기 하소서. 즉시 나사렛당(Nozerim)과 그 이단(minim)들을 멸하소서 , 그들이 생명의 책에 의로운 자로 기록되지 않고 그 책에서 지우소서. 오만한 자를 제압하시는 주님께 영광이 있습니다”(참고Textual Sources for the Study of Judaism By Philip S. Alexander)

초기 기독교는 이렇게 외부에서 나사렛당이란 이름으로 혹은 내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라 불리웠다. 행전에서는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그리스도인이라 처음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지체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였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전11장 26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 전서 4장 16절)”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자나 그의 가르침을 예수의 고향의 이름이나 기름부은 자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인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그리스도와 연관을 하여 불렸다.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를 언급하는 개독교란 단어는 이러한 지명이나 원어의 음차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닌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비하하는 단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깊은 자성의 시작은 현재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가르침과 그리고 교리적으로 우리가 배운 구원의 예수에 관하여 성경적 관점에서 고민하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선 한국의 많은 지체들이 성경에 관하여 그리 깊이 묵상하지 못하거나 연구하지 않는 점이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과 현재 많은 목회자에게서 선포되는 그릇된 가르침이나 교리의 제한성을 비교 분별하지 못하는 시각을 갖게 한다.

소위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말씀 연구나 그러한 자세를 바리세인적 이라고 쉽게 언급하고 (실제 그들이 성경에서 바리세인적이란 예수의 비판을 이해도 못하고 있지만) 감정적 자세나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된 것을 주님의 계시의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초기 기독교에도 똑같이 있었다.
소위 영지 주의나 유대 신비주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와 복음의 전통을 훼손하고 어리석은 지체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갔다.

신약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디모데 전서 1장 4절)”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디도서 3장 9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유다서 1장 8절)"

이 말씀은 당시의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관한 바울과 유다가 직접 그의 동역자에게 주의를 요구하는 조언이었다.

현재의 목회자의 사역과 비슷한 당시의 직분은 장로 혹은 감독이라는 직분이다.(이 장로란 직위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위치로 고대 근동 지역의 종교, 사회, 문화적 전통이었다.

초대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여 장로란 직분을 두었고 감독은 장로의 전통적 기능을 헬라 문화에서 좀 더 강조한 단어이다 .), 장로와 감독의 직분이 좀 더 조직적으로 확대되어 만들어진 직분이 주교(bishop)라는 직분으로이 단어는 노예를 다스리는 자 혹은 무리들의 우두머리라는 헬라어적 의미(에피스코포스)에서 나왔다.

유대적 전통에서는 회당의 전체적 운영을 주관하는 회당장의 직위와 쿰란 문서인 공동체 규칙서에서 언급된 파키드란 직위이다. 이 파기드의 역할은 새로운 신자나 공동체의 관리, 운영과 함께 선생이나 목자의 역할을 하기에 현재 교회의 목회자의 직분과 매우 유사하다.

한국 교회에서 유난하게 자신을 주님의 제사장이라 하는 자칭하는 목회자는 그들의 호칭이 매우 비성서적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성서적 배경에서 나왔다. (참고로 외국에서는 목회자가 주의 제사장이란 개념이 없다. 만일 지체의 교회 목회자가 자신을 이런 호칭으로 불러지기를 원하는 자이면 그 교회를 나오라고 권하고 싶다.)

속사도 시대나 교부 시대 이 전에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목회자(지도자, 혹은 선생)의 문제점을 어떻게 치리하였는가?

이러한 자세한 기록은 바울의 목회 서신서에 자세하게 언급이 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에베소 교회의 후메내오, 알렉산더, 빌레도 등이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디모데전서 1장 20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디모데후서 2장 17절)”

여기에서 후메내오의 이름이 전, 후서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오랜 기간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들을 공동체의 지도자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지도자가 주는 공동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디모데서와 디도서에서 장로나 감독의 선택에 관한 조언을 동역자에게 제공하였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디모데 전서 3장 1-3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디도서 1장 7- 9절)”

이렇게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선택에 있어서 바울은 “지도자는 선한 일을 사모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책망할 것이 없고,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고, 선행을 좋아하며,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지키는 자야 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목회자들의 삶과 바울의 지도자의 조건으로 언급한 말씀을 비교하여 보자.

이러한 문제의 목회자는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에 관한 비평을 금하는 것은 성경 말씀과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자세한 영적 분별과 판단을 하지 말라란 성경적 나눔은 다음 글참고하기 바란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의 장로의치리 문제에 조심스렇게 접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디모데전서 5장 19절, 여기에서 두 세 증인의 요구는 구약의 율법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도 문제의 지도자를 치리하는 것에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그들의 치리를 언급하는 말이 바울의 가르침 속에 있다.

그러면 공동체의 문제는 단지 지도자의 문제로만 국한 될 것인가?

바울은 이러한 공동체의 문제점에 있어서 구성원의 문제점 역시 지적한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디모데 후서 3장 6-9절)”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는 단지 성의 구별을 의미하는 생물학적 여자만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바울의 이 경고의 말씀은 사도들의 전통과 다른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함으로 성서의 말씀에 서 있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으로 자신들의 귀에 즐거운 설교만 듣는 공동체의 구성원에 관한 경고이다. 이들은 이러한 미혹은 신, 구약 전반에 걸쳐 욕심에서 기원한다고 언급한다.

바울은 이러한 어리석음에 이끌린 자는 끝내 믿음에 관하여 버림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그들의 영적 지도자와 함께 구성원의 깨어남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많은 공동체는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진정한 복음을 외면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자의 가르침이 공동체에서 주의 말씀이라는 거짓 속에서 선포되고 그 악한 열매는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라 불리우게 된 결과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주장과 세상의 악한 법칙을 그대로 적용한 강단의 선포에서 이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기독교 역사에서 잠시 언급하면
로이드 죤스 목사는 그의 책에서 성령은 감정적, 지적 모든 우리의 전 인격에 걸쳐 조명하신다라고 언급하였다.

영국의 브리스톨 (Bristol) 지역의 중북부 지역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고 나서 많은 술고래 사람들이 지각이 각성되어 책을 읽기 위하여 학교에 등록하고 교육열도 함께 생겼다고 그의 책에서 언급을 하였다.(참조: 로이즈 죤스 성령론 ,홍정식 편역)

한국 교회의 은사파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인간의 감정적 각성이나 몸의 이상 현상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

환상, 방언, 입신..

사실 이러한 현상을 현재의 뇌신경계의 과학적 지식으로 얼마든지 설명을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런 현상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이상 현상의 해석학 관점에서 성령을 역사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상 현상은 당시의 종말론 관점에서 종교,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더욱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소위 성령 현상중 대부분은강박적인 종교, 심리적인 상황에서 신경계의 일시적 이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관하여 오랜 기간동안 개인적 조사를 하였고 어느 정도 정리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후에 때가 되면 언급을 하겠다.)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또한 그의 임상적 경험과 사역의 현장과 학문적인 연구로 이러한 감성적 원인으로 인한 현상과 성령의 일하심의 구분을 다음의 사례로 언급하였다.

소위 신비주의자들이 언급하는 내적 조명에 언급을 하면 그들은 (신비주의자) 성령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귀의 귀계의 영향아래서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느낌과 충동, 그리고 자기들의 영적 감응에 의하여서만 살게 된다는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갑자기 내가 깨달았다” 또는 “나는 갑자기 인도함을 받았다. 어떤 느낌이 내 마음에 올랐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신앙의 주관적인 영역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기록되어진 성경 말씀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성령만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언제나 자기 속에 계셔서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영역에서 살고 기분과 느낌, 감정 상태에 큰 비중을 둔다.”

이렇게 로이즈 죤스 목사는 은사만을 주장하는 무리와 신비적 상상에서 사는 무리들에 관하여 이러한 비평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도 성경과 기독교 역사적 관점에서 성령의 역사에 관한 올바른 선배들의 가르침과 사사로운 본인의 경험에서도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주관적인 영역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에서 앞에서 언급한 “갑자기 내가 깨달았다” 또는 “나는 갑자기 인도함을 받았다. 어떤 느낌이 내 마음에 올랐다" 란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이 전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개인적 상상이나 주관적 영역에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경고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에서 그리고 오랜 시간과 주변의 진정한 주의 지체의 증언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남을 검증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는 다른 사례를 들면서 성령의 역사를 예증을 들었다.

“19세기 말 웨일즈의 데비드 몰간(David Morgan) 는 같은 웨일즈 출신의 험프리 죠네스 (Humphery Jones)의 설교를 듣고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그날 밤 보통의 데비드 몰간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자 다음 날 아침 사자가 된 기분으로 일어 났고, 내가 성령에 충만람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기록을 하고 그 후 2 년 간 놀라운 사역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의 인도하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 년이 지난 어느 날 경험을 그는 이렇게 또다시 기록하였다.

나는 어느 날 밤 내가 2 년 간 누렸던 능력으로 충만하여 사자처럼 잠 들었으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 날 때 나는 2 년 전의 데비드 몰간으로 돌어간 것을 알았다.’

그후 그는 15년간 평범한 목회를 하고 주님 앞으로 갔다.”

데비드 몰간의 이러한 신비한 경험은 그뿐 아니라 20 세기 초의 중국 선교의 송상절 박사의 기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고백을 읽을 수가 있다. ( 송상절 박사에 관하여는 여기에)

사실 성경의 바울 서신서의 기록에서도 바울의 능력이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매우 객관적인 확신하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일을 하신다.

성령의 역사의 분별에 관하여 여러 언급과 주장이 있으나 지금까지 개인적 여러 고찰과 경험에서 오직 성령의 조명하에서 성경의 깊은 묵상으로 분별하는 것이 초대 사도들의 영적 분별과 같은 영적 계승임을 고백한다.

그렇기에 깨끗한 손을 가지고 말씀의 연구에 더욱 깊은 자세를 갖고 주신 교훈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더이상 개독교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진정한 복음으로 우리가 삶에서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인도자들의 주장에 항상 깨어서 구별하는 귀를 가져야 한다.

아래 동화상은 몇 주전 한국에서 현재 상영되는 다큐 영화” 쿼바디스”의 예고편이다.

이 영화에서 주장하는 내용 전부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한국 개독교의 현 주소를 적날하게 고발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언급한 사건의 내용은 전부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주의 제사장이고 주의 종이라고 많은 지체들을 오도한다.
자신들의 사욕과 정치, 종교적 권력의 바벨탑을 위하여 한국의 공동체를 우민화시킨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개독교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모습이다.

참고로 본 나눔은 종말론 단상을 준비하면서 작성한 글로 “개독교, 예수, 그리고 주님의 자녀”의 첫 부분이다. 전에 예고한 종말론 단상의 글과 함께 앞으로 이곳에서 나눌 예정이다.



 

쿼바디스 영화 감독의 자신의 영화 설명



 

 
전체 4

  • 2015-01-09 14:48

    늦은 시간에 편집을 하기 위하여 잠시 이곳을 방문하고 그리고 최근의 iezzang님의 이곳에서 여러 분과 논의 한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도 iezzang님과 비슷한 성향의 지체들과 나눔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덕이 되지 못하다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처음 저의 글에 댓글을 작성하면서 조용기, 최자실 목사가 대단한 주의 종이라고 언급한 것을 읽었습니다. 아마 순복음 계열의 신학교를 마치신 목회자가 아닌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기에 제가 작성한 이 글이 좀 마음에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분별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신다고 하셨는데 어떤 분별인지요?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에 다른 곳의 논의한 자리에서 혹은 iezzang님 같은 목회자의 실제적 만남에서 저는 사실 안타까움만 느꼈습니다.

    지금 하시는 사역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라면서
    단지 주님의 은혜만을 있기를 바랍니다.


  • 2015-02-03 08:49

    교회 안나가는 성도 일명 "가나안성도"를
    10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는 내용을 들었는데...

    교회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함께 세워나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임을 생각하면 "가나안성도" 현상은 결코 건강한 현상일 수는 없을 겁니다.
    성도로서 성장하고 하나님나라의 사명자로 살아가는 존재방식은
    오직 교회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겠지요...

    언제부터인가 너도 나도 한국교회의 부패와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솔직히 희망을 이야기 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지요.

    언젠가는 변화가 올까요.
    낡은 부패한 체제가 무너지는 때에는 많은 유랑민들이 생기게 됩니다.
    "가나안성도"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아닐지...

    대량의 유랑민이 발생하면 낡은 체제를 유지하는 재정공급자들이 사라지면서
    변화가 오게 될지도 모르겠네요...물론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교회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끄러움 조차 못 느끼는 장님들도 수두룩하지만...

    질병은 드러나야 치료할 수 있지요.
    쿼바디스를 비롯하여 여기 저기 너도 나도 교회의 부패를 이야기 하는 지금
    회개하라 외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는 이 때가 기회가 될 수는 없을지...

    아니면 이 부끄러운 수치를 우리 시대가 더더욱 가혹하게 견디고 난 후에야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께서 회복의 기회를 주실지도

    예전에는 늘 비판의 날을 세우기 십상이었는데
    요즘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도 확신이 부족합니다. 믿음의 문제이겠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바라시겠지요.


  • 2015-02-04 10:30

    같은 마음입니다. 우선 저 자신의 영적 각성과 저의 가정, 지역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최근에 루이스 부흥 관련 영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몇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폐하실지 재활용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시기를 앞당겨 주시기만을 빌 뿐입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 안에 그런 갈망이 진정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2015-02-05 08:08

    인간이 포기할 때 주님은 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저의 짧은 광야에서 (12 년이면 짧지는 않지만..) 그분은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살펴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그분의 약속을 꼭 이루시더군요..놀랍게...그렇기에 이렇게 악한 회의론자가 조금 씩 눈을 뜨는 것 같습니다.

    저의 짧은 간증이지만
    주님은 항상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물론 그분의 택한 백성에게)
    진정 그분의 말씀안에서 삶을 고민하는 지체에게
    항상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그분의 역사와 비밀을 보이시는 것을 짧은 광야에서
    목도하고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

    이제는 그분께서 직접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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