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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때 사도와 우리 믿음의 선진이 믿고 선포했던 말씀의 핵심 주제는 부활과 재림이었습니다.
특히 재림은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재림’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으로 정의하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재림’은 현대 교회에서 삶의 어려움이 닥쳐서 조금 힘들어지면
빨리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재림’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신구약 전체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한 것이기 때문에 막연히 생각하거나 어렵다고 젖혀둘 문제가 아닙니다.
‘재림’은 초대교회가 심한 핍박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심리적인 위로를 위해서 고안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단순히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한 판타지 소설도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기 위해서는
‘재림’의 실현이 필수적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천년 왕국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정경 전체의 통시적 관점에서 재림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구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계시의 목적

계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고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여정을 믿음이란 단어로 표현합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히브리서 3:9-1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브리서 4:1-2)”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여도 마음이 강퍅하여 순종하지 않아서 구원의 과정에서 끊어졌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니라. (히브리서 3:19)”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자에게도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구원에서 끊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기자가 언급한 믿음이란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흔들린다”로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필수 요건인 믿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굳건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굳게 서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깨달아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구원에서 끊길 수 있다고 성경 기자는 경고를 합니다.

즉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향을 하나님의 주신 지혜로 깨닫고
그 여정에서 약속 성취의 소망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계시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만들고 왕국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계시하시고(창세기 15:13-14, 17:6-8, 28:3, 35:11)
그 계시대로 모세를 인도자로 세우시고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신명기 18:15,18에서 앞으로 모세와 같은 새로운 인도자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도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계시하셨고
이러한 하나님의 참 선지자의 분별의 말씀을 신명기18:22에 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명기 18:15,18-19,22)”

이렇게 신명기 15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새로운 계시인
민족의 구원을 이끌 새로운 인도자를 신약에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후,
성전 미문에 앉아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고 솔로몬 행각에서 선포한 설교에서 예수라고 말합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사도행전 3:20-23)”

우리는 초대 교회가 모세의 계시에서 예수를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인도자로 해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22절 말씀에 의하면 성취함이 없는 인도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유대인의 종말론과 초대교회의 종말론

재림에 관한 단어는 유대인의 종말론에서 나왔습니다.
우선 유대인의 종말론을 간단하게 나누면 종말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하리트 하야민(אחרית הימים )은
모세 오경과 선지서를 포함하여 13번 표현되어 있고 아람어로 작성된
다니엘 2장에도 유사한 의미가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49:1, 민수기24:14, 신명기 4:30, 31:29, 이사야 2:2, 예레미야 23:20, 30:24, 48:47, 49:39,
에스겔 38:16, 호세아 3:5, 미가4:1, 다니엘 10:14, 아람어 부분 다니엘2:28)
쿰란 문서에서는 이 단어가 무려 33번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예수 시대의 유대 종말 종파의 하나인 쿰란 공동체는 종말을
마지막 구원의 때(메시아 왕국과 심판의 때)가 임하기 전 하늘에 의하여
미리 준비된 역사의 마지막 기간으로 아하리트 하야민(אחרית הימים )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말을 단순하게 미래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과 연관된 단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정하신 마지막 기간에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과거에 이미(already) 발생하였고
실존의 현재 시각에 그 사건은 영향을 제공하고 아직(Not yet) 발생하지 아니한
미래의 결과의 방향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서 1:2 절에 사용된 ‘이 모든날 마지막(종말)’은 과거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성경의 토라(모세오경) 안에도 종말이란 단어가 4번이나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말은 단지 선지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히브리 성경 전반에 걸쳐 표현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러한 종말론은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 방식으로 유대인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유대 종말론은 히브리 성경의 해석에 기초하였기에 깊이 있는 성경 연구가 발전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종말론 문서에서 설명되거나 규칙으로 적용되는
정결 예식이나 율법이 유대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세 번째, 이러한 종말론적 삶의 지향은 세속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구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하늘과의 교제, 실제적 종말의 기대,
종말론적 전쟁에 관한 연속적인 묵시적 주제를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종말론은 성경 연구와 그들의 예배 의식에서 세속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구분하는 지혜와 함께 그 역사 안에서 이뤄지는 영적 전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신약과 기독교 외경 문서(디다케 16:3과 바나바 서신서 4:9)에서
구약의 종말의 단어인 아하리트 하야민의 번역을 당시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 역에서
주로 차용하며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의 개념으로 번역한 의미와 미래의 시제를
강조한 번역의 두가지 번역 중 미래 시제를 강조한 번역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초대 기독교는 종말에 예수의 재림을 생각하여
과거나 현재에 대한 비중보다는 미래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계시의 성취에 대한 해석

이러한 유대 종말론과 하나님의 계시 성취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분별 기준이라는
전통의 교훈 속에서 유대인은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한 하나님 말씀의 성취와 해석에
많은 고민을 하였음을 히브리 성경의 선지서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계시가 된 왕국의 성립은 이뤄졌고 모세를 통한 계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 성취의 조건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이 축복이 되고 저주가 된다는 경고가 선포되었습니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언약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잘 설명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왕국을 만들었으나
그들이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김에 따라 예레미야 11: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말씀과 같이 저주가 임하였고
예레미야 25:11-12, 29:10-14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외국의 포로가 되고
그 70년이 지난 후 회복의 소망을 주겠다고 계시를 하셨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러한 계시의 성취는 이스라엘의 역사서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역대하 36:21)”
이렇게 예레미야의 계시가 성취된 것으로 표현이 되었지만 사실 많은 선지서에서는
계시의 성취와 역사적 실존의 괴리를 조심스럽게 표현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함께 70년 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회복한다는 말씀이지만 실제의 역사의 공간에서는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계시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망명 생활을 하였고
바사 시대(페르시아 왕국) 때 고레스 칙령(기원전 538)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하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다시 세우고(기원전 520) 성전 봉헌(기원전 515)을 하지만
계시에서 언급한 정치적 독립의 회복은 요원하기만 하였습니다.

바사 시대가 가고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력인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기원전 332-323) 그리고 다시 알렉산더의 여러 후계자의 지배에 놓여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와(기원전 312-198)
수리아의 셀류시드 왕조의 지배(기원전 198) 하에 놓여 있다가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인 에피파네스가 회복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다(기원전 167)
유대인은 반발하여 셀류시드 왕조에서 독립 전쟁을 벌이고 마카베오 왕조(기원전 140-63)를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64년 경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유대 지역에 괴뢰 정권으로 로마 총독 안티파테스를 세우고(기원전 47)
그의 아들 헤롯이 갈릴리 지역 총독이 되고(기원전 40) 그 후에 로마 총독 안티파테스가 독살을 당하고
마카베오 왕조의 회복을 염원하는 세력의 도전에 로마 정부와 헤롯을 함께하여 물리치고
헤롯 대왕(기원전 37-기원후 4)으로 등극하였습니다.

단지 바벨론에서 바사, 마게도냐, 그리고 셀류시드 왕조로 지배자만 바뀌고
아직도 이스라엘이 이방의 세력아래에 놓여 극심한 핍박을 받는 역사의 현장 안에서
다니엘서 기자는 다니엘서(9:1-27: 다니엘 9장은 에피파네스의 학정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에서
예레미야의 70년 포로 생활을 70이레, 한 이레는 7년, 즉 490년으로 새롭게 해석한 계시를 선포하여
역대하, 스가랴, 에스라,느헤미야에서 언급된 예레미야 예언의 시간표를 과감하게 폐기하였습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의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다니엘 9:2,24)”.

(히브리 성경의 유일한 묵시 문서인 다니엘서 9장에서 예레미야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스가랴,에스라, 느헤미야의 예레미야 계시의 성취에 관한 관점의 논의는
다음 강의인 히브리 성경에서 계시의 미성취에 관한 유대교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

히브리 성경의 선지서에서 언급된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prophetic eschatology)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으로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예언적 종말론은 아주 초기에 토라에서 언급이 되며 그 전통의 해석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소망한 종말론으로
현재의 땅에서 주님의 때가 되어 일어난 사건들(현재의 긍정적 작은 변화)에서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며 주님의 개입으로 일반적으로 관계나 회복 등 긍정적 상황의 소망을 표현 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성전의 회복 등이 이러한 관점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모세오경과 선지서 전반의 종말론이 이러한 내용이고
특히 학개와 스가랴 말라기에서 이러한 관점이 잘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2:4 말씀에서 이러한 종말론의 한 예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이에 반하여 묵시적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과 좀 다르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역사의 급격한 단절과 파괴와 재창조를 나타내고 심판, 부활을 묘사합니다.
성전 재건 후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보이지 않자
다니엘서(7-12장)와 에녹1(1,2 Enoch), 바룩 2서(2 Baruch),시빌의 신탁(Sibylline Oracles),
아브라함 계시록(the Apocalypse of Abraham), 에스라 4 서(4 Esdras) 등 성전 재건 후에도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 요원한 시기에 작성된 유대 묵시 문헌 등에서 묵시적 종말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을 강조한 유대 묵시 문헌의 특징은 기원전 1-2세기에 히브리 성경이 정경화 되는 과정에서
정경 문서와 경쟁을 하고 자신들의 계시의 진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약 위인들의 이름을 사용하였고
문서가 작성될 사회, 정치적 상황을 가명과 상징주의로 표현하여 저항 문학의 형태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들의 계시 중 일부는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저자의 현실의 핍박을 보상받는
소망의 종말관에서 상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후에 초기 기독교도 요한 계시록과 2-3세기의 기독교 박해의 시기에 작성된
허마스 목자서(the Shepherd of Hermas: 2세기 초), 베드로 묵시록(the Apocalypse of Peter: 기원후 150년 전),
이사야의 승천(the Ascension of Isaiah: 2세기 후반),바울 묵시록(the Apocalypse of Paul: 3세기 중반)에서
이러한 유대 묵시적 종말론의 전통을 계승한 내용이 표현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기독교유대,기독교 묵시 종말론은 악하고 억압적인 현재의 세계 질서는 임시로
사탄과 그의 수하의 수중에 놓여있고 현재의 이런 악한 세상의 질서는
조만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멸망되고 타락 전의 에덴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창조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악한 세대에서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지만,
조만간 자신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대리자 메시아가 강림하여 자신들을 구원하여 준다는
소망이 표현되고 있고 마침내 메시아의 구원 사역에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력과
전쟁이 시작된다고 영적 전쟁이 표현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오래전에 하나님의 우주적 질서에 따라 사탄의 세력이 멸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새롭게 창조된 새 땅과 새 하늘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 권세를 가진 자가 강림하여
의인을 보상하고 악인을 심판합니다.

예수님의 종말론 인식

예수의 사역 당시에 현재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심판의 종말 소망을 제공하여
갈릴리 중심의 많은 유대인이 애독하였던 다니엘서와 에녹 1서에서
아주 중요한 새로운 묵시적 종말론을 대표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바로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주 사용한 인자(the Son of Man)이란 단어입니다.

인자에 대한 개념은 묵시적 종말론과 함께 나오는 단어이고
고난과 영광이란 서술적 표현이 이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인자란 단어가 구약에서 아람어적 호칭으로 사용된 경우 에스겔서와 시편, 욥기 등에서 볼 수 있었고
묵시적 종말론의 개념에서는 다니엘 7장에서 사용됨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니엘 7:13-14)”

메시아와 인자라는 개념은 좀 다르게 표현됩니다.
메시아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당시의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그의 백성을 해방해 준다는 정치적 종교적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 이러한 유사한 개념의 단어가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된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많이 발견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기에 다윗의 집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개념이
당시의 일반적인 예언적 종말론 개념이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메시아 개념으로 예수를 이해한 증거가 종교 지도자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당시에 정치적 처형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나무)에서 죽음이 부정한 것이라는 종교적 의식 개념도 구약에 나타나기에 (신21:22-2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정치적 종교적 메시아 개념을 제거하기 위한 당시의 종교 권력자들의 교묘한 계략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 묵시 문헌이나 운동은 예언적 종말의 개념과 묵시적 종말의 혼합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일부 단체에 따라 예언적 묵시나 묵시적 예언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의 폭이 종교 단체에 따라 매우 넓었으나 일반 유대인들은
예언적 종말론 개념을 가졌기에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였다고 보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인자란 묵시적 종말론의 개념이 다니엘서나
에녹 1서(에녹 1서 46:1-5, “한 분은 사람의 모습을 했는데 그 얼굴은 은총으로 가득하였고 천사와 같았다.
나는 천사에게 그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왜 시간의 머리를 가졌는지 물었다. 천사는 ‘그는 의를 지닌 인자요 성령이 그를 선택하였기에
그는 모든 비밀을 보일 것이다. 그는 모든 왕과 지배자를 일으켜 죄인을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왕들이 그를 찬미하지 않고
왕국을 자기 소유라 강조하기에 그들을 왕국과 옥좌에서 추방할 것이다.”),
에스라 4서(에스라 4서 13:3-4,
그러자 바다 한가운데서 인자나 나타났고 그는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그의 눈길에 모든 것이 떨고 그의 목소리에 모든 것이 초와 같이 녹아내렸다”)등 외경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인자의 개념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인간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초월적 존재로 다니엘서에서는 짐승의 형태로 표현된 4 왕국과 대조적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묵시적 종말론에 나타난 인자는 고난과 영광이란 단어로 대표되고
예수도 초대 교회도 이 개념을 그대로 사용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인자란 표현이 사용되지 아니하였지만,
고난 영광이란 묵시적 인자와 연관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 표현한 고난이란 단어가 단지 어려움을 표현하는 단어보다
고난과 영광이란 단어를 같이 사용하여 종말론적 개념을 가진 단어로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인자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신약에서 의미하는
인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첫 아담’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자신의 사역이나 대화에서 메시아란 단어보다
인자를 사용했는가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부른 경우가 없고 밖에서 당신을 호칭할 때
메시아라고 호칭한 것을 비교하면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관점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사역을 묵시적 종말론의 현장에 놓여 있음을 표현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묵시적 종말론의 특징 중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영적 전쟁의 시작을 표현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귀신 축사 사역과 함께 누가복음 10:17-20 에서 70인의 제자의 사역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칠십인 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좀 더 인자의 개념을 설명하면 다니엘서에서 의미하는 인자란 개념은 신적인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녹서에서 사용된 인자란 단어는 더욱 발전된 신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메시아는 인성을 의미하는 단어임에 비추어 인자란 신적 초월적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자신은 단지 인성을 가진 예언적 종말론의 메시아를 뛰어넘는 심판의 자격을 같는
묵시적 종말론의 인자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인성을 가진 메시야가 유대 묵시 문학인 바룩 2서 등에서 인자와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메시아 그분이 지상에서 일하는 시기를 마치고
영광 속에서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던 죽은 자들이 모두 다시 일어날 것이다(바룩 2서30:1)”
이렇게 단지 대다수 유대인과 바리새인 등이 생각하는 인성을 가진 메시아가 쿰란 공동체 등
신비적 유대종파에서 비록 확실하게 정의는 하지 않았지만,
인성의 메시아를 초월하는 묵시적 메시아인 인자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사용된 인자란 단어는 공관복음서에 확장된 개념인 메시아 개념을 뛰어넘는
시공간의 진행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렇기에 요한복음은 처음에 로고스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묵시적 개념을 함께 포함합니다.
참고로 다니엘서 7장 13절이 예수께서 인용한 인자의 마지막 때의 임재의 묘사(마태 24:30)와
계시록의 1장7절에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예수의 승천 모습을 “구름이 그를 가려 보이지 않게 하더라
표현하면서 11절에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마지막 때의 다니엘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 30-31을 회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용한 구름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장면을 묘사한
출애굽기 19장16절에서 우레,번개 단어 등은 주님의 직접적 역사개입을 묘사하는 단어들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사용된 여러 단어와 문장의 표현과 구조를 살펴보면 독특한 형식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구약 전문가들은 문장의 구조적 분석을 이용하여 독특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문장 형식이나 단어를 사용하여 어떠한 신성을 강조한 종교적 문서의 형태는
고대 근동지역에서 다른 문서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단지 자연적 구름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신학적 의미가 구름이란 단어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의 해석에서 어느 특별한 단어에 연관된 이미지를 가지고
그 구절을 해석하는 예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자에 관한 깊은 설명을 한 에녹 1서는 신약에서도 인용하였지만
초대 교회에서 이 에녹서를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130년경에 작성되었다는 바나바의 편지에서도 이 에녹서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리겐 제자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제롬, 힐러리,에피파니우스 등 많은 교부의 글에서 이 문서의 글이 인용되었습니다.

유대 종말론을 통해서 본 재림의 의미

유대 종말론의 관점에서 재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재림이란 단어는 히브리 성경의 묵시적 종말론과 함께 당시에
유대인의 사회에 토착화된 헬라 문화의 혼합된 의미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사용하였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선지서에서 언급된 종말론적 계시의 단어인 야훼의 날(The Day of Yahweh)은
아모스서에서는 종말에 야훼 자신이 그의 백성을 이끌어 군사적 승리를 제공하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도 이날에 이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심판의 날에는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언급되어있습니다.
스바냐 1:7에는 그 날에는 불의한 자와 이방인을 선별하여 처벌할 것이며
스바냐 1:14-18에서 이 심판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게 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2:12-17에서 아훼의 날에는 높은 것을 낮게 만들고 모든 차별을 제거한다고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13:9 에서는 이 심판은 오직 죄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선포되었습니다.
요엘 2:1-12 에서는 이 심판의 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두려워하는 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엘 3:14-15에서는 심판의 날은 묵시적 표현으로 우주의 혼란을 묘사하고 있고
요엘 3:16-17에는 이날에 새로운 예루살렘이 거룩하여진다고 선포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70인 역 전통을 따라 야훼의 날이 주님의 날(The Day of the Lord)로 표현되었고
마태복음 24:42-44, 데살로니가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요한계시록 3:3,16:15에3,16:15에 의하면
주님의 날을 밤에 도둑이 오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출현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구약의 여호와의 야훼의 날과 신약의 주님의 날에서 차이점은 여호와의 야훼의 날은
모든 피조물이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심판의 날로 표현되고 있지만,
주님의 날은 주의 백성에게는 임재의 소망을 두고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전서 16:22와 요한계시록 22:20에서는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아람어 마라나타(주여 오서소!)란 단어가 기도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공관복음에 재림의 날과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된 인자(The Son of Man)란 단어는
히브리 성경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가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에서 심판의 날에 야훼로 부터
야훼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인자가 이 땅에 와 통치한다고 표현되었습니다.

이 인자의 개념은 그 후 유대 묵시 문학인 에녹 1서 37-71장과 그리고 에스라 4서 13장에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인자란 단어가 약 80번 이상 사용되지만, 예수 자신이 직접 자신을 인자라고 사용한 예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인자이다“)

그렇기에 학자 중 일부는 예수가 종말론적 계시의 완성인 심판의 때에
다니엘서에 언급된 통치자로 인자가 자신임을 사역 당시의 현재와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다가올 미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의 사역 당시의 모습을 가지고 고통받는 인자(The Suffering Son of Man)와
구약에서 계시한 야훼의 심판의 날에 심판의 인자 (The Judging Son of Man)의 두 가지 역할을 가진 인자를
예수의 인자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재림의 정의에서 헬라 문화의 토착화 흔적을 찾을 수가 있는데
헬라어로 재림이란 단어는 왕의 등극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이 등극에는
그의 주변에 함께하는 호위단과 함께 예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4:30-31에서 주의 날에 인자가 천사와 함께 임재함을 표현하고 있고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는 주의 재림에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서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전형적인 헬라의 문화에서 왕의 등극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묘사 장면입니다.

문자적으로 헬라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다시 온다,
즉 재림(return)이란 개념보다 등극이나 출현을 의미한합니다.

복음주의 종파에서 칼뱅의 기독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승천 후
하나님과 함께하시어 이 땅과 분리되었기에 주님의 날에 “다시 오신다“라는 표현이 맞지만,
루터의 기독록은 따르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8:20에서 예수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겠다는 말씀과
성령의 역할에서 예수의 실재성을 언급한 요한복음의 교훈을 따라 예수가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생각하기에 재림이란 단어보다
예수의 강림이란 단어가 헬라어 원뜻과 통일된 기독론 관점에서 맞는 한글 번역으로 생각이 됩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 재림에 관한 마가복음 1:14,62 ,마태복음 10:23,24-25 ,누가복음 21 ,
고린도전서 1:7,15:23-28,16:22, 데살로니가전서 4:13-18,5:1-11,5:23,
데살로니가후서 2:2-8, 베드로전서 1:7, 베드로후서 1:16, 야고보서 5:7,
요한1서 2:28, 요한계시록 1:7,8-16, 22:20 등 성경 전반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복음에서만 예수의 재림이 직접 표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재림을 표현하는 단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고
천년왕국이란 단어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만 언급되었지만,
현대의 종말론적 교리에서 재림의 관심보다 천년 왕국의 관심이 더 많이 언급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슐라이마흐(Schleimacher)는 그의 책 기독인의 신앙이란 책에서 예수가
개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 교회로 돌아왔기에
(이 개념은 전 시간의 어거스틴의 후기에 언급된 천년왕국의 개념의 영향일 것입니다.)
재림에 관한 예언적 교리는 종합적인 기독교의 종말론 교리의 포함에 제한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 재림 지연의 문제에 관하여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변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사 관점에서 임박한 재림의 긴장은 개인의 구원 경험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과 같이
심판자의 역할로 예수의 이 땅에서 사역보다 구원자로 사역을 강조하여 재림의 기대를 긴장을 완화했습니다.

재림에 앞서 예수의 승천에 관한 성경 외 유대 묵시 문학에서 유사한 표현은
바룩2서 30:1-5에 다음과 같이 작성되어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이는 뒤, 메시아 그분은 지상에서 일하는 시기를 마치시고 영광 속에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던 죽은 자들이 모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보관한 보물창고가 열리고, 수많은 영혼이 한꺼번에 나타나 한마음으로 한 곳에 모일 것이다.
처음 모인 자들은 기뻐하고 마지막에 참여한 자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의 영혼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멸망 시기가 닥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메시아의 승천이 야훼의 날이 다가옴을 알리는 예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 묵시 문학의 배경과 유사한 내용의 종말론적 교훈이 예수 재림의 소망을 가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의 결과를 보고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시작의 관점과 함께 종말론적 신앙에서 역사를 고민하면서
역사의 진행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구약은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의 실현을 고대하였고 예수님은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에서
구약에서 언급한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의 실현을 보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이러한 예수에 의한 종말적 실현이란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하여,
경험적 관점에서 예수의 탄생 이전과 같이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을 두고 어떠한 변증의 관점이 필요하였다.
만일 종말론적 사건이 역사의 목적으로 이해가 된다면
당연히 이 목적이 성취될 때 역사가 끝나거나 최소한 급격한 변화의 조짐을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예수에 의하여 종말론적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왜 역사가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계속 진행되는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인류와 우주의 일반적인 비밀을 둘러싸고 있는
절대적인 시작(창조)과 절대적인 종말의 상징적인 여러 관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란 신학적 문제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통시적으로 본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의 의미

앞에서 언급된 신학자의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예수의 사역에 관한 신학적 문제에 관하여
단순히 정치적 메시야의 도래가 아닌 보이지 않는 우주적이고 영적인 메시야의 의미를 포함한 고통받는 인자로
이미 하나님의 종말론의 구속사가 시작됨을 귀신 축사의 사역과 함께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통하여 회복과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시고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으로 죽은 자의 부활하게 하시고
심판하게 하시는 묵시적 종말론의 시작을 알리고 그의 백성의 회복을 선포하시며
예언적 종말론의 완성의 진행 과정을 보이셨습니다.
재림은 히브리 성경에서 시작한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의 과정에서,
좀 더 구체적인 계시로 표현된 예레미야의 이스라엘의 회복의 주제를 가지고 발전된
다니엘의 묵시적 종말론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예수 사역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마지막 사역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와 같은 권세가 주어지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을 좀 더 깨닫고
악한 영의 지배의 영적 전쟁의 진행에서 마지막 전쟁을 위한 준비 단계로 진행됨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재림 지연은 단지 시간의 경과나 인간의 심리적 반응 혹은 주어진 환경의 단순한 상황적 해석이 아닌
하박국 2:3, 마태복음 24:36과 사도 행전 1:7에서 언급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그분이 사랑을 표현한 베드로 후서의 3:9,15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말씀의 교훈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을 반대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가운데 있는 과정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참고: 하나님의 계시의 지연을 영적 전쟁으로 다니엘서 10:13,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표현하고 있고
요한 계시록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에서는 묵시적 종말론의 과정을 이렇게 영적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물질적, 인지의 세계가 아닌 초월적인 영적 세계의 구조적 과정에서
계시의 지연을 이렇게 설명하였고 예수도 자신의 사역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같이 이러한 영적 전쟁으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의 사역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깨달을 수 없기에
예수의 탄생 때에도 그 많은 성경 학자 그 누구도 예수의 탄생을 알 수 없었고
단지 소수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예수의 탄생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 사역의 한 과정인 부흥의 역사도 인간의 수고나 연구로 알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의 백성에게 보이신 계시로만 부흥의 도래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상징하는 종말론 사역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역사의 방향성과 뜻 일부를
각 시대의 그가 사용하시는 사람에게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계시의 전체적 조감도는 그 누구도 모르고 예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셨고,
보인 계시의 조감도 아래에서 요한 계시록은 상징적 언어로 현 상황을 해석하고
앞으로 구속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계시의 과정에서 비록 그 계시가 속히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은혜로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신실성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속히 계시를 이뤄달라는 간청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계시의 과정이나 지연하시는 기간 내
인내를 가지고 계시를 기다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가며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종말의 계시는 신약에서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계시의 완성이며 이미 히브리 성경 전체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계시는 성취되기 시작되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새로운 인도자를 주시겠다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겼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 주신 계시에 따라 나라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의 도래로 이스라엘이 회복하는
예언적 종말 계시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영적 세력과의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는 묵시적 종말 계시를 주셨습니다.

중요한 예언적 종말 계시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졌는데
그 내용은 70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시의 성취는 역대하,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런데도 성전은 회복되었지만 오랜 기간 정치적 독립이 요원한 현실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 성취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계시 해석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중 새로운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다니엘을 통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졌던 계시는 다시 해석되었고
메시아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신적 존재, 즉 인자의 출현이 새롭게 계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시를 예언적 종말 계시와 비교해서 묵시론적 종말 계시라고 구분합니다.
유대 민족은 계속되는 민족적 억압 상황 속에서 다니엘을 통해 주신 계시에 이은
여러 묵시 문헌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정치적 독립을 넘어서는
우주적 영적 전쟁의 승리를 바라보는 묵시적 종말에 대해 눈뜨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죄에 놓인 ‘아담’을 대치하는 ‘인자’의 강림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최초의 계시가 온전히 성취되는 종말의 계시였습니다.

‘인자’의 강림은 히브리 성경의 예언적 종말 계시와 묵시적 종말 계시의 온전한 성취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도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새로운 인도자가 예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첫 아담’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한 부활하신 ‘둘째 아담’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자신은 다니엘서와 유대 묵시 문헌의 인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계시하셨습니다.
‘인자’는 예언적 종말론의 메시아와 묵시적 종말론의 심판자를 포함하는 상징적인 계시였습니다.
바로 예언적 종말론의 고난 받는 인자와 묵시적 종말론의 심판하는 인자를 포괄하는 단어가
예수께서 계시하신 ‘인자’였습니다.

고난받는 인자의 계시는 이미 온전히 성취되었지만 심판하는 인자의 계시는 미래에 속한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바로 그 인자’라고 직접 선포하지 않으시고
상징적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계시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재림은 단순히 “주님이 다시 오신다”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히브리 성경 종말론의 온전한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마지막 과정이고
이 땅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인도하시는 중요한 푯대입니다.
이 거대한 계시의 방향은 성경 전체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선택하신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음의 푯대이기도 합니다.

히브리 성경의 역사서에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계시로 그들의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의 관점에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였습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의 명백한 계시와 함께 부흥의 역사 속에서
전쟁 중의 조명탄처럼 밝혀 주시는 계시의 등대들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증인들의 증언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종말론적 계시로 우리의 삶은 이러한 계시가 성취되는 과정에 놓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성취하시며 그 과정을 선택하신 백성에게 드러내주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닌 태초에 감추어진
구원의 비밀이 당신의 방식에 따라 선포되고 실현되는 과정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재림이라는 이루어지지 않은 계시가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그 계시의 방향은 성경과 부흥의 역사와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성령의 사람의 선포에서 선명하게 우리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계시 지연의 긴장감은 단지 심리적 문제가 아니고
또한 성취되지 아니한 문제는 단지 시간의 경과 문제가 아닌
악의 문제를 묵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여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불의에 직면하고 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도전하는 악의 도전과 함께 악의 문제에 관한
여러 관점의 심도 있는 고민 속에서 성서의 종말론 기자는 우주적 범위에서
악을 제거하는 소망을 마침내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아래에서 인간의 호소는 어떤 경우는
이런 지연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깊은 종말론의 의미를 깨닫는 지혜를 얻는다고
다니엘서는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히브리서 3:19의 경고처럼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흔들려
믿음을 갖지 못하는 자가 되어 구속사에서 끊어지는 자가 되지 말고
종말론 사역의 계시에 관한 바른 자세를 가지며 하나님의 뜻과 길의 방향성을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여 구속사의 완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왼쪽에는 재림을 부인하는 이성주의의 위험이 있고 오른쪽에는 재림을 이용하는 열광주의의 위험이 있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간절히 소망하여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한 사람도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