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개인의 신기한 경험을 종종 영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증언을 객관화나 정당화시킬 수 없기에
기독교인의 자세로 우리가 취할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의 사도와 그 제자들과 그리고 그들과 연관성을 가진 초대 교부의
글 속에서 나눔을 갖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종종 영적 현상을 강조한 모임 인도자나 신자의 나눔 속에서
신기한 능력 혹은 제식(ritual)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구약에서 어떠한 특이한 때나 시기를 말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유대의 절기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학자들이나 성경은 말합니다.
(참조: 유대 절기에 따른 종말론적 관점을 설명한 브루스 칠튼(Bruce Chilton)의
Redeeming Time: The Wisdom of Ancient Jewish and Christian Festal Calendars)
현대의 독자가 유대 문화의 이해 없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생각하면 미신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기한 능력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제식의 중요성을 언급한 성경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개인의 길흉을 말하는 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시고
그들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금지하셨습니다.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이는 영적 현상에 관한 히브리인의 태도의 이중성이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극복을 위하여 성경의 독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수성을 이해하면서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정치 제도가 어느 정도 신정 전체주의자(Theo-fascists)들에 지배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좀 독특한 나라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모세에 관한 구약의 설명과 달리 기원 전후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보(Strabo)는
그를 애굽의 제사장이라 표현했습니다.
(Heritage and Hellenism: The Reinvention of Jewish Tradition By Erich S. Gruen, p.44)
그리고 이러한 얘굽의 제사장의 반란이 이스라엘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원의 과정에서 언급된
고대 종교의 싸움의 모습을 가지고 종교적 헤게모니 투쟁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신자의 관점에서는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개인에 대한 예언을 언급한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성경의 예언이 개인의 문제보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초점을 둔다고 말하지만 (물론 이 주장도 타당하지만)
개인의 삶에도 주의 예언이 역사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언급한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예언은 개인의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다른 종교의 개인의 예언과 차별되는 내용은
이 공동체나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예언은 주님의 백성에게
향한 주님의 계시의 구속사 완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일반 학자들이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 말하는
이스라엘 전체의 공동체 예언과 미시적 관점에서
그의 백성 하나하나에 대한 예언도 그분의 구속사에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마태 복음에서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세기부터 나타난 교부의 글에서 성경의 이적이나 제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예로 2세기 중반에 활동한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은
구약의 제식이나 절기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이방 종교의 마술과 동일시하였고
계속하여 리용의 이레니우스나(Irenaeus of Lyon), 오리겐(Origen) 등에 의해
이런 영적 현상이나 제식을 미신으로 보는 전통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후에 종교 개혁 후 탄생한 신교의 전통에서도 전승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언급한 개인의 어느 날이나 절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기독교 초기 기독교 전통에 있다가 점차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삶에서 (저도 이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고 지금도 좀 회의도 하지만)
주님이 인도하심의 과정에서 나타난 어느 특정 사람에 관한 구원의 시기를 듣고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나 과정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런 횟수나 사건의 진행이 단지 확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어떤 의도적인 목적의 과정에서 진행을 경험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경험 대부분이 잘못하면
성경의 교훈을 따르기 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예언에 너무 의미를 두거나 강조를 하면
거의 이단(신비주의자)의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고 제 주변에서 많이 목격됩니다.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피조물의 인도함의 주권을 가지시고
인간 스스로 어떠한 노력이나 절차 또는 예식에 따라 영을 요구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무당과 성령의 가장 큰 차이가 이러한 영의 주권에 대한 견해 차이인 것 같습니다.
소위 영을 불러온다 혹은 모신다.” 이러한 영에 관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상이고 거짓 영입니다.
초대 유대교의 신비주의 분파가 일부분이 이런 모습을 가졌고
그들은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여러 특정 종파에서 치유나 예언을 위하여
이런 영을 불러오는 행위는 거짓 영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이러한 예는 구약에서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사무엘 선지자가 죽자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자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로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에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으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상 28장 3-14절)

성경과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교부의 교훈에서
이런 모습을 절대 성령의 운동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은사파 집회에서 인도자가
성령님 초청합니다…. 더, 더, 더, 성령의 불, 불, 불!
외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 성경의 교훈을 따라 분별하면 잘못되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 과정에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손에 짜릿함이 왔고, 환부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느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종종 이러한 경험의 간증의 부분은 이해가 갑니다.
분명 어느 때는 영적 역사 속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신앙 선배의 글에서 많은 경우에 이러한 경험은 심리적인 부분이 대부분이고
혹시 영적인 부분인 경우에도 어느 영에서 왔는지 분별이 중요하다고 경고합니다.

다 잡아 부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영 현상에 강조를 두시는 분들을 성경 말씀에 따라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영적 은사를 어떠한 대가 없이 나누고 개인적 희생의 모습을 가지고만
거짓 영과 참 영으로 분별을 못 합니다.
가장 단순한 예로 인도의 썬다씽(Sundar Singh)은 그러한 대표자이지만
그는 거짓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진정 순결하고 박애 정신의 모습이었지만
단순한 이러한 삶의 자세의 모습을 가지고 영적 분별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적 구별은 우리 각자가 진정 주님의 말씀에 올바로 서 있을 때
특별히 구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
구별의 은사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은사 운동을 추구하는 인도자나 신자가 이러한 영적 분별의 자세를 보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리새인의 삶의 교훈에 몰이해 자세를 가지고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비판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지정의(知情意)를 기반을 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영적 분별의 지혜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1서 4:1)