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상담, 질문과 답변, 토론, 자료 추천 등이 이루어지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끝)

작성자
이누하
작성일
2015-06-11 17:41
조회
3456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5)
-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토론의 장을 열어 달라고 한 죄로 지금 이렇게 열심히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문득...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 교회에서도 집사임명에도 가끔 탈락하는 데다가, 솔직히 명료한 사고와 글쓰기 훈련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경건 서적류는 제법 읽었지만 아직도 조금 어려운 책은 읽기에 버거운 수준입니다. 하니 그 수준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더구나 짧은 시간에 무지하게 써 나가는 글이라 거친 구석도 많지요^^ 시간이 나면 언제 이 단락과 관련한 내용을 조금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 놓을 필요는 느낍니다.
이번에 작성한 자료를 기본으로 보충하고 정리해 놓을 생각입니다.
읽어 주시느라 고생들 많으십니다^^

지난 글에서 롬7장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들을 살펴 보았는데
그 근거들에 대한 반론을 이야기 해보지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1. 가장 많은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은 갑자기 시제가 현재형으로 바뀐다는 것

7장 14절부터 갑자기 시제가 과거형에서 현재형으로 바뀝니다.
문법대로 시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읽으려면 현재 바울의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현재시제는 과거의 어떤 사실을 보다 드라마틱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한 문체상의 기법이라는 설명이 있으며 나름 가능한 설명이지요. 이런 기법은 실제로 많은 문장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로이드 존스는 이런 기법으로 자주 설교한다고도 말합니다.

이한수 교수가 로마서주해를 한 책이 있는데 많이 두껍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 책에서 롬7:7~13은 바울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죄와 율법과 사망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롬7:14~25는 바울이 현재시제 동사를 사용해서 죄와 율법과 사망의 삼각관계를 보다 개인적이고, 실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시제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설명은...
바울에게는 과거 바리새인 때의 경험이지만 이 경험은 단지 바울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지요 율법 아래의 이스라엘의 경험이기도 한데,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나아가 아담적 인류에게는 이 단락에서의 묘사가 분명히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또 하나,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연속성도 있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 롬7:14~25이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신자들도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는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므로 늘 갈등하기 마련이고 때로는 싸움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수없이 경고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현재시제는 율법아래의 불신자들의 삶을 절망적으로 설명하지만 신자들도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부정적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겁니다

찰스피니는 기본적으로 이 단락이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이지만 구원 받은 후에 타락하여 종교적 형식만 남아있는 타락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으며, 완전 타락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죄에 일시적으로 무너진 신자들은 이 단락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시제는 이 단락을 난제로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증을 뒤집을 정도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점은 아닌 부수적인 문제라고 보여지고 이상의 몇 가지 설명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시제가 현재라고 반드시 현재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생각입니다^^

2. 죄 아래 팔린 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죄 아래 팔렸다는 의미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나는 육체에 속했고 죄 아래 팔렸다”
는 진술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바울이 강력하게 천명하는 진술과 정 반대되는 말이니까요.

바울은 계속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된 존재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에서는 죄에 팔린 존재라고 말을 하니...당혹스럽겠지요
당혹스러우면 성경의 진술을 그대로 받으면 되는데...자꾸 이상한 이유를 생각해 냅니다.

그들이 찾아낸 설명은, 신자도 죄와 투쟁을 하는 가운데 때로는 죄를 짓는데,
그 순간에는 죄가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일시적으로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일시적으로 죄에 넘어졌다고 해서
스스로를 죄 아래 팔렸다고 (죄의 노예라고) 토로할 수 있을까요?

신자는 죄에게 장악되어 피치 못하게 죄를 짓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자에게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할 자유도 있습니다.

신자가 저절로 자동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자는 선택해야 합니다.

죄의 노예인 상태에서는 죄에 팔린 상태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야 합니다.

신자가 죄에 넘어지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은 성령에 순종하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지
불가항력적으로 죄에 팔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죄에 팔려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단지 죄사함 받은 것 뿐 아니라 죄를 이길 능력을 얻은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팔렸다 죄에 해방되었다 다시 죄에 팔리고...
이렇게 정체성이 오락가락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팔려서 죄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에 팔린 자이고 육신에 속한 자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온 구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복음이 능력이라는 선언은 무엇이며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영광스런 진술은 또 무엇입니까

바울처럼 성숙한 신자가
나는 육체에 속하였고 죄에 팔렸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복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가짜입니다.

3. (7:22) 속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 한다. (7:25)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결코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즐거워 한다는 것이지요.

나도 오랫동안 칼빈주의 전적부패의 교리에 익숙해서 인지 강력한 주장처럼 여겨지더군요^^
그러나 교리의 안경을 끼고 성경을 대하면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절정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들을 보십시오. (시편1편, 시편 119편)

시편 19편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여호와의 교훈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찬란하여 눈에 빛을 주는구나

물론 그들은 구약의 신실한 사람들이지만 어차피 그들도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전의 사람들 율법 아래의 사람들입니다.

존 스토트는 그래서 롬7장을 구약의 신자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그렇게 결론을 내리더라도 성령이 내주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이전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율법을 사랑했을지 몰라도 율법을 지킬 능력은 그들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58:2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 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막 6:20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을 괴로워 하면서도 달게 들었습니다.
마 13:20 돌 밭에 뿌린 씨...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 들입니다. (참 신자가 아닙니다)

로마서 앞 부분에는 이런 진술이 나옵니다.
롬2:17~18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유대인들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완벽한 계시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향한 열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을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이전에는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한편으로 율법을 지닌 이스라엘만 선한 것을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욕망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더 좋은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승인한다. 그러나 나는 더 나쁜 것을 쫒는다“

바울의 진술에는 당시의 헬라의 도덕주의자들, 즉 그리스도 밖에서 선한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방인들의 경험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속사람으로 율법을 즐거워 한다는 언급때문에 이 단락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내 세우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보입니다.

4. 7:24의 탄식이 8;23의 탄식과 동일 하다는 주장
롬 8:23 신자가 미래에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나 7:24에서의 몸은 ‘사망의 몸’입니다.
결국 내게 사망을 가져다 주는 몸이라는 뜻이지요

지금 부르 짖는 탄식은 미래의 구원을 열망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나의 삶의 곤고함에 대한 부르짖음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탄식이 아닙니까?

5.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묘사는 아니라는 것

롬 7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형적으로 계속 죄에 패배하는 삶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계속해서 죄를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바울 자신의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고.
신자가 죄와 싸우지만 전술적으로 패배해서 고통스러울 때, 그리스도인으로써 실패에 정직하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는 완전주의라는 파괴적인 교리에서 사람들을 구하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 (존 파이퍼)

물론 그리스도인이 죄와 갈등히며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진술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단락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는 곳까지 마음대로 해석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바울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 없는 뜬금없는 유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6. 회심 이전에 율법과 관련해서 바울이 분열과 괴로움을 겪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

롬 7장이 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의 경험이라면,
성경에는 회심 이전에 바울이 이런 갈등했다는 설명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바울은 율법적으로는 갈등보다는 오히려 확신에 차 있었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울은 롬7:7 이후에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계명 때문에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며 앞만 보고 내 달렸지만, 탐심이라는 계명 앞에서
바울이 아무런 분열과 내적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요....

7. 롬7장의 묘사는 율법과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묘사한다는 주장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즉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죄의 포로가 된 상태라는 것을 온전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런 비참한 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 롬 7장의 이 비참한 상황은 비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고백하기는 불가능 하겠지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깨닫게 되는 비참한 실존의 묘사입니다.
그 주장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묘사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아닙니다.^^

롬 7장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 이전의 (율법 아래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지금 화자인 바울이 회심 이후에 그리스도인 이후의 관점에서 비로서 율법하의 이스라엘, 혹은 아담적 운명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기에 신자의 시각이 당연히 나타나는 것이지요

8. 갈라디아서 5:17에서도 이 단락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

갈라디아서의 표현과 얼핏 유사해 보이지만 표현되는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전혀 다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지만 이는 신자가 인격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분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며 육체의 행실로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는 엄중한 경고가 뒤 따르지요
갈라디아서에서 신자는 성령으로 행한다는 명확한 진술이 있습니다.

롬7장의 묘사된 사람처럼 죄에 넘어지는 삶이 일반적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와 롬7장은 같은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는 신자의 삶이요 (물론 신자는 성령을 따르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롬7장은 율법 아래에서의 삶입니다.

9. 25절 상반절에 위치한 “감사하리로다”에 대해서

25절 하반절은 7:14~25 내용의 요약이 맞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율법아래 삶)”
그런데 25절 상반절에 “감사하리로다”라는 진술은 도데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25절 상반절)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25절 하반절)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마도 롬7장의 가장 큰 난제일 것입니다. 도무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이 문제 구절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즉 25절의 상반절 감사하리로다...를 25절의 끝으로 임의 이동하여 8장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시도인데, 모든 사본적 증거에 의하면 억지스러운 방법입니다.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한데...
그리스도 이전의 비참한 실존을 묘사하는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감탄사라는 거죠.

율법 아래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곤고한 삶을 묘사하는 가운데 그 곤고함의 절정에 이르자.
그 비참함에서 해방된 복음의 능력,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생각하니
감격스런 감탄사가 터져나온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즉 논증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불쑥 삽입해 들어온 바울의 경탄!!!이라는 것입니다.

해석이 안되니까...삽입된 감탄문이라고 억지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율법 아래의 곤고한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되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저는... 이 갑자기 터진 감탄사라는 설명에 박수가 나왔습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여겨집니다.

10. 이제까지 롬7;14~25절이 신자의 경험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간단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오랜 논쟁이 있었던 본문이기에 어지간한 해석의 방법들은 이제 다 나와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중 어느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현재시제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근거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임을 나타낸다는 고든피의 주장에 완전 동의합니다. 최근의 성경주해가들 다수가 이런 견해를 취한다는 것도 너무 당연하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은혜이고 구원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도록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바울은 계속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자신을 종으로 내주지 마라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른다 (롬6:15~16)

바울은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그런 바울이
그와 정 반대되는 진술을 문맥과 목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진술했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롬7장에서 율법을 변호하면서 죄에 대한 율법의 무능함과 율법아래의 삶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롬8장의 영광스런 진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롬7장의 이 단락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면 도대체 논증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논증의 흐름과 문맥, 본문의 결정적 진술내용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이 단락이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에 대한 묘사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제 논리로는 그렇습니다)

롬7장은 팀 켈러의 언급처럼 죄를 강박적으로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의 소망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구원에서 떨어집니다
그는 마지막 심판을 견뎌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죄된 삶으로 그의 믿음이 결국은 참된 신자 참된 믿음이 아니었음을
하나님 앞에서 알게되는 비참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분명한 논증에도 불구하고 전혀 말도 안되는 듯한 해석에 빠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중 하나로 칼빈주의 라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리를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태도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스스로도 모르게 깊이 빠져버린 잘못된 습관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우리를 해석하도록 성경이 우리를 변화 시키도록 성경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경험과 우리의 형편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고,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경험으로 성경을 판단합니다.
자꾸 스스로 도망갈 궁리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행함에 대한 강조에 "행위구원론자" "율법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보다
우리의 경험, 우리의 삶이 한심하고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말씀을 나의 경험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처럼 이런 하향평준화는 복된 소식이 아닌 죽음의 속삭임이고
복음의 능력을 단지 말의 능력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고
당장의 안심을 위해 영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의 죄입니다.
그런 믿음에는 죄에서 해방되는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전체 1

  • 2015-06-11 17:52

    지난 7-8년동안 성경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성경구절중 하나로 관련자료를 열심히 찾아보면서 내린 결론이기는 하지만...여전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잠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견해가 있다면 듣고 싶네요...^^


전체 105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온라인 서점 배본 (26)
웹섬김이 | 2018.03.27 | 추천 1 | 조회 3374
웹섬김이 2018.03.27 1 3374
59
참포도나무 (요한복음 15:1-15) (25)
peace | 2016.04.12 | 추천 0 | 조회 1828
peace 2016.04.12 0 1828
58
'요한공동체교회'(가칭)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4)
peace | 2016.04.11 | 추천 0 | 조회 2361
peace 2016.04.11 0 2361
57
예배처를 구합니다(응답! 감사!) (1)
peace | 2016.04.04 | 추천 0 | 조회 1831
peace 2016.04.04 0 1831
56
제1회 사경회 (5)
peace | 2016.01.19 | 추천 0 | 조회 2275
peace 2016.01.19 0 2275
55
영적 인도자의 길
peace | 2016.01.19 | 추천 0 | 조회 2128
peace 2016.01.19 0 2128
54
개선된 2016판 성경읽기표입니다.
peace | 2015.12.31 | 추천 2 | 조회 1803
peace 2015.12.31 2 1803
53
[토막글] 새로운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 토저 (1)
펀치넬로 | 2015.12.02 | 추천 | 조회 2346
펀치넬로 2015.12.02 2346
52
우찌무라 간조의 전도관
작은자 | 2015.10.22 | 추천 | 조회 3005
작은자 2015.10.22 3005
51
찬양 한 곡을 나눕니다.
매인자 | 2015.09.25 | 추천 | 조회 2541
매인자 2015.09.25 2541
50
바울의 몸의 가시에 관한 나눔 (1)
작은자 | 2015.07.09 | 추천 | 조회 6008
작은자 2015.07.09 6008
49
가족을 잃은 상실에 대한 책 두권 (5)
이누하 | 2015.06.19 | 추천 | 조회 3696
이누하 2015.06.19 3696
48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끝) (1)
이누하 | 2015.06.11 | 추천 | 조회 3456
이누하 2015.06.11 3456
47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4)
이누하 | 2015.06.11 | 추천 | 조회 3842
이누하 2015.06.11 3842
46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3)
이누하 | 2015.06.10 | 추천 | 조회 3441
이누하 2015.06.10 3441
45
롬 7:14~25 나는 누구인가 (2) (2)
이누하 | 2015.06.09 | 추천 1 | 조회 4346
이누하 2015.06.09 1 4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