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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서신 이야기 2

작성자
작은자
작성일
2014-09-17 12:00
조회
3471
고린도 지역은 기원전 3000년 전 설립된 도시로 그리스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부흥 발전했으나 기원전 146년경에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나 씨이저의 명령으로 재건되어 옛날의 명성을 이어 갔으며 아가야 지역의 수도로 바울시대에 약 7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낮에는 야외 극장에서 큰 경기가 열리고 많은 주민들이 도박과 음주,  먹고 마시는 일과 온갖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이 치중했으면서 문학과 예술도 상당 수준 발전 되었다.
같은 로마 사람들도 그들의 언어에 "코린티아조마이(고린도인이 되다)"란 말은 음란하게 되다란 말로 사용되었다.
밤에는 술취한 사람들의 싸움과 그리고 약 1000명의 사제들의 성 행위의 종교 의식.
역사학자들은 이런 고린도를 현대의 시카고와 파리의 멋과 더러움이 섞인 도시라고 평하였다.

고린도는 음란과 인간의 쾌락, 또한 멋이 있는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바울은 어떻게 전도를 했는가?

행전에 따르면 그는 아테네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지식인이 사는 아테네에서 바울은 그들과 논쟁을 하였으나 성과는 별로 없었다.
타락한 도시 고린도에서는 복음이 전혀 전파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고린도 지역에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역시 고난이 시작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고소하였다.
당시 로마법에는 공인된 종교를 믿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고소를 당하고 처벌을 받아야 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전통 유대교와 다름을 알고 이단으로 그를 고소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복음에 회당장 소스데네가 이 소송을 강하게 밀고 나가지 아니 해 취하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의 책임을 물러 그에게 린치를 가하였다.

소스데네는 결국 바울과 같이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가정 교회를 시작하고
그 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다시 제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다.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게 되었다.
고린고 서신은 바울이 앞서 보낸 서신(이 바울의 처음 서신은 현존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고린도 전서에 이 처음 서신이 편집되었다고 생각한다.)의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에 대응하여 다시 편지를 보낸다.

고린도 서신을 읽으면서 이러한 상황을 염두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서신은 전형적인 당시의 헬라적인 서신 형태를 갖는다.
처음엔 인사와 그리고 본문과 마지막 당부와 주변인의 인사의 형태를 갖는다.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피동적으로 되었음을 고백한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자신의 의지로 신에게 접근하거나 신의 소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기원 후 2세기 때부터 이런 계시의 소명보다 의지와 종교적 신념으로 전도가 시작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당연한 결과이다.

여호와께서는 처음에 그의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능력을 주신다.
본인의 종교적 열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2세기 부터 점차 교리적인 발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점차 인간의 이성과 오성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변증적인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초대 교부중 일부는 스토이즘이라는  헬라의 놈(Norm)에서 복음의 본질을 찾기 시작하였다.
소위 신학의 시초가 된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는 그 분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자기의 종교적 열성으로 주님의 일을 시작할 수가 없다.

예수는 그에게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집에 보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는 놀라운 은혜를 받고 놀라운 간증이고 절대 체험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소명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1절에서 주의 강력한 능력에 사로 잡혀 사도됨을 고백하였다.

"사도"란 어떤 임무를 가진 사람인가?
현재 일부 소위 영적 교회에서 사도 프로그램을 두고 있다.
성경을 보면 실소할 일이다.

사도 행전을 읽으면 행전의 기자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서 소명을 받기 전에는 사도라 칭하지 않았다.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만드어 졌는가?

스테반의 순교 후 헬라파 유대인들중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정통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눈에는 핍박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계시가 거기에 있던 것이다.
그 중 일부가 안디옥에서 교회를 시작했으며
그 후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그곳에 파견하였다.
바나바는 주님의 은혜로 준비된 자였다.
바나바는 다소에서 바울을 불러 안디옥에서 성경 말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놀랍게 아가보를 포함한 예언자 그룹이 (행전11장 27) 안디옥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리고 행전 15장에 예언자와 선생이 합십하여 금식하고 기도할 때 주님의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선택하여 사도로 보냄을 받게 하셨다.

사도 행전 15장
"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

학자들은 누가 선생이고 예언자인지 행전 13장 1절에서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에 모른다고 했으나 문맥 전후를 읽으면 예측 할 수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먼저 말씀을 가르쳤기에 선생이고 그 후 예루살렘에서 온 예언자 그룹의 일부가 안디옥에 남아 같이 사역을 하게 된다.
니게르는 흑인을 말하는 단어로 아마 이디오피아 출신 일 가능성이 있다.
시므온이라는 유대 이름을 보아 이디오피아에서 살게 된 유대인인 것 같다.
그리스 지역의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 안디바와 함께 자란 왕족 출신인 마나엔.
여러 계급의 사람이 모여 예언자 그룹이 된 것이다.
이런 이들이 선지자 그룹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은 그 사람의 직위나 능력에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선별된 자들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출신이 농부서 시작하여 제사장까지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이렇게 계급과 직위 인간의 지식의 존재 유무를 초월해 일하신다.
공통된 점은 그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란 사실이다!!!
마태 복음의 팔복의 비밀은 이런 의미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이다.

이렇게 교회는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셔서 선생이란 직분을 주신 사람과 예언자들을 주축으로 만들어 졌다.

바울 서신과 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 예언자, 선생(이는 현재 말하는 단순 선생이나 목사의 직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룹을 따로 만들어 정하신 것을 알수 있다.
유대의 영적 사고에는 평등 개념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의 요구때문에 오는 문제에 단지 누가 오른쪽, 왼쪽 (유대인들은 가장 가까운 자 사랑하는 자들을 오른쪽, 왼쪽에 둔다.)
에 잇을 지 모르지만 그 영적 서열(달란트 의미)을 부정하지 아니하셨다.

물론 이 영적 서열은 세상의 서열과 다르다.
이는 더욱 낮아지고 섬기는 자의 모습이다.
즉 세상의 서열의 사고에서 보면 정 반대이다.
땅에서 낮은 자가 높은 자이고 낮은 자가 하늘에서 높은 자이다.
물론 낮다란 의미는 경제적 의미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을 포기한 "나그네"를 의미한다.

진보적 신학에서 낮은 자들을 땅의 자식들 소위 "암 하레쯔"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유대인을 사회 경제적으로 분류하여 이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자로 해석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해석이다.
경제적 지위의 낮고 높음에 가난한 자가 아니다.
이 가난한 자에 대한 마태 복음 5장의 말씀은 당시의 유대적 사고의 전승과
사회 문화적인 해석이 함께 영적인 감화로 해석해야 할 본문이다

그런데 현재 많은 서적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이 땅에서 성공한 자라고 선전하고 오도한다!!!
세상의 눈을 가진 장님들이 오도하고 있다.
눈에 선명한 이단만 이단이 아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말하지만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는 가르침도 이단의 말이다.
종교적 열성만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게 하는 성령은 우리에게 무엇이 거짓이고 참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다.
심리적 현상과 영적 현상을 구분 못하고
복음과 유사 복음을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정 성령의 가르침으로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와 말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영이 사는 호흡이고 음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령의 주도하심으로 사도 곧 부르심을 입은자들이 선택되었다.
이는 곧 증인이며 헬라어 원어에서 증인이란 단어의 어원은 순교를 의미한다.

곧 사도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사명을 받아 성령으로 택함을 입고 그들에게 역사하신 주의 복음의 능력의 은혜에 감격하여 목숨을 걸고 세상에 보낸진 하나님의 사람인
이 땅의 나그네였다.

그들은 생각은 세상과 다르고 오직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에 이끌려 거룩함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자시 삶의 전부인 사람들인 것이다.

과연 요사이 일부 교회에서 만들어 지는 사도 프로그램은 성경적인가?

바울은 그의 서신에 소스데네를 언급하여 동역자임을 알린다.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천국의 비밀을 안다고 하는 자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전부 이단으로 판명되었다.
그렇기에 모여서 같이 기도하고 코이노니아를 누려야 한다.
영적 교제가 코이노니아이다.
육의 생각을 가지고 만나고 교제를 누리는 것이 코이노니아 즉 교회가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거기에 성령의 거룩함과 진실함이 없으면
그곳은 사당이다.

소스데네는 회당장이라는 위치 (유대교에서 회당장의 위치는 높은 교적 권위를 가지는 자리이다.)에 연연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모든것을 버린 자이다.
그는 그렇기에 그들의 형제로 부터 출교를 당하고 (유대 사회에서는 출교는 사망신고이다.
출교당한 자가 죽으면 그 시체도 만지지 않는다. 단지 따돌림이 아닌 당시 사회 특성  살 수 없다.)
복음의 진리를 받든 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사랑이라고 모든 것을 덮어 주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당신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닌
당신의 계시와 명령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분이시다.

그의 뜻안에 거하는 자는 영원히 사랑하시지만
그의 뜻을 저버린 자는 멸망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혼합주의나 우리의 감정으로 주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결단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소스데네는 자기의 모든 경력과 현재의 가치롤 버리고 진리를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되어 바울의 동역자로 그의 이름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믿음의 선배로 회자되게 된 것이다.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교회,즉 에클레시아가 무엇인지 바울은 정의하고 있다.
히브리어 카할을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사용하였다.
적절한 번역인 것 같다.
즉 부르심을 입은 자란 의미이고 히브리어는 신의 부르심을 받은 회중이란 의미이다.

교회는 그냥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 신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의 특징은 거룩함이다.
어떤 은사적 특징으로 영의 그룹을 말한 것이 아닌 거룩한이라는 단어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의 특성을 나타내었다.
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기에 거룩해야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6장에서 반대 의미의 불의한 자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나열하였다.
불의한 자들은 어느 은사를 받고 안 받고로 정의한 것이 아니다.
이 거룩함이란 단어는 구약에서 이사야 1:4, 29:19, 에레미야 50:29 호세아 11:9 에 의하면 하나님께 사용된 단어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령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이 객관적 증거이다.

"방언이나 예언등 어느 기적보다 거룩함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절대 특징인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또 한  " 주 예수 그리스도" 부르는 자들이다.

성경 사본학을 연구하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부르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점차 바뀜을 알수 있다.
물론 주란 헬라어 큐리오스는 주인을  나타내는 단어이지만
당시의 헬라파 유대인이 사용한 70인역 성서에서는 하나님을 큐리오스로 번역하였다.

예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의 징조로(세메이온: 병고치고 이적을 행함) 예수를 메시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예수 제자들도 예수가 메시야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이란 생각과 유대인이 생각하는 아들이란 개념은 매우 다르다.
삼위일체는 헬라적 개념으로  만든 것이다.)
베드로가 잠시 고백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말이 사람이 말이 아닌 성령의 말이라고 지적하셨다.

예수 제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키리오스라고 고백한 것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에 대해 입으로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리 문답이라는 사도 시대 후에 인간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전통이 있다.

바울은 스테반의 설교에도 변하지 아니 한 사람이다.
그는 다메섹의 역사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다.
스테반의 설교가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의 경험으로
학습이나 교리가 아닌 성령으로 주라 고백한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고전 12장 3절에 "성령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라고 말하였다.

종합하면 교회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자들이 그들의 지적 인식으로 인정할 수 없는
(지적 인식으로는 메시야까지 알수 있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주라 말하고 (이것이 바로 천국의 언어이다!!!) 예수의 성품을 따르는 거룩함이 나타난 자 들이다.

지금은 이 거룩함을 율법적으로 생각하여 청교도적인 삶을 사는 무리도 있고 (그 안에는 자기 의가 있음) 무당처럼 신기한 현상만  따르는 무리도 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그런 모습이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의 정의를 말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부르심은 우리의 힘이나 종교적 열성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그 분의 택하심...
은혜의 결과이다.
그리고 평강은 민수기 6장 26절에 의하면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심으로 표현 하였다.

시편의 기자는 주의 얼굴의 우리에게 향하심을  그의 소원으로 간구하였다.

3절에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선택한 자, 곧 에클레시아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행위이시다.
이는 유대인의 인사 샬롬의 원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시는 은혜!!!
그것이 샬롬이다.

이런 샬롬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바로 성도이며 성령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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